작년 이맘때, 나는 3년 동안 틈틈이 다녔던 기차여행의 기록을 모아 책 한 권을 펴냈다. 기차와 가장 밀접한 직업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두 아이를 키우는 중년의 아줌마가 혼자서 떠난 여행이었기 때문일까, 한동안은 주변 분들로부터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배낭을 둘러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고, 공부도 해본 놈이 더 잘한다고 했던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직 가보지 못한 역을 더 찾아가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처음 기차여행을 시작하던 때와 비교하면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나는 40대를 거쳐 50대의 길을 조용히 걸어가는 중이다. 첫째는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났고, 둘째는 어엿한 고교생으로 생활하고 있다. 날마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겠다는 다짐도 변화라면 변화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기차역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과 사춘기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자녀(이제는 첫째가 아니라 둘째다)와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3년간의 여행이 대도시와 중소도시를 끼고 있는 기차역을 가리지 않고 떠난 여행이었다면 이번에는 주로 간이역을 여행의 목적지로 삼으려 한다. 네이버나 다음 국어사전에서는 간이역을 ‘역무원이 배치되지 않고 기차가 정차만 하는 역’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한편 학창 시절 즐겨 불렀던 이규석의 ‘기차와 소나무’라는 노래는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로 시작된다. 아마도 가사를 쓴 이는 기차가 멈추지 않고 지나쳐가는 작은 역을 간이역으로 여긴듯하다.
그렇다면 철도공사에서 말하는 간이역이란 어떤 곳일까. 고객이 승차권을 구입하고 열차를 이용하는데 관련된 여객운송약관에 의하면 ‘여객의 승하차 설비만을 갖추고 승차권 발행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역’을 간이역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승강장이 있어서 열차를 탈 수는 있지만 표를 살 수 없는 역이 바로 간이역이다. 영동선이나 경북선에 있는 대부분 역은 간이역이 많아 기차를 탄 후에 승무원에게 승차권을 사야 한다.
각기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사전과 노랫말과 철도공사 여객운송약관에서 말하고 있는 간이역의 공통점을 찾자면 규모가 작고 소박하다는 데 있지 않을까. 물론 요즘은 철암이나 동백산처럼 규모가 제법 큰 역이더라도 승차권을 살 수 없는 역이 더러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내가 가고자 하는 간이역은 사전적 의미의 간이역만도, 철도공사에서 말하는 간이역만도 아니다. 개념적 구분을 넘어 내 마음이 이끄는 작고 소박한 곳을 모두 포함하려 한다. 지금은 기차역으로서의 소임을 다한 폐역(廢驛), 다른 용도로 이용되고 있는 무인역(無人驛), 사람의 발길이 드문 일반역 모두 이번 여행의 목적지가 될 것이다.
아직도 계속되는 코로나 시대에 여행해도 괜찮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대근무의 특성상 사람이 붐비는 주말이나 연휴가 아니라 평일에 다닐 수 있는 시간적 여유로움이 작은 희망이 되었다. 유명 맛집이나 관광지를 선호하지 않는 나의 개인적 성향, 인적 드문 간이역이나 폐역을 많이 찾아가겠다는 내 여행 계획도 다시 집을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것이 스스로가 노력하고 행동해야 하는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한 달에 한두 번 가는 짧은 일정의 여행으로 얼마나 많은 역을 둘러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예전처럼 ‘그냥’ 시작하려 한다. 지난번처럼 3년이 걸릴 수도 있고, 5년이 되어도 못끝내는 여행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지금’ 다시 시작을 준비한다. 지금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이제는 너무도 잘 알기에.
이번 여행에 필요한 커다란 밑그림을 몇 가지 그려본다. 첫째, 약간의 자투리 시간이라도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떠난다. 꼭 1박 2일이나 2박 3일의 여행 일정을 고집할 필요는 없으니까. 둘째, KTX 정차역보다 무궁화호 정차역을 더 많이 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KTX 열차는 앞으로도 많이 탈 수 있지만 철도 환경의 변화로 무궁화호를 탈 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서다. 셋째, 기차여행이긴 하지만 열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이나 열차 운행 횟수가 얼마 없어 시간상 제약을 많이 받는 간이역을 둘러볼 때는 어쩔 수 없이 승용차나 버스 등 타 교통수단을 이용하기도 한다.
기차역은 따스함이요 향수요 그리고 희망이다
나름의 여행 규칙까지 만들었으니 이제 정말 떠나는 일만 남았다. 달력을 보며 다가오는 휴일에 동그라미를 친다. 첫 여행은 일정이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당일치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반찬을 만들어 놓을 일도 없고, 옷가지를 챙길 일도 없다. 철도 노선도를 바라보며 어느 역을 가볼까, 행복한 고민을 한다. 마침 공지영 작가의 책을 읽다 보니 구례 이야기가 나온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삶을 살아온 작가가 자신을 위해 구례에 집을 마련했다고 한다. 책 속에 구례구역으로 지인을 데리러 가는 장면이 있다. 뭔가에 이끌리듯 나는 ‘코레일톡’을 이용하여 열차시간표를 검색한다. KTX 열차는 경북에서 전남까지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기차여행의 3요소라고나 할까, 기차여행을 시작하기 위한 필수 요소를 꼽으라면 떠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자신도 모르는 새 끌려다니던 일상을 하루라도 멈출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승차권이다. 이제 승차권까지 예매해 두었으니 기차여행의 모든 준비는 끝난 셈이다. 표를 사놓고 열차에 오르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아마도 복권을 사놓고 1등 당첨의 기쁨을 생각하며 행복에 젖는 날과 비슷하리라.
이제 기차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그날이여, 어서 오라. 두 팔 벌려 내 너를 맞이하리라. 그나저나 전라도까지 당일치기 여행을 내 몸이 버텨주려나, 은근히 걱정이 밀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