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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심 Sep 24. 2022

구례에 없는 구례구역에  첫발을 내딛다

『구례구역』

  아침 6시, 알람 소리가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난다. 평소 출근 때라면 이불속의 포근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10여 분을 뒤척이다 겨우 일어나건만 오늘만은 예외다. 오랜만에 기차를 탄다는 설렘과 기차 시간에 늦으면 안 된다는 긴장감에 부지런을 떤다. 부리나케 고양이 세수를 하고, 청바지에 남방을 걸쳐 입고, 모자를 눌러쓴다. 모자는 시간이 없어 머리를 감지 못했을 때 유용하게 사용하는 필수 품목이다. 가져갈 물건이 많지 않지만 배낭까지 메고 거울 앞에 서서 셀프 모니터링을 한다. 외모 100점, 표정 100점, 설렘 지수 200점이다.


  오늘은 영주역이 아니라 풍기역에서 기차를 탄다. 거리상으로는 영주역이 좀 더 가까운데 두 곳 모두 역사 신·증축 공사가 진행 중이라 주차 상황을 고려해서다. 작년 11월, 우리 지역에서도 KTX를 탈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공사가 마무리되려면 아직 1년은 더 있어야 하지만 청량리까지 2시간 40분이 걸리던 구석기시대에서 1시간 30분이면 도착하는 철기시대가 되었다. 신석기와 청동기를 뛰어넘은 획기적 발전이라 생각한다. KTX가 첫 운행을 앞두고 있던 날, 역으로 전화해서 개통 축하 말씀을 전하던 고객도 있었다.


  내가 직장에서 맡은 일 중 하나는 모든 공사가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역할이다. 거기에 열차가 신호에 따라 원활하게 운행하는지 수시로 체크하는 일, 고객들이 사고 없이 기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더해진다. 한마디로 말하면 ‘철도 안전지킴이’라고나 할까, 언젠가 둘째 녀석이 나더러 기차역에서 무슨 일을 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순간 안전모를 쓰고, 안전화를 신고 있는 모습을 사진 찍어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승강장에서 오송까지 가는 무궁화호를 기다린다. 오늘은 안전지킴이로서가 아니라 열차 이용객으로 서 있다. 승강장에 부착된 표지가 떨어질 우려가 없는지, 고객이 승강장 바닥에 미끄러질 우려가 없는지, 공사장 부근의 자재들이 위험하게 쌓여있지는 않은 지 살피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자연의 신선한 냄새와 공기의 촉촉한 느낌을 마음껏 즐기기만 하면 된다. 나에게 주어진 특별한 오늘 하루, 더욱 감사하고 행복하게 시작한다.


  오전 11시 3분, 환승 시간까지 포함해 4시간 30분 만에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승강장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예상했던 대로 평일이라 내리는 고객이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역을 빠져나오니 나지막한 돌비석이 보인다. 글자가 보이는듯하여 다가가니 구례구역의 명칭에 관한 내용이다. 순천시에 소재하고 있으나 구례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어 입구 자(口)를 사용하여 구례구역이라 불리고 있단다. 돌비석에서 눈을 돌려 좀 더 멀리 바라보니 이러한 내용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리를 건너면 구례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구례구역과 마주하다

  나는 걸어서 구례읍까지 가기로 한다. 6km의 거리다. 가다가 힘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하면 되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운동을 위해, 특별한 무언가를 하기 위해 걷게 되는 6km와 여행지에서 목적 없이 그냥 걷게 되는 6km와는 다르다. 전자가 음악 감상을 위해 소파에 앉아 베토벤 피아노 소타나 8번, 비창의 1악장을 듣는 느낌이라면 후자는 잘 말린 빨래를 예쁘게 개면서 팝송 웰컴 투 마이 월드(welcome to my world)나 얼리 인 더 모닝(early in the morning)을 흘려듣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혼자서 도로를 따라 뚜벅뚜벅 걷는다. 다행히 지나다니는 차들이 많지 않다. 조금 걷다 보니 한옥 지붕을 떠오르게 하는 입간판이 보인다. ‘자연으로 가는 길, 구례입니다’, 순간 ‘아!’하고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구례에 딱 맞는 표어라는 생각 때문이다. 요즘은 지자체마다 지역을 대표하는 표어가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힐링중심 행복영주,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경북의 중심·도약하는 예천, 전원생활 녹색도시 봉화 등 듣기만 해도 도시의 색채가 잘 드러난다. 자연으로 가는 길, 구례는 다른 표어와 마찬가지로 구례라는 도시가 지니는 특성을 담은 데다가 문학적 향기까지 더해졌다고 느껴진다. 자연친화도시 구례라거나 그린 산소 도시 구례와는 풍기는 바가 사뭇 다르다. 양옆으로 늘어선 나무와 높은 하늘을 동무 삼아 걷고 있는 나는 지금, 자연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드디어 구례군청이 보이고, 읍내에 늘어선 상가건물이 보인다. 작은 식당 문 앞에 코로나로 인해 다른 지역 사람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종이로 써 붙인 안내문을 잠시 바라보며 서 있다. 코로나 시대의 여행이 예전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길가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사서 밖으로 나온다. 앉을 만한 장소를 두리번거리니 학교 앞의 작은 공원이 보인다. 초등학생 두 명이 마스크를 쓴 채 노래를 부르며 지나간다. 실내화 주머니까지 빙글빙글 돌리며 걷는다. 다행히 그들에게서는 코로나 시대의 우울은 찾아볼 수가 없다.


  커피의 온기를 느끼며 여행안내 책자를 살펴본다. 자연 속에 있는 고장답게 명소가 많다.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에 지리산 호수공원, 오산 사성암까지. 모든 곳을 가보고 싶지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자연을 음미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곳, 이 고장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잠시나마 머물 수 있는 곳이면 더욱 좋겠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섬진강 대숲길을 선택한다. 다음 목적지까지의 동선도 고려해서다.


  섬진강 대숲길, 일본의 사금 채취로 아름다운 강변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김수곤 선생이 대나무를 심기 시작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강을 따라 쭉쭉 뻗은 대나무들이 나를 반기듯 늘어서 있다. 대나무가 많았던 곳은 여러 곳 가봤지만 오늘처럼 강가의 대나무 숲길은 처음이다.


  대숲길을 걸으며 주변을 바라본다. 대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강물은 소리 없이 어디론가 흘러간다. 앞서 거니는 두 손 꼭 잡은 연인들의 모습이 그림엽서 속의 스케치처럼 아름답다. 운동복을 입은 채 땀 흘리며 열심히 걷는 아저씨도 보인다. 머리 희끗한 노년의 신사가 산책을 즐기는 중이고 강아지와 함께 숲을 즐기는 아가씨도 있다. 대나무 숲 위쪽에는 제법 큰 규모의 카페가 강을 바라보며 손님을 기다린다.


강과 마주한 대숲길의 한가로움

  멀찌감치 떨어져서 주변을 바라보니 자연도 사람도 더욱 아름답다. 가까이 다가서면 산과 강과 주변의 집들을 내 시야에 모두 넣을 수 없다. 비좁은 사람의 마음에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을 넉넉하게 품을 방법 또한 마음의 거리 유지라는 말이 떠오른다. 매일 만나는 사람보다 여행지에서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을 더욱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속의 거리두기를 잊지 않으려고 하지만 일상이라는 실전에 돌입하면 모든 것이 0으로 리셋되고 만다. 아직도 머리에서만 맴도는 거리두기일 뿐이라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마음이 기억하는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지낼 날을 기약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한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으니 도로 위에서 주운 깨끗한 밤 두 톨이 만져진다. 밤송이를 발로 밟아 직접 깐 것이다. 가시 돋친 밤송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매끈한 밤알이 내 여행을 응원하는 작은 수호천사처럼 여겨져 손으로 꼬옥 감싸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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