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노선도를 보면 구례구역과 곡성역 사이에 압록역이 존재한다. 구례구역이 순천에 위치한 반면, 압록역은 곡성군에 자리 잡고 있다. 압록역(鴨綠驛), 지명을 보자마자 압록강이 떠오른다. 공교롭게도 한자를 검색해보니 똑같다. 북쪽에서 흐르고 있는 강과 남쪽의 기차역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마는 나는 압록강과 마주한다는 두근거림으로 압록역을 찾는다.
역은 도로 옆에 네모난 공장 건물처럼 자리 잡고 있다. 본래의 모습을 잃고 쓸쓸하게 서 있는 건물이 마치 성형 수술을 마친 여성의 얼굴처럼 어색하다. 들어가서 타는곳 내부라도 보고 싶지만 출입구는 굳게 잠겨있다. 열차가 서지 않으니 당연한 일인데도 혹시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있나 싶어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을 몇 바퀴 돈다. 씁쓸한 마음을 달래주듯 역사(驛舍) 앞의 섬진강이 조용히 나를 감싼다.
마을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걷는데 놀이동산 같은 건물이 보인다. ‘압록 상상스쿨’이다. 작은 마을에 비해 규모가 꽤나 커 보인다. 입구를 지키는 아저씨한테 물으니 놀이동산, 물놀이장, 거기에 체험센터까지 있는 곳이란다. 놀이동산이라…….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무슨 날이라고 이름 붙은 때마다 찾아갔건만 둘째가 놀이동산과 멀어질 나이가 되고부터는 자연 갈 일이 없던 곳이다. 일상에서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해보는 것이 내 여행 수칙 중 하나다. 오늘도 나는 오래도록 가보지 않았던 놀이동산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 ‘아줌마 혼자 놀이동산에?’ 잠시 마음속의 머뭇거림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건물 꼭대기에 커피숍이 있어 나 말고도 놀이동산으로 들어가는 성인들이 몇 명 있다.
핼러윈 호박과 마녀가 나를 맞이한다. 어린 자녀와 함께 왔다면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라도 세워 두고 사진 몇 장 찍었을 곳이다. 야외 물놀이장에는 여름 한철, 아이들을 마법의 세계로 이끌었을 미끄럼틀이 그들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깊은 잠에 빠져있다. 앙증맞은 미니 기차도 꼬마 손님을 기다린다. 압록역에서는 탈 수 없는 기차를 이곳에서는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얼마 전, 오래된 사진첩을 펼쳐 볼 기회가 있었다. 놀이공원 벤치에 나 혼자 앉아 있는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때의 기분과 몸 상태가 고스란히 기억났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 큰 애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갔던 날이다. 첫째를 낳고부터 몸이 많이 안 좋았던 나는 그날도 온몸이 쑤시고 기운이 없었다. 게다가 야간 근무를 끝낸 후라 피곤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휴일이라고 아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갔다. 사진을 보고도 그때의 몸 상태가 기억날 정도라니…….
조용한 공원 안에서 부모로서의 내 삶을 되돌아본다. 아이를 위해 많이 보여주고 느끼게 해 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놀이동산, 공연장, 박물관을 찾지 않으면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질세라 무던히도 애를 썼다. 시간 날 때마다 여행했고, 또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읽어주었다. 나름 최선은 다했지만 마음을 다해 함께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데 무슨 공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앞섰다. 어디에 가서 뭔가를 보여주기에 급급할 게 아니라 어디에 있든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 했던 건 아닐까. 늘 그렇듯 지나온 후에야 깨닫고 반성한다.
압록마을 정경
1층에서 안내를 하던 아저씨가 커피숍 경치가 좋다고 해서 올라가 본다. 역시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명품 전망이다. 압록마을,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곳. 풍부한 강물 덕에 유원지가 형성되어 여름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도 한다. 아이들의 놀이시설과 야영장을 갖추고 수상스포츠까지 즐길 수 있으니 압록은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하나의 놀이동산이다.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1시간 남짓 경치만 바라본다. 흐르는 강물과 강 위에 놓인 다리와 산의 능선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그것과 함께 존재하는 집들을 바라보는 것은 더욱 좋다. 집이라는 사물을 바라본다기보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의 체취를 떠올려서 일게다.
어느덧 구례역으로 돌아가 기차를 타야 할 시간이다. 상상스쿨을 나와 도로 옆에 트럭을 세워 둔 아저씨께 버스 타는 곳을 묻는다.
“구례 가는 버스 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되나요?”
트럭 뒤의 짐을 정리하던 아저씨가 나를 돌아본다.
“기달려 봇시요. 태워 줄랑께.
아저씨는 시쳇말로 참 쿨하시다. 다시 묻지도 않고 그냥 태워주신단다. 마침 아저씨도 그쪽으로 가려던 참이라고 하시면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의 통 큰 친절에 내 목소리 톤은 한껏 올라간다.
“그랑께 혼자서 왔다고? 우리 딸도 시집도 안 가고 지 혼자 여행만 다녀서 죽겄소.”
막상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딸이 대견해서 죽겠다는 자랑으로 들린다. 트럭은 압록의 자연을 뚫고 시원스레 달린다. 아저씨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으며 구례까지 가는 길, 나를 위해 마스크를 벗지 않는 아저씨가 한없이 고맙다.
짧은 머무름, 그 위를 스치는 지난날의 단상(斷想)들. 구례 여행을 마친 소감이다. 집에 돌아와 압록에 대한 자료를 찾던 중, 김종제 시인의 〈압록역이라고 있다〉는 시를 알게 되었다. 간이역을 소재로 한 시를 모아 최학 선생이 이야기를 덧붙인 《시가 있는 간이역》(서정시학, 2012년)이라는 책 속에 실려 있었다. 압록역의 예전 모습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어 그대로 옮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