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킹#1 : 아이거글래처 - 클라이네샤이덱
융프라우의 깊은 감동과 여운을 뒤로한 채 기차를 타고 '아이거글래처'역에서 내렸다. 융프라우 주변에는 많은 트래킹 코스가 있는데, 그중에서 내가 선택한 코스는 가장 난이도가 낮은 곳으로, '클라이네샤이덱'까지 걸어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돼 된다. 난이도만 낮을 뿐이지, 경치가 못하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역에 내리자 얼어붙은 몸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아침부터 내린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적당한 구름이 트래킹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푸른 초원 지대 옆에 빙하로 둘러 쌓인 융프라우, 역에 내려서 본 첫 풍경이다.
내려서, 신발끈도 다시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걸을 준비를 했다. 목적지까지 내리막길 코스이기 때문에 산책하듯 걷기만 하면 되는데, 쉬운 길을 눈앞에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위에서 바라봤던 융프라우가 바로 앞에 있는데, 이 풍경을 계속 눈에 담고 싶어서 한동안 서서 잠시 바라봤다. 밑에서 바라보는 융프라우 역시 장관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장관들을 기대하며,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걸어도 걸어도 멀어지지 않는 융프라우를 옆에 두고 걸으며, 계속 감탄했다. 와이프에게 내가 생각하던 스위스라고 지겹도록 얘기를 했다. 푸른 초원과 눈을 보면서 걷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스위스였는데, 실제로 하고 있으니 그 감격은 가히 최고였다. 여태 내가 여행을 다니면서 트래킹을 한 것은 딱 한번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였는데,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했던 트래킹 중 최고였지만, 트래킹을 위한 여행은 스위스로 무조건 와야 한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걷다가 또 잠시 서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산을 보고 있자니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그냥 보고 감탄만 했다. 보통 1시간 반이면 걷는 코스라고 하지만, 난 사진을 찍고 있으니 아마 2시간 이상 걸릴 것 같았다. 오늘 총 2코스를 걸어야 했기에, 사진만 찍고 있을 수 없어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아쉬운 발걸음을 떼었다.
융프라우와 나란히 걸어보기. 이건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다.
스위스에 와서 패스권을 끊어서 기차로만 이동하는 여행객들이 많이 있다. 실제로 융프라우를 감상하고 다시 그냥 내려가는 관광객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는데, 이런 경험을 못해본 다는 것은 정말 아쉬운 것 같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해 준 와이프에게 고맙다고 했다. 처음 여행 일정을 짤 때, 트래킹만 있길래 의아했지만 정말 안 해봤으면 평생을 후회할 뻔했다. 앞으로 남아있는 트래킹도 더 기대가 되었고, 향후 일정에서도 와이프가 걷자고 하면 두말없이 바로 '오케이'를 외쳤다.
푸른 초원에 은은하게 들려오는 소종 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귀를 즐겁게 해주었고, 푸른 잔디에 형형색색 띄고 있는 야생화들과 버티고 있는 융프라우가 눈을 즐겁게 해주어, 걷는 내내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앉아서 경치를 그저 바라보며 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잠시나마 앉아서 그 경치를 바라보며 쉬었다. 그리고, 땀이 좀 식으면 다시 걷기를 반복하며 이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초원 사이를 가로지르는 기차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애니메이션 '알프스의 소녀'라던지 '알프스'하면 떠오르는 그 이미지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거짓말 같았다. 누워서 하늘도 보고 싶고, 앉아서 책도 읽고 싶고, 그저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음악을 들으며 쉬고 싶었다. 정해진 일정이 있는 여행객인 나는 그저 아쉬워 시간을 투자할 수 없어서 아쉬울 뿐이다.
먼저 앞서 가던 일본 단체 관광객들이 중간에 만난 소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돌아가며 사진을 찍는 일본인들을 피하다가, 금방 생산한 따끈한 소똥을 푹 밟아버렸다. 그 느낌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 비명을 지르며, 근처 잔디에서 비비며 조금이라도 더 닦으려고 애썼다. 그래도 안 없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체념하고 그냥 걸었다.
트래킹 하며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소똥이다.
이미 말라버린 것은 상관이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정말 정말 조심해야 한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주변을 확인해야 한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스위스에 트래킹 하러 간다고 하면, 지뢰밭이니 조심해라고 했는데 한번 당해보니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소를 지나서 더 걸으니 연못인지 저수지인지 인공적으로 만든 듯한 호수가 나왔다. 그리고 작은 오두막이 있길래 화장실인 줄 알고 들어갔더니, 내가 좋아하는 카메라들이 천장에 잔뜩 매달려 있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옛날 클래식 카메라들을 만나서, 혼자 신나서 한참을 고갤 들어 바라봤다. 처음 보는 카메라들도 있었고, 내가 아는 카메라들도 있어서 아마 여기에서 제일 신난 사람은 나였을 것 같다.
오두막 옆에는 족욕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발을 담그면 시원한 물속에서 더위를 식힐 수 있었는데, 아까 전에 봤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발을 담그고 쉬고 있었다. 소심하게나마 복수라고 생각하며 구석에서 그 물에 신발을 씻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여기가 중간 휴식처인지,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있어서 어제 COOP에서 장 봐온 빵과 소시지를 먹으며 체력을 보충했다.
땀도 식히고, 간단한 식사를 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장관이었다. 이런데서 간단하지만 이런 식사를 하고 있으니, 정말 꿀맛이었다. 옆에 기차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데, 부러워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마 부러워했을 것 같다. 이렇게 좋은 곳을 못 느끼고 내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즐겼다. 점점 내려올수록 기온은 올라가서 더워졌지만, 바람만큼은 여전히 시원했다.
스위스는 트래킹 하기 정말 최적의 장소다.
충분한 휴식을 가지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푸른 초원과 소와 기차가 한 폭의 그림 같은 곳을 지나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잠시 서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와이프도 기다려준다. 내가 사진 찍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그냥 서서 사진 찍고 있으면 이해해주는 와이프가 너무 고마울 뿐이다. 걷다가 사진 찍기를 반복하면서 1시간 30분이 걸린다는 트래킹 코스는 2시간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저 멀리 목적지인 '클라이네샤이덱'이 보였다. 힘이 더 나기 시작했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가까워지는 역을 바라보며, 다시 트래킹을 시작했다.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클라이네샤이덱' 역에 도착했다. 환승역이라 그런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아침에 다녀왔던 융프라우에 가기 위해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 그린델발트로 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 라우터브루넨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 다양한 목적지를 가진 여행객들이 어우러져있었다. 트래킹 하며 못 간 화장실도 다녀오고, 다음 코스를 걷기 위해 재정비를 했다.
시계를 보고 잠시 고민을 했다. 다음 코스를 갈지 말지, 아니면 어떤 코스를 가야 할지.
'클라이네샤이덱'에서 '뭰리헨' 방면으로 트래킹을 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기차 시간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아서 다음 트래킹 코스는 아이거 북벽과 나란히 걷는 '알피글렌' 역까지 1시간 30분 동안 걷는 코스를 택했다.
재정비를 마치고, 난 코스 입구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