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다 가기 전
옷 꼭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날씨가 춥든 말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싶다. 추위에 덜덜 떠는 건 밖에 나가서 내가 알아서 할 일. 일단 예쁜 옷을 걸치고 기분 좋게 나가고 싶은 바람이다. 직장 때문에 상경하여 이제 돈 좀 벌었겠다 입고 싶었던 옷들 입으며 덜덜 떨고는 했다. 내가 춥게 입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데 남이사 뭔 상관인가. 한겨울에 핫팬츠를 입어도 그러려니 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왁싱을 받으러 갔다. 처음 가는 가게여서 잔뜩 긴장을 하고 문을 열었는데, 날 반긴 건 까랑까랑한 목소리의 안녕하세요오 였다. 사람 음성이 저렇게도 높고 밝을 수 있구나. 나름 여러 사람 만나 봤지만 아직 만나 볼 사람이 잔뜩이다 싶었다.
그는 날 보자마자 잔뜩 눈썹을 늘어뜨리고는 안 추우세요?라고 물었다. 낯선 이가 던지는 관심은 그다지 반갑지 않기에 떨떠름하게 추워요. 대답했다. 춥긴 추웠다. 찬 바람이 치마 속으로 들어오고 코트 안을 헤집고 다녔으니까. 아니 이게 그럴 정도인가 하는 민망함은 덤.
도착하자마자 과하게 반겨주던 소리에 혹여나 말이라도 걸까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제발 말 걸지 마라. 제발 조용히 시술해 주세요. 그래서인지 그녀의 톡톡 거리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고 걱정이었다. 그 음성이 상당히 튀었거든. 통통.
약간은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밝고 또 맑은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에게 말을 걸고 사소한 걱정을 내비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태 받은 시술 중 가장 안 아팠다. 감기약 기운에 취해서였나… 털을 쥐어뜯는데 잠이 오더라. 나도 잘 모르는데, 분명 모르는데 어떻게든 덜 아프게 하려는 게 느껴졌다. 잘 모르는 걸 어떻게 느낀다는 걸까? 하나도 몰라도 때론 다 아는 마냥 다가올 때가 있다. 이때가 그랬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잠에 청했다. 잔털 뽑느라 열중인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 정도로 안 해도 되는데... 쿨쿨.
끝났다. 어떤 식으로 관리해야 하는지 또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안 귀찮을까? 그러나 다 들었다. 다 아는데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듣고 싶었다. 뚜렷하지 않은 다정함을 주워 먹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끄덕. 주는 건 또 얌전히 다 받은 다음 주섬주섬 옷을 입고 신발을 대충 걸쳤다.
나를 빤히 보던 그녀가 옷 좀 꼭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라고 잔소리했다. 상당히 통통 튀는 음성으로.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초면의 남이 하는 오지랖과 잔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하하 웃고는 기분 좋게 나왔다.
모르는 사람도 진심으로 나를 걱정할 수 있구나. 걱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내가. 꽤 좋은 감정이 든다. 이번 달 들어 가장 좋은 기억 중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추워요?
그냥 하고 싶은 날이 있다. 뭐든. 이유를 갖다 붙이지 않고 내 행동에 근거를 대고 싶지 않은 날. 굳이 모자를 쓰고 헤드셋을 낀 채 출근한 날이 그날이었다. 애석하게도 날이 제법 풀려 그다지 춥지 않은 날에 꼭꼭 방한을 하고 있자니 조금 웃겼지만 꽁꽁 싸맨 세상에 날 가둔 것 같아 나쁘지 않았다.
나와 마주친 사원님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추워요?
그 미소가 너무 온화해서 바로 대답을 못 했다. 풀린 날씨보다 더 따뜻한 미소라고 느껴서.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춥지는 않아요.
미소에 어울리는 주름이 아름다웠다.순간 거기까지 눈에 들어오자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던 거다. 저만큼의 따스함을 가졌으니 아름다운 주름이 새겨지는 거겠지. 타인의 추위를 발견하고 걱정할 수 있는 다정한 품성을 지녔기에 나올 수 있는 거겠지.
춥게 입고 다니는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걱정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걱정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왔음을 절실히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사람. 내 말을 들은 누군가 감동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추운 날에는 적당히 따뜻하게, 나를 괴롭히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알 바야?의 마인드가 아니라, 내 알 바가 맞긴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