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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망치는 효과적인 방법

북촌 여행 넷째날, 정독도서관

by 어슬


이 글은 서울에 살며 북촌 인근에서 일을 하는 작가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짧게 떠난 여행에 관한 기록입니다. 늘 익숙하게 지나던 거리와 풍경들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여행자의 제1수칙, 컨디션을 조절하라


미련하게도, 전날 과음한 탓에 아침내 컨디션이 엉망이다.


멀리 떠난 여행지에서도 종종 이런 일이 생기곤 한다. 마음에 드는 로컬 펍에서 흥에 취해 한잔 두 잔 하다 보면, 과도한 음주는 텅 빈 지갑과 숙취로 이어지고 여행 일정은 엉망이 된다. 그렇다고 비싼 돈 주고 온 여행지에서 마냥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순 없는 일. 꾸역꾸역 거리로 나서는 것이다.


오늘은 딱 그런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하나. 행선지도 미처 정하지 못했다.


원체 여행을 가도 사전에 스케줄을 빡빡하게 잡지 않는 편이다. 꼭 해보고 싶은 것만 한두 개씩 일정에 넣어두고 나머지는 그날의 기분에 맡긴다.


다행히 날이 많이 덥지 않다. 조금 걸어보기로 한다.

걷다 보니 속이 요동을 친다. 뱃속에 먹을 것을 넣어주는 게 급하다. 얼큰칼칼 뜨끈한 국물이 절실하다. 이럴 때 꼭 먹어주는 음식이 있다.



라면 땡기는 날의 떡만두라면 + 계란추가. photo by_윤씨



삼청동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라면 땡기는 날'. 가게 이름이다. 라면이 뚝배기에 끓어 나오는데, 한국식 라면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제일 유명한 짬뽕 라면은 메뉴판에도 적혀있듯이 '덜 매운맛도 많이 맵'다. 매운 걸 잘 못 먹는다면 짬뽕 라면은 피하는 게 좋다.

라면 한 그릇으로 속을 풀고 나왔다. 한여름인데도 가게 밖이 오히려 안보다 시원하다. 어찌 된 일인지 바람이 살살 불면서 시원한 공기가 땀을 식혀준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평소에는 눈길도 안 가던 정독도서관 입구가 새삼 눈에 들어온다. 즉석에서 오늘의 여행지로 정해 본다.



알고 가면 더 재밌는 정독도서관 상식


정독도서관은 늘 만남의 장소였을 뿐, 들어가 볼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기억도 잘 안나는 학생 시절에 하루, 시험공부를 하러 가 본 적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행지로 정해놓고 지도를 보니, 웬일인지 부지가 꽤나 넓다. 도서관이 이렇게 컸던가? 살짝 흥미가 돋는다.


도서관 앞에 세워진 간판과 기념비들을 우선 들여다본다. 이렇게 보니, 정독도서관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많은 곳이었다.



정독도서관에는 간판도 많고 기념비도 많다. photo by_윤씨



조선시대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의 집터였고, 조선 후기에는 총포를 만들던 화기도감 터로 이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국보 216호로 지정되어 있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도 이 곳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고종에 와서는 한국 최초의 관립중학교가 들어서, 중등교육의 발상지가 되었다. 이 중학교가 관립한성고등학교, 경성고등보통학교, 경기공립중학교 등 여러 번의 개명을 거쳐 119년의 역사를 가진 경기고등학교가 된다. 완공 당시 스팀난방 등 최신식 설비를 갖췄던 건물들은 현재 등록문화재 2호로 지정되어있다.



넓고 쾌적한 정독도서관 앞마당. photo by_윤씨



서울시가 1976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이듬해에 도서관으로 개관하면서 지금의 정독도서관이 되었다. 규모가 자그마치 대지 1만 1,032평, 건물 3,939평이나 된다 하니, 한국 최초의 관립중학교가 들어설 당시 이 학교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된다.


강남 8학군의 상징으로만 알고 있었던 경기고등학교가 여기에 있었다니... 이 넓은 부지가 모두 교정이었다니...



짧아서 아쉬웠던 도서관 투어


너른 교정 곳곳에 잔디밭이 한가로이 펼쳐져있다. 걷다 보면 인왕제색도비를 만날 수 있다. 교사 앞에는 커다란 분수가 놓여있다.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여름의 열기를 식혀주고 있다.


건물 안으로 발을 옮긴다. 책을 대여하거나 공부를 할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둘러볼 요량으로 도서관을 구석구석 살피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평소에 못 보고 지나쳤던 것들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온다. 청소년실 앞 입간판에 적힌 귀여운 손글씨에 웃음이 난다. 더위를 피하려고 들어 온 손님들도 눈에 띈다.


로비를 지나 들어가니, 이 곳이 과거 학교였음을 체감케 하는 복도가 눈에 띈다. 양쪽으로 교실이 늘어서 있었을 과거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여고괴담을 연상시키는 정독도서관 내부 복도. photo by_윤씨



2층에 있다는 화장실에 가는 길은 어둡고 복도는 왠지 으슥해서 겁이 난다. 학창 시절, 학교를 배경으로 한 괴담은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아무도 없는 학교 복도를 걷는 게 겁이 나, 교실에 두고 온 물건을 포기하고 돌아서곤 했었다. 그때의 그 감각을 몸은 잊지 않았나 보다.


점심식사는 이미 마쳤지만, 도서관 건물을 벗어나 식당에 들러보기로 했다. 어느 도서관이든, 구내식당은 저렴한 가격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서 주머니 가벼운 학도들에게 인기가 많다. 나처럼 더위에 지친 사람은 들어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다리를 쉬기도 좋다.


식당에서는 학생들, 꼬마들과 부모님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한창 식사 중이셨다. 특이하게도, 혼자 온 사람이 많아 그런지 모두 배식대 쪽을 보고 한 방향으로 앉았다. 마치 식당에 앞과 뒤가 있는 것 같은 모양새가 재미있었다.


식당에서 돌아 나오는 길에 지나치던 열람실 이름이 눈에 띈다. 어문학, 족보실. 어문학이야 그렇다 쳐도 족보실이라... 슬쩍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익숙한 책 냄새에 마음이 동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독도서관은 1985년에 족보자료실을 개실했고, 지금까지도 족보실은 중점사업 중 하나라고 한다. 책장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끝까지 들어가, 나의 뿌리를 찾아냈다. 그 안에 집안의 역사가 다 쓰여있을 테지만 시간이 없다.



귀여운 손글씨가 적힌 보드와, 책냄새 가득한 열람실. photo by_윤씨



나오는 길에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식사를 하고 계시던 어르신들을 보니 아버지 생각이 났다.


생각이 나 전화드린다 했더니, 고맙다고 하신다. 더 자주 떠올려드리지 못하는 게 죄송했다. 간단히 안부를 묻고, 통화를 마쳤다. 이제 정말 일터로 돌아갈 시간이다.

오늘의 여행은 말하자면 실패다. 컨디션을 조절하지 못해 일정이 엉성해졌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게 늘 새롭고 감동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란 걸 알기에 상관없다. 이렇게 또 북촌에서의 하루가 쌓여간다.



오늘의 일정 : 정독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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