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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반장 Mar 31. 2020

스노비즘에 대해 알아보자!

스놉이라는 개념의 출현은 19세기 영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 영어 단어 'snob'에는 하류층 사람들이라는 의미밖에 내포되어 있지 않았으나, 19세기부터 그것은 신사인 척하며 젠체하는 허영심 많은 사람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는 <속물열전(The Book of Snobs)>에서 이런 스놉들은 단지 하층계급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모든 계급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 하층계급 출신이며 인정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스놉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판단자 또한 또 하나의 스놉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을 알려주게 될 뿐이다.



스놉은 명확하지 않은 개념일 뿐더러 일정하게 합의된 의미가 존재한다고 보기도 어려운 개념이며, 그러므로 스놉의 의미를 성급하게 규정하려는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특히 누구나 어느정도씩은 스놉일 수밖에 없는 현실상, 성급하게 규정되는 스놉은 단지 자신의 반대편을 악한 것으로 놓고 자기 자신을 선한 것으로 놓으려는 원한에서 비롯되는 수사적 공격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지적 허영'을 의미하는 시쳇말로 '스노비즘'이 사용될 때, 그러한 스노비즘 개념을 손쉽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되려 스놉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는 것 역시 이때문이다.



스놉과 스노비즘이 그 자체로 규정되기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러한 성격에 대해 말하려는 문화사회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은 그 반대 개념에 해당하는 진정성(authenticity)을 제시함으로써 스놉과 스노비즘을 설명하려 한다. 진정성이라는 개념 역시 그 반의어인 스노비즘과 마찬가지로 규정되기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라이오넬 트릴링의 <성실과 진정(Sincerity and Authenticity)>이나 그에 영향을 받은 찰스 테일러의 <진정성의 윤리(The Ethics of Authenticity)> 등에서는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태도로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정성이란 (유아론적인 의미 혹은 세속적인 성공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진실하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태도이며, 반대로 스노비즘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면서 타인에 대해 우위에 서려고 하는 태도로 규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페라를 감상하러 가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오페라가 그에게 정말로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즉 오페라의 내용 자체가 그를 감동시키고 전율시키기 때문에 오페라를 감상한다면 그는 그것을 진정한 예술로 향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오페라를 향유한다는 사실 그 자체, 그러한 사실에서 오는 타인에 대한 우월감, 오페라라는 '고급 예술'의 형식, 오페라가 지배계급의 문화라는 사실 등에서 그가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러한 즐거움은 단순한 스노비즘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본다면 이 두 가지 측면은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오페라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형편없는 수준의 스놉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어느 정도씩은 그 내용을 즐길 것이며, 반대로 누구라도 자기 자신이 고급 예술을 향유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도 약간의 만족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노비즘의 문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교묘하게 작동할 수 있다. 우리는 제대로 향유할 줄도 모르는 사치를 즐기는 '천박한 인간들'을 한심한 부류의 사람으로, 다시 말해 속물적인 인간으로 쉽게 정죄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에 반해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향유할 수 있는 능력, 예술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사용된 암호들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 혈통과 학력에 의해서만 암묵지의 형태로 전수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에 대해서는 보다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려 한다. 이것은 곧 귀족적인 취향이 되고 '범속한 사람들'보다 우월한 취향의 표식이 된다. 한국 학술장에 나와 있는 스노비즘에 관한 서적들 중에는 이러한 '문화귀족'들이 여타의 '천박한 인간들'의 취향을 비웃는 부류의 서적도 더러 있는데, 이런 식으로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또 하나의 스노비즘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스노비즘은 어떤 대상의 알맹이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으면서,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껍데기만 빌려오는 일체의 성향으로 이해될 수는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두 가지 측면은 쉽게 구별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어느정도씩은 스놉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인식은, 달리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라는 수사까지도 스노비즘의 일부가 되는 현실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천박한 속물로 보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진정성을 연기하기 위해 애쓰며, 그러한 연기는 심지어 자기 자신도 속이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스노비즘의 일반적 의미가 된 지적 허영 역시, 그것이 진정으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추구를 통해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스노비즘에 해당된다. 그러나 지적 허영에 빠져 있는 사람들 또한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 면모를 최소한으로는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스놉과 스놉이 아닌 사람들 사이의 경계는 극히 희미해진다. 결국 스노비즘에 관한 담론은 언제나 하나의 질문, 즉 '사람은 애초부터 스놉이었으며, 진정성이란 단순한 허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가 보다 '진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양계급의 취향마저도, 실제로는 자기과시를 위한 계급의 표식일 수 있다.


<출처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8A%A4%EB%85%B8%EB%B9%84%EC%A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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