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전 상대는 강호 국민학교만큼이나 거칠고 험한 환경에서 자라난 장산 국민학교의 아이들이었다. 경기장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이들이 낡은 철제 담장을 지나칠 때마다, 오래된 페인트가 벗겨진 벽면과 틈새마다 잡초가 삐죽 고개를 내민 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의 모든 것이 흙먼지를 이겨내며 하루하루 버티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여긴 진짜 무슨 전쟁터 같아, "
한 아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주변을 둘러보며, 어느새 말없이 맞장구를 쳤다.
울퉁불퉁 돌이 가득한 황량한 운동장은 먼지가 풀풀 날리며 자신들을 품으려는 듯 위압감을 풍겼다.
"괜찮아, 너희들도 이렇게 거친 곳에서 자랐잖아, "
다른 친구가 다독이듯 말을 건넸지만, 아이들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한 친구는 슬쩍 발끝을 돌에 툭 차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뭔가 달라, 여긴… 여긴, 그냥… 느낌이 더 거칠어."
장산 국민학교 아이들은 이미 운동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상대 팀의 시선은 예리하고, 이 돌투성이 운동장이 자기들만의 성역이라도 된 듯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은 ‘우리는 이곳의 왕이다’라고 말하는 듯 아이들의 심장을 울렸다.
지난 3차전에서 리라 국민학교에 패배해 남은 구슬은 이제 2,600개뿐. 강호 국민학교 아이들에겐 물러설 곳이 없었다. 장산 국민학교와의 이번 승부에서 반드시 승리해야만 했다. 그래야 다시 자본을 회복하고, 연패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었다.
아이들의 표정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결연한 다짐을 나누었다. 그들에게 이 경기는 모든 자존심을 걸고 되찾아야 할, 그야말로 승리를 위한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장산 국민학교의 리더는 상호였다. 병준이와 같은 고아원 출신인 상호는 인근에서 악명이 높은 싸움꾼으로, 병준이조차 그 앞에서는 한 발짝 물러날 만큼 강력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키는 국민학생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170센티미터를 넘었고, 존재감만으로도 주위를 압도했다.
상호 뒤로 장산 국민학교의 부반장 준환이가 큰 구슬자루를 들고 등장했다. 준환이는 공부도 잘했지만, 피구 대회에서 무시무시한 실력으로 ‘피구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아이였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녀석은 자신을 상순이라고 소개했지만, 크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안경을 쓴 그의 눈빛과 조용한 기운 속에 무언가 깊은 내공을 숨기고 있는 듯한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강호 국민학교 아이들은 이들을 마주 보며 순간 긴장했다. 강적들을 앞에 둔 이번 승부는 평소와는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장산 국민학교의 부반장 준환이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2,500개부터 시작하자. 우리 쪽에선 구슬 10,000개를 가져왔으니, 딱 두 판으로 모든 승부를 가르자고.”
준환이의 제안에 철수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철수 역시 큰 자루를 어깨에 둘러멘 채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속으로는 다급히 계산을 시작했다. 그가 가져온 자루 속에는 모래가 대부분이었고, 구슬은 겨우 2,600개에 불과했다. 한 판으로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두 판 승부라니, 이미 불리함을 깨달은 철수는 안쪽 혀를 깨물었다. 준환이의 여유로운 미소와 자신감이 철수를 더 압박해 왔다.
순간 철수는 고개를 들어 상호와 준환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호는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고,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준환이 역시 태연하게 철수의 반응을 기다리며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철수는 이 상황에서 밀리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 결의를 다지며 다시 준환이를 향해 당당히 말했다.
“좋아. 한 판에 모든 걸 걸어도 우리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철수는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이 한 판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그는 주변에 함께 있는 친구들의 시선을 느끼며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 이 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다들 준비됐지?”
아이들은 철수의 결연한 눈빛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이번 판에 자신들의 자존심과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
반장은 준환이의 제안에 흔들림 없이 “좋아, 2,500개”라고 콜 사인을 보내며 자신감 있게 대응했다. 철수가 내심 불안해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온한 표정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다행히 강호 국민학교 아이들 중 다쳤던 친구들이 모두 부상을 털어내고 돌아와, 최상의 컨디션으로 이번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경기는 영주와 장산 초등학교의 리더 상호의 맞대결로 시작되었다. 강호 국민학교의 까불이 동진이는 장산 아이들을 향해 엉덩이를 흔들며 깐죽거리기 시작했다.
“얘들아, 우리한테 질까 봐 벌써 무서운 거 아냐?”라는 식으로 장난스럽게 말하며 상대를 도발하자, 강호 국민학교 쪽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상호의 눈빛이 반짝이며 돌연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상호의 날카로운 시선은 마치 "웃음은 여기까지"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그 눈빛에 아이들은 순간 얼어붙었고, 장난스러웠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상대편의 기세에 압도당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아이들은 속으로 상호의 위압감에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영주와 상호는 과연 각 팀의 에이스답게 놀라운 집중력과 실력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의 구슬은 날카로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궤도를 따라 나란히 공중에서 춤을 추듯 동시에 진행됐다. 두 개의 구슬이 하늘을 가르는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이 잦아들고 아이들의 시선은 그 궤적에 고정되었다. 짝을 이룬 구슬들은 서로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하나의 길을 동행하며 함께 목표로 나아갔다.
이 순간만큼은 경기장이 두 사람의 무대처럼 보였고, 그들의 집중력은 모두에게 전해졌다.
중간 계투에 나선 길수와 준환도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두 사람 모두 승부에 목숨을 건 듯 진지한 태도로 임했고, 실력은 막상막하였다. 준환은 방향 감각이 남달라 구슬을 날릴 때마다 정확히 목표 지점을 노렸다. 그에 맞서 길수도 이번만큼은 특유의 까불거림을 잠시 내려놓고, 구슬에 집중한 채 한 치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가득했다.
양 팀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구슬은 공중을 가르며 속도와 정확성을 겨루었다. 관중석에선 숨을 죽인 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팽팽한 승부를 지켜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경기의 마무리를 맡은 것은 강호 국민학교의 부반장 철수였고, 장산 국민학교는 준환이가 계속해서 경기를 이어갔다. 준환이는 자로 잰 듯한 완벽한 슈팅으로 상대를 압박하며 실력을 과시했다. 그의 구슬은 놀라운 정확도로 목표를 향해 날아갔고, 경기장의 긴장감을 한층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날 철수는 다시 한번 모두를 놀라게 할 기적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홀에 다다랐을 때, 철수는 특유의 침착함과 계산력을 발휘하며 단 한 번의 정확한 슈팅으로 세 번째 홀에 구슬을 집어넣었다. 주변의 시선이 철수의 구슬이 구멍에 들어가는 순간을 따라 움직였고, 그의 한 방은 그날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첫 번째 경기는 강호 국민학교의 승리로 끝났고, 구슬은 순식간에 5,100개로 늘어났다. 아이들 사이에는 승리의 환호가 퍼졌고, 기세는 점점 더 강해졌다. 하지만 장산 국민학교의 리더 상호는 쉽게 물러설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배판!”을 외쳤다. 이제 한 판에 무려 5,000개의 구슬이 걸린 거대한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의 눈빛은 다시 한번 날카로워졌고, 경기장의 긴장감은 더 고조되었다. 한 판의 결과에 따라 양 팀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강호 국민학교의 아이들은 구슬을 지켜내기 위해, 장산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시구는 강호 국민학교의 지윤과 장산 국민학교의 리더 상호의 맞대결로 시작되었다. 지윤은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하고자, 혼자 운동장에 남아 늦은 밤까지 구슬치기 연습에 매진했다.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지윤의 구슬은 그날 누구보다 정확하고 날카롭게 목표를 향해 날아갔고, 그 모습에 주변 아이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어지는 중간 계투에서는 강호 국민학교의 동진이와 장산 초등학교의 준환이가 맞붙었다. 두 사람은 실수 없이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며, 경기장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동진이는 특유의 재빠른 손놀림과 침착한 집중력으로 승부를 이어갔고, 준환이 또한 정확한 슈팅으로 응수했다. 팽팽한 접전 속에 경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넘쳤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의 마지막 승부였다. 장산 국민학교에서는 뜻밖에도 상순이가 나섰다. 그의 등장에 강호 국민학교 아이들은 긴장했다. 그리고 상순은 모두를 놀라게 할 기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구슬을 날리자, 그의 구슬은 공중을 가르며 날아가더니 3번 홀을 넘어 땅에 닿았다. 그런데 그 순간, 상순의 구슬이 마치 살아 있는 듯 홀 쪽으로 뒷걸음질을 시작하더니 스스로 홀로 빨려 들어갔다.
그 장면을 목격한 아이들은 순간 말을 잃었다. 상순이 구사한 이 기술은 일명 '스핀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빨기 기술'이었다. 구슬에 힘을 실어 뒷걸음질하게 하여, 목표 지점에 정확히 들어가도록 만드는 정교한 기술이었다. 상대편 강호 초등학교 아이들은 그 완벽한 기술 앞에서 숨을 삼키며 상순의 실력에 압도당했다.
긴장한 탓인지 강호 국민학교의 부반장 철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철수는 입술을 꽉 물고 있다가, 마침내 반장에게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반장, 나 못할 것 같아… 너무 긴장돼.”
그 말에 반장은 잠시 고개를 떨구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철수를 대신할 선수가 필요했지만, 규칙상 한 번 투입된 선수는 다시 경기장에 설 수 없었다.
현재 남은 선수는 영주와 길수뿐이었다. 하지만 둘 다 시구에 특화된 장타자로, 마지막 섬세함이 필요한 마무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반장은 가슴속에서 결심과 불안이 교차하며 초조하게 머릿속을 굴렸다. 조금만 더 치밀한 전략과 손놀림이 필요한 이 중요한 순간, 어떤 선택이 최선일지, 숨 막히는 고민이 그를 덮쳐왔다.
그 순간, 경기장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선 준수는 마치 오래도록 준비해 온 무대에 올라서는 사람 같았다. 고아원 아이들 중에서도 조용하고 내성적인 준수가, 그 모든 긴장감과 부담을 안고 스스로 나서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평소 말없이 책을 들여다보던 그였기에, 아이들은 모두 숨죽여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기다렸다.
"반장, 내가 마무리해 볼게."
준수는 짧게 속삭이듯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 낯선 결단에 반장마저 긴장한 듯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의 시선이, 기대와 의구심이 준수에게 모였다. 두 번 다시 망설이지 않고 구슬을 손에 쥔 준수는 차분히 한숨을 내쉬며 집중했다.
준수의 손끝에서 날아간 구슬은 사전에 정해진 궤적을 따르듯 공중을 가르며 놀라운 회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구슬은 두 번째 홀을 출발해, 곧바로 세 번째 홀로 향했다. 땅에 닿는 순간에도 그 궤적은 흔들림 없이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구멍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이들은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구슬이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을 응시했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정지된 그 순간, 구슬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마지막 홀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준수가 오랜 시간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고요한 결심이 세상에 드러나는 듯,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강호 국민학교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아이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준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 방의 구슬이 주는 기적은, 이제껏 감춰져 있던 준수의 깊이와 가능성을 깨닫게 하는 눈부신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순간, 승리의 함성이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아이들은 10,000개가 넘는 구슬 자루를 가득 메고 기쁨에 차 강호 국민학교로 돌아왔다. 그들의 표정에는 환희와 뿌듯함이 묻어났고, 어깨에 걸친 묵직한 구슬 자루는 그들의 노력을 상징하는 전리품처럼 빛났다.
잠시 후 반장과 부반장 철수는 2,000개의 구슬을 따로 챙겨 들고, 아이들에게 남은 구슬 자루를 맡긴 채 라면을 사러 나갔다. 이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학교에 남아있던 아이들은 이제야 승리의 기쁨을 실감하며 여유를 찾고 있었지만, 순간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주변을 경계하며 낌새를 느꼈고, 아이들 사이에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빈틈을 노린 무리가 이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근 중학교의 껄렁한 무리들이 담배를 물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등장만으로도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마치 맹수를 마주한 듯 긴장감이 감돌았다. 담배 연기를 뿜으며, 그들은 무리의 중심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앞장선 리더 격의 중학생은 슬쩍 고개를 치켜들며 위압적인 눈빛으로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이내 그중 한 명이 낮고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구슬 자루 내려놓고 가라.”
목소리엔 어떤 망설임도 없었고, 그들의 무리에서 나오는 우세감이 담겨 있었다.
구슬 자루를 끌어안고 있던 만호와 상문은 두려움을 감추려 애쓰며 단단히 자리를 지켰다. 만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이건 우리가 힘들게 얻은 거야. 함부로 가져갈 생각 하지 마.”
상문도 만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와 결의도 잠시뿐이었다.
중학생들은 순식간에 거리낌 없이 다가오더니, 만호의 어깨를 강하게 밀쳐냈다. 이어지는 공격에 만호와 상문은 미처 방어할 틈도 없이 주먹과 발길질을 맞기 시작했다.
만호는 필사적으로 맞서보려 했지만, 덩치와 힘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느꼈다. 그 순간 뺨과 눈가에 쏟아지는 주먹의 충격이 쉴 새 없이 이어졌고, 그럴수록 그의 의지는 점점 약해졌다. 상문 역시 구슬 자루를 꽉 움켜쥔 채 버티려 했지만, 무리의 힘에 결국 휘청이며 자루를 빼앗기고 말았다.
얼마 후, 소식을 들은 영주와 동진, 길수, 지윤, 용수가 한걸음에 달려와 마주 섰다. 쓰러진 만호와 상문을 본 그들의 얼굴엔 분노와 복수심이 서려 있었다. 중학생 무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거만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고, 영주는 이내 참지 못하고 먼저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각자 최선을 다해 중학생들에게 맞섰다. 하지만 상대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고, 중학생들의 주먹과 발길질은 강호 국민학교 아이들을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각자 쓰러지면서도 눈에는 여전히 반짝이는 투지가 남아있었지만, 이제 그들의 마음속엔 작은 희망만이 남았다. 한 명이라도 더 버텨 보려 애쓰며, 그들은 가슴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반장이나 병준이가 이곳에 있다면… 그들이 오기만 한다면…’
그때였다. 강호 국민학교 운동장이 조용해지는 찰나, 학교 소사 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조용하고 말수가 적어 아이들에게조차 거의 눈에 띄지 않던 대호는, 오늘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얼굴이 멍들고 부어오른 상문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눈빛은 차갑고도 분노로 가득 찼다.
그의 시선이 중학생들에게 향하자 그들조차 잠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중학생들은 무려 열 명에 가까운 무리였고, 대부분은 어깨를 으쓱하며 여전히 거만한 태도를 유지했다. 강호 국민학교의 아이들조차 "대호 아저씨 혼자 저들을 상대하긴 힘들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대호는 폭풍처럼 중학생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갔고, 그의 동작은 빠르고 정확했다. 손과 발이 날아다니며 중학생들은 제대로 반격할 틈도 없이 쓰러져 갔다. 몇 번의 강력한 공격이 이어지자, 뻔뻔하던 중학생들마저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 달아나기 시작했다. 결국, 모두 혼비백산하여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구슬 자루는 다시 아이들의 손에 돌아왔다. 대호는 흙먼지에 싸인 구슬 자루를 아이들에게 건네며 상문과 만호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아이들은 말없이 그에게 감사의 시선을 보냈다. 평소 말없고 조용했던 대호의 숨겨진 힘을 목격한 그날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구슬이 돌아온 것보다도, 그 순간 느낀 진정한 강함과 보호의 의미가 그들에게 깊이 새겨졌다.
사실, 학교 소사 대호는 어린 시절 상문이가 늘 자랑스러워하던 아버지였다. 전방부대의 수색대 부사관으로서 수많은 작전과 임무를 수행했던 그는 뛰어난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으나, 제대 후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고 모든 것을 잃었다. 이후 조용히 학교의 소사로 일하며 상문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그를 조용하고 내성적인 직원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날,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중학생 무리와 싸운 대호를 보고 상문이는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렸다. 상문이는 “아빠!”라고 부르며 대호의 품에 안겼고, 아이들은 그제야 둘 사이의 깊은 관계를 알게 되었다. 그 순간, 평소 학교에서 조용히 무시당하던 대호를 부끄럽게 여겨왔던 상문이가 친구들 앞에서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인정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가슴 한편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학교에서 언제나 남들보다 한 발짝 뒤에 있던 소사 대호가, 누구보다 강하고 깊은 사람임을 알게 된 그날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특별한 순간으로 남았다.
만호와 상문은 어렵게 따낸 구슬들을 한 알 한 알 깨끗이 씻어 조심스럽게 포장했고, 부반장 철수는 매일 꼼꼼히 구슬 재고를 점검하며 현금화 계획을 추진했다. 지윤과 용수는 구슬을 탐내어 빼앗으려는 이가 없는지 학교 주변을 경계하며 구슬의 호위를 맡아 밤낮으로 지켰다. 비록 경기장에서 직접 뛰지는 않았지만, 이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경기장을 지키는 든든한 수비수이자, 구슬 자산을 소중히 다루는 관리자였고, 그 덕분에 강호 초등학교의 구슬은 점점 안전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어린 마음속에서도 하나 된 목표를 위해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협력하는 모습은, 한 몸처럼 움직이는 진정한 팀을 이루고 있었다.
그날은 아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축제와 같은 날이었다. 승리의 기쁨이 여전히 운동장에 남아 있을 때, 부반장 철수는 구슬을 현금으로 바꿔 구입한 라면 60 봉지를 학교 뒤편, 허름한 폐창고로 가져왔다.
“자, 오늘 배 터지게 먹어보자!”
철수가 외치자, 아이들은 환호를 터뜨리며 자리에 둘러앉았다.
큰 냄비가 쿵 소리를 내며 불 위에 올려졌고, 그 안에는 금세 끓기 시작한 물이 부글부글하며 라면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윤과 용수는 동생들까지 불러 모아 식탁을 채웠고, 기다란 폐창고 안은 아이들의 기대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라면을 넣자마자 풍겨오는 짭짤하고 고소한 향기에 아이들은 저마다 코를 벌름거리며 “와, 진짜 냄새 죽인다!”며 들떠 있었다.
끓어오른 라면이 한 젓가락씩 그릇에 담겨 전달될 때마다 아이들은 젓가락을 움켜쥐고, “후후” 불어가며 뜨겁게 한 입을 가득 베어 물었다.
“후아! 진짜 맛있다!”
입속에서 퍼져 나오는 뜨거운 국물 맛에 아이들은 잠시 말을 잃고 황홀해했다. 옆에 있던 용수의 여동생은 “오빠, 나 또 먹을래!” 하며 그릇을 내밀었고, 용수는 웃으며 라면을 더 덜어주었다.
철수는 라면을 쉴 새 없이 나르며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넉넉히 담아주었다.
"라면 먹고도 요구르트 하나씩 준대!"
라는 지윤의 말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지며 여기저기서 "진짜?"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용수는 깔깔 웃으며 동생에게 작은 요구르트 병을 쥐여 주었다. 아이들은 그날 배불리 라면을 먹고 마지막으로 요구르트를 하나씩 돌리며 행복을 만끽했다.
“야, 우리 진짜 부자 된 것 같다,”
철수가 농담처럼 말하자 아이들은 서로를 보며 까르르 웃었고, 라면 냄새로 가득 찬 폐창고는 꿈같이 따뜻하고 포근해졌다.
병준과 노숙자
병준은 “노숙자의 오빠”라는 별명처럼, 언제나 그녀를 보호해 온 든든한 존재였다. 고아원 시절부터 남매처럼 함께 지내며,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노숙자를 여겼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위태로운 상황에 놓일 때면 병준은 망설임 없이 나서곤 했다.
그가 일하는 룸살롱은 술만 파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상처를 달래고, 외로움을 묻어두는 피난처 같았다. 특히 동네 건달들이 찾아와 난동을 피우거나 술에 취해 말썽을 일으킬 때, 병준은 단호하게 그들을 제압하며 노숙자의 안전을 지켜냈다. 어느 날 밤, 가게 한쪽에서 한 패거리가 시비를 걸자 병준이 냉철한 표정으로 다가가 말했다.
“여긴 너희가 난동 부릴 곳이 아니야. 밖에서 다 해결하고 들어와.”
그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에 그들은 머뭇거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노숙자는 그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병준에게 속삭였다.
“오빠, 고마워. 매번 나 때문에 고생이야.”
그녀의 말에 병준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너무 걱정 마. 내가 너 지키려고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병준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남매의 의미 이상의 것임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노숙자의 고단함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려는 모습, 작은 일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모습, 그리고 삶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은 그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 노숙자가 그의 곁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 “오빠, 나한테는 오빠가 전부야. 오빠가 있어서 진짜 다행이야.”
그녀의 말에 병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는 그녀가 그저 지켜야 할 동생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존재로 자리 잡았음을 깨닫고 있었다.
병준은 노숙자의 손을 조용히 잡으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 속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병준은 결심했다. 노숙자를 위해서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의 곁을 지킬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