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는 새로 들어선 고급 아파트에 사는 부잣집 아이들, 언제나 새 옷을 입고 반짝이는 신발을 신고 나타나는 아이들이었다. 해인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윤정의 아버지는 근처 콜라 공장의 전문 경영인이었다. 그들은 반짝이는 유리창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 언제나 정돈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래는 그들과 조금 달랐지만,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그녀의 집은 가장 넓은 평수를 자랑했고, 아버지는 고깃배 열 척을 가진 선주였다. 그러나 아파트 아이들에게 나래의 집은 부잣집이면서도 ‘배운 것 없는 졸부’라는 딱지를 떼지 못했다. 나래는 아파트 입구를 지날 때마다 투명한 유리벽에 가로막힌 듯, 벽 너머로 차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벽은 아무리 애를 써도 깨지지 않았다.
아파트에 사는 엄마들은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학교 밖에서는 비싼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따로 모임을 꾸렸다. 그들은 학교의 기존 학부모 모임을 뒤흔들고 자신들만의 ‘아파트 학부모회’를 조직했다. 그 모임은 점점 커져갔고, 마치 별개의 세상처럼 존재하게 되었다.
아이들 역시 자연스럽게 그 경계를 받아들였다. 교실에서, 복도에서, 운동장에서조차 아이들은 두 무리로 나뉘었다. 아파트 아이들은 서로를 중심으로 모였고, 아파트 밖의 아이들은 그들을 마치 먼 산을 바라보듯 멀리서 지켜보았다.
"우리 집은 왜 이렇게 크고 좋은데, 나는 친구가 없을까?" 나래가 어느 날 해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해인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너희 집이 크기만 해서 그런 거야. 진짜 좋은 집은 크기만 한 게 아니거든."
해인의 말은 나래의 마음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치 돌덩이가 가슴속에 가라앉은 것처럼.나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넓은 평수의 집이 자랑스러우면서도, 그로 인해 더 고립되어 가는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걸렸다. 바다 내음을 풍기며 돌아오는 고깃배는 그녀에게 자부심이었지만, 아파트 아이들에게는 그저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학부모회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환기의 어머니는 여전히 학교 전체 학부모회의 대표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아파트 학부모회가 생긴 이후로 그녀의 영향력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환기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강호초등학교 학부모회에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지만,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그녀를 밀어내고 자신들만의 견고한 세계를 더욱 단단히 쌓아 올리고 있었다.
"모두가 내게 등을 돌리고 있어..."
환기의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학교에서 뭔가 해보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그들은 내 노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아."
세상은 그렇게 두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아파트 속 세상과 그 밖의 세상. 그 경계는 투명하지만 단단했다. 유리로 만든 성벽처럼, 서로를 바라볼 수는 있지만, 쉽게 넘을 수는 없는 벽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벽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높아지고, 두꺼워졌다. 아이들은 그 벽을 통해 세상을 배웠고, 부모들은 그 벽을 더 쌓아 올리며 자신들만의 세상을 지켜냈다.
"이 벽은 언제쯤 깨질 수 있을까?" 나래는 문득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그러나 대답은 언제나 차가운 바람 소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강호 초등학교 뒤편에 자리 잡은 아파트 단지는 단순한 주거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성채처럼 세련된 외벽과 거대한 정원을 자랑하며, 세상과 단절된 고급스러운 세계를 상징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는 부모들은 대부분 전문직이나 고위 공무원, 사업가였고, 언제나 고급스러운 옷차림으로 자신들의 부와 지위를 은연중에 과시하며, 주변과 분명한 경계를 두고 살았다.
그들의 아이들 역시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아파트와 학교는 불과 몇 분 거리였지만, 나래 같은 아이들은 늘 자가용을 타고 학교에 오갔다. 나래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기사는 매일 아침 고급 차량을 몰고 학교 정문을 지나, 심지어 운동장 안까지 차를 몰고 들어가 나래를 내려주었다.
그 광경은 언제나 시선을 끌었다. 다른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을 때, 나래는 무대 위 주인공처럼 차에서 내렸다. 기사는 매번 조심스럽게 차 문을 열어주었고, 나래는 마치 공주님처럼 우아하게 차에서 내려 학교로 들어섰다. 그 모습은 그녀가 아이들 사이에서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며 속삭였다. "저거 봐, 나래 또 차 타고 왔어. 진짜 공주님처럼 행동해." "그래, 굳이 기사가 필요해?" 그들의 속삭임은 부러움과 경멸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나래는 그들의 속삭임을 알면서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일인 듯, 언제나 똑같이 차에서 내렸고, 기사는 묵묵히 그녀의 책가방을 들고 뒤를 따랐다.
하지만 나래의 속마음은 그리 평온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에서 내릴 때마다 자신을 둘러싸는 이질감을 느꼈고, 그 시선이 그녀를 공주로 떠받들기보다는 점점 더 그들 사이에 벽을 쌓아 올리는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닐 때, 나래는 그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학교는 가까이 있었지만, 그녀에겐 손에 닿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어느 날, 나래는 차에서 내리기 전, 기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는 묵묵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며 말없이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듯 보였다.
"고맙습니다, " 나래는 그날따라 평소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기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늘 안전하게 학교에 데려다주는 게 제 일이니까요."
그 말에 나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보호해 주는 세상과 그 밖의 세상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이 존재했다. 그 벽은 그녀를 보호함과 동시에 가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장을 지나며, 나래는 차에서 내리는 자신을 지켜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다시금 느꼈다. 그러나 그 시선 속에는 이제 단순한 질투나 경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벽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과의 단절감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그날 저녁, 나래는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아빠... 나도 그냥 걸어서 학교에 가면 안 될까?"
그녀의 부모님은 잠시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왜? 네가 불편하니?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게 더 안전하잖아, " 아버지가 물었다.
나래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냥, 친구들처럼... 나도 걸어보고 싶어."
그 말은 식탁 위에 잠시 정적을 불러왔다. 부모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 나래에겐 억압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서울에서 전학 온 현주는 단번에 마을에서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예쁜 외모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였다. 교실은 현주가 온 이후로 한결 밝아졌고,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좋아했다. 현주는 마치 반짝이는 햇살처럼, 주변을 따뜻하게 비추었다.
현주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꽤나 큰 안경테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공장의 일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는 직원들을 잘 챙기는 사장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공장에서 식사를 제공하고, 명절이 되면 작은 선물을 준비해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그의 배려는 직원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현주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현주를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태권도 유망주인 영주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현주를 불편하게 여겼다. 영주의 아버지도 현주네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주는 현주와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없었다. 현주가 자신보다 더 나은 이유가 단지 그녀의 배경 때문이라고 느꼈고, 그 감정이 영주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현주는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아버지도 공장 사장이고... 다 가졌네, " 영주는 속으로 자주 투덜거렸다.
현주가 너무 완벽해 보이는 것이 영주에게는 불편했다. 다른 아이들이 현주를 좋아할수록, 영주는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현주가 아무리 다정하게 다가와도, 영주는 퉁명스럽게 반응하며 감정을 숨겼다.
"영주야, 이거 같이 할래?" 어느 날 현주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영주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고개만 돌렸다.
현주는 영주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그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영주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영주의 차가운 태도는 현주에게 낯설고 아프게 다가왔다.
그날 저녁, 영주는 태권도 도장에서 돌아와 무심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현주 아빠는 왜 다들 그렇게 좋아해?"
아버지는 피곤한 몸을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그분은 사람들을 잘 챙기거든. 우리 같은 힘든 일 하는 사람들에게도 신경을 많이 써 주셔서 다들 좋아하지."
영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주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누구보다 친절했고, 영주에게도 여러 번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영주는 그 손을 잡기가 두려웠다. 현주의 배경과 자신을 비교할 때마다, 그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주는 현주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마음속에서 그를 괴롭혔다. 현주의 빛나는 모습은 영주에게 더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도 영주는 여전히 현주에게 퉁명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현주는 그런 영주에게 여전히 다정하게 대해주었지만, 그녀의 미소 뒤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현주는 영주가 왜 자신을 밀어내는지 알 수 없었고, 그럴 때마다 혼자서 고개를 숙이며 마음속 깊은 상처를 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감정의 벽을 마주하며, 언젠가 그 마음을 풀어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현주와 반장 7.
해운대 바다에서 다짐을 나눈 후, 현주와 반장은 걸음을 옮겼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마음에 결심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두 사람은 과거의 혼란과 아픔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함께 그려나가고 있었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 반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릴 적 순수함을 다시 찾는 거야. 작은 행복도 놓치지 않고."
현주는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진짜 원하는 꿈을 향해 천천히 나가면 돼. 마음의 여유를 찾으면서."
그들은 바닷가에 도착해 나란히 앉았다. 차가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었고, 차가움 속에서 서로의 존재가 더 가까이 느껴졌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어릴 적 꿈과 어른이 된 후,가고 싶은 길로 이어졌다.
"음악이나 예술을 하고 싶다고 했지?" 반장이 물었다.
"응, 그게 마음속에 가장 진솔하게 자리 잡은 것 같아.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을 표현해 보고 싶어."
"꼭 해봐. 곁에서 항상 응원할게."
별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은 소소한 소망들을 나누었다.
"나는 해운대에 작은 카페를 열고 싶어. 내가 사랑하는 음악과 그림들로 가득 채워서, 사람들을 초대하는 거야." 현주가 말했다.
"나는 정의로운 검사가 되고 싶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게 꿈이거든." 반장이 덧붙였다.
그 순간, 그들의 꿈은 서로의 마음속에서 연결되었다. 둘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서로 응원하며 함께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바닷바람이 두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그날 밤, 해운대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그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보며, 다시 시작하는 길 위에 서 있었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힘을 믿고, 어떤 어려움도 함께 극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