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운동회 날, 아파트 학부모회는 마치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전문업체를 불러 거대한 텐트를 운동장 한쪽에 우뚝 세웠고, 그 웅장함은 다른 학부모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텐트 안은 그야말로 과시의 장이었다. 아파트 부모들은 교장과 교감, 그리고 '미친개'로 불리던 김현수 선생님을 초대하여 마치 자신들이 이날의 주최자인 양 당당히 자리를 차지했다.
그 안에 쌓여 있던 바나나와 파인애플 같은 당시 보기 드물었던 열대 과일, 비싼 양주와 소고기까지 준비된 음식들은 학부모들의 부와 지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아파트 부모들은 테이블 가득히 채워진 음식들을 자랑스럽게 내놓았고, 그들의 아이들은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시원한 얼음물을 즐겼다. 제과점에서 주문한 밤빵과 상투과자가 아이들의 손에 들려 입속으로 들어갔고, 텐트 안에서 그들만의 시간을 즐기는 모습은 다른 학생들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반대편에선 환기네가 '강호 국민학교 학부모회'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작은 텐트를 세웠다. 규모도 작고, 그곳에 놓인 음식들도 소박했다. 환기의 어머니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내놓으며 운동회를 준비한 자신의 노고를 드러냈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으로 서글펐다. 교장과 교감은 물론 주요 교사들조차 모두 아파트 학부모회 쪽으로 향해 있었고, 환기네 텐트는 텅 빈 채로 남겨져 있었다.
"어머니, 왜 아무도 안 와요?" 환기가 어색하게 물었다.
환기의 어머니는 잠시 텐트 위에 걸린 플래카드를 올려다보았다. 피곤함이 묻어나는 얼굴에는 좌절의 기색이 짙었다. 그녀가 이끌던 '강동초등학교 학부모회'는 이제 학교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 분명했다. 아파트 학부모들이 만든 또 다른 세력은 그녀를 밀어냈고, 교장과 교감마저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학교의 중심을 차지한 것이었다.
"괜찮다, 환기야. 우리끼리 하면 돼."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그 말은 공허하게 들렸다.
아파트 학부모회 텐트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과자를 먹으며 쉬고, 부모들은 아이들의 장기자랑을 보며 박수를 쳤다. 그들의 환호성은 운동장 전체에 퍼져나갔고, 그들은 아파트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사회적 지위까지 학교 안에 들여온 듯했다. 환기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묵묵히 운동장을 응시했다. 운동장은 더 이상 아이들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권력과 지위가 운동장에도 깊이 드리워져 있었다.
운동회가 한창일 때, 학교 소사였던 대호는 아파트 학부모회 텐트로 얼음을 연신 나르고 있었다.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들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그의 모습은 비굴해 보였다. 그는 매번 얼음을 내려놓을 때마다 과일 껍데기, 소갈비 뼈, 음료 캔 등을 치우며 아무 말 없이 일했다. 아파트 학부모들이 즐기던 호화로운 음식들 뒤에 남은 쓰레기들을 대호는 묵묵히 치웠다.
"소사, 얼음 좀 더 부탁해!"
한 학부모가 불렀고, 대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아이스박스를 들었다. 그는 그날 텐트의 하인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짧은 웃음 뒤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의 노고에 감사하지 않았다. 오직 상문만이 대호를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박미소 선생님과 진행우 선생님은 아파트 학부모회 텐트에 가지 않고 운동장을 지켰다. 박미소 선생님은 텐트에서 교장이 편안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불편함을 느꼈다.
"저긴 절대 가고 싶지 않네요, " 박미소 선생님이 조용히 진행우 선생님에게 속삭였다.
진행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긴 운동회의 본질이 아니죠. 아이들이 땀 흘리며 뛰노는 곳, 그곳이 진짜 운동회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대호에게 잠시 머물렀다. 대호가 다시 한번 얼음을 들고 텐트로 향할 때, 박미소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호 선생님도 참 고생이 많으세요."
진행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저렇게 고생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학교가 돌아가는 거죠. 하지만 그런 일들에 감사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현주는 아파트에 살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다. 운동회 날, 그녀의 어머니는 운동장 한 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정성스레 준비한 도시락을 펼쳤다. 김밥, 삶은 계란, 잡채, 사이다까지, 이런 메뉴는 마을에서 좀 산다는 집에서나 가능했다. 돗자리에 차려진 음식은 그 자체로 눈길을 끌었고, 아이들 사이에서도 작은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 반대편, 운동장 곳곳의 작은 그늘 속에는 소박한 도시락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주의 도시락은 간단했다. 그의 아버지는 현주네 안경테 공장에서 일했고, 김밥 몇 줄과 과일이 전부였다.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고 있는 동진도 마찬가지였다. 길수는 부모님이 반찬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그날 도시락은 그저 남은 재료로 만든 조촐한 김밥이었다. 철수의 엄마는 콜라 공장에서 일했고, 겨우 마련한 도시락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들 옆에 앉아 있던 반장 역시 늘 당당했지만, 그의 도시락 또한 소박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모여 도시락을 나누며 소소한 웃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아무리 즐겁게 대화를 나눠도, 그들 사이에 놓인 도시락의 차이는 아이들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건드렸다. 현주의 도시락은 다른 아이들 것보다 훨씬 풍성했고, 그 격차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보다 더 마음 아픈 아이들도 있었다. 만호는 폐품을 모아 생계를 이어가는 집안의 아이였고, 그는 아예 도시락을 준비할 수 없었다. 상문 역시 도시락 없이 빈손으로 운동장에 나왔다. 전학생 지윤과 용수도 형편이 어려워 점심을 준비하지 못했다. 언덕 위 고아원에서 온 병준, 성당 옆 고아원에서 지내는 노숙자, 그리고 바닷가 근처 고아원에서 온 준수 역시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날 운동장은 아이들에게 운동장을 넘어서는 의미를 안겼다. 각자의 도시락은 그들의 가정 형편을 노출시켰고, 음식 속에 숨겨진 차이는 명백했다. 현주의 도시락은 풍성했고, 아이들의 소박한 김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 격차는 아무리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았고, 아이들은 그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처지를 실감해야 했다.
현주는 자신의 돗자리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도시락이 다른 아이들의 것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깨달았지만, 그 격차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 불편함은 아이들의 웃음 속에 묻혀버렸다. 운동장의 웃음과 함께 그날의 격차도 조용히 묻혔다.
그늘 속에서 소박한 도시락을 나누던 아이들, 그리고 도시락조차 준비하지 못한 아이들. 그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운동장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잠시나마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행우 선생님은 운동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커다란 솥을 운동장 한쪽에 걸어두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솥 아래에서 석유곤로의 불이 가물거리며, 그 앞에 모여드는 아이들의 눈빛이 하나둘씩 반짝였다. 솥 안에서는 끓어오르는 물이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라면을 삶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계란도 넉넉히 준비했지. 모두들 계란 라면으로 배를 채워보자!"
진행우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에게 외쳤다. 그의 말에 아이들은 기대감을 안고 솥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이 소박한 음식이 주는 작은 기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난해 운동회에서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해 쓸쓸히 물만 마시던 아이들의 모습을 잊지 않았던 그는, 이번만큼은 그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는 한 끼를 준비하고 싶었다.
박미소 선생님은 운동장을 이리저리 돌며 혼자 앉아 있는 아이들을 하나둘씩 진행우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데려왔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도시락을 챙겨 오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만호, 병준, 상문, 준수… 이 아이들은 귀퉁이에 앉아 운동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배고픔을 참던 아이들이었다.
"여기 와서 함께 라면 먹자." 박미소 선생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들을 불렀다.
처음엔 어색하게 주저하던 아이들도, 라면이 끓어오르는 냄새에 이끌려 하나둘씩 줄을 서기 시작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면 냄비 앞에서 그들은 오랜만에 얼굴에 미소를 뗬다. 그들에게 라면 한 그릇은 단순한 한 끼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따뜻함과, 누군가 자신을 챙겨주고 있다는 작은 위안이었다.
라면을 받은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소박한 기쁨을 나누었다. 작년 운동회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 해의 운동회는 그들에게 특별히 행복한 순간으로 다가왔다. 비록 라면 한 그릇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잠시나마 자신의 가난을 잊고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라면을 먹는 그 순간에도, 아이들은 무언가를 배워가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풍성한 도시락을 나누어 먹을 때, 자신들은 운동장 한쪽에 모여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진행우 선생님과 박미소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 덕분에 함께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은 그들에게 가난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난 속에서도 작은 온기를 느낄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라면을 먹으며 그들만의 작은 행복을 찾았다. 그 속에서 비록 가난을 배우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따뜻함과 희망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현주와 반장 8
그다음 날, 현주와 반장은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나란히 앉았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해운대의 풍경은 어제의 잔잔한 바다처럼 그들의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바람은 여전히 바다 내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기차가 출발하자, 반장은 잠시 말을 멈춘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운대의 마지막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져 갈 때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제... 참 좋았지?" 그의 목소리엔 아직 남아있는 바닷바람처럼 부드러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응,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어."
반장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물었다. "꿈같았다고? 그럼 깨어나면 끝나는 거겠네?"
현주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건 깨어나도 남는 꿈이야. 어제의 시간은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거니까."
그들의 대화는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 부드럽게 이어졌다. 파도는 매번 다르게 밀려와도, 결국 모래사장에 닿듯이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에 조용히 닿았다. 해운대에서 보낸 짧은 시간이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바다에 속삭이듯,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그 순간은 그들에게 영원처럼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