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국민학교가 자리한 곳은 오래전부터 도망자의 마을로 불렸다. 그곳은 굽이진 산등성이 아래 숨겨진 작은 골짜기처럼, 발을 들여놓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장소였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세상의 눈길을 피해 숨어들었고, 그들의 발자국 소리는 조용하고 무거웠다. 마을은 실패와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난처였다.
거리에선 언제나 희미한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 속에는 묵직한 한숨이 섞여 있었다.
'쉭쉭',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바람이 오래된 나무 문을 두드렸고, 낡은 집들은 바람과 함께 삐걱거렸다. 여기저기서 베트남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사람들이 기침 소리를 내며 길을 걸었고, 사업이 부도나 숨어든 이들의 굽은 어깨는 무거운 짐처럼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무너져 내리는 벽돌처럼, 마을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인생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 같았다. 그들은 세상을 등진 채, 더 이상 갈 곳 없는 배처럼 이곳에 정착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파도가 치고 있었다. 끝없이 자신을 삼키는 파도.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제는 저항할 힘도 없었다.
마을의 한쪽 구석에는 세 곳이나 고아원이 있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비바람에 흔들리는 어린 나무처럼, 언제 쓰러질지 모를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은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지 못한 채, 고독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고아원 앞에서 쏟아지는 비는 거칠었고, 아이들은 비를 피해 좁은 처마 밑으로 달려들었다.
'쏴아아—'
빗소리는 그들의 슬픔을 삼키듯 끊임없이 내렸다.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무거운 구름과 같았다. 구름 속에서는 번개가 치지 않았고, 그저 고요한 비만이 내리고 있었다. 비는 마을을 적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적셨다. 세상이 이곳에 남은 눈물마저 쏟아붓는 것처럼, 마을은 비가 오늘날이면 축축하고 서늘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희미한 빛이 있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희망, 돌 틈에서 자라나는 풀잎처럼 약하지만 강한 생명력. 풀잎은 가끔씩 바람에 스치며, 마을 사람들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그들이 잊고 지낸 미소가 잠시라도 떠오르곤 했다.
마을은 도망자의 피난처이자, 부서진 영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각자의 삶은 끊임없이 흘러갔다. 마을 곳곳에서 들려오는 삐걱거리는 소리, 울리는 바람,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을 걸어갔다. 척박한 땅에서도 어딘가에서 꽃이 피어나듯, 그들 또한 언젠가 다시 피어날 날을 꿈꾸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서로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술 취한 사람들의 고함 소리는 마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억눌린 감정들이 알코올의 힘을 빌어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빈 병이 바닥에 굴러가고, 담배 연기가 길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폭풍 전야의 바람처럼 거칠고, 누군가의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각자의 삶에서 실패하고, 상처받은 이들은 이 마을에서 어딘가에 묻어둔 감정을 술로 끌어내었다. 그들의 외침은 바람에 실려 마을 곳곳을 울리며, 후려치는 바람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아픔을 드러냈다.
“나도 억울해!”
소리치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결코 풀리지 않는 상처와 울분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격렬한 감정들이 충돌할 때면 언제나 불상사가 일어났다.
"꽝!"
누군가 테이블을 엎으며 시비가 붙으면, 바로 뒤이어 경찰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용삐용!"
사이렌 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울려 퍼지면, 그 순간 마을은 멈춘 듯 고요해졌다. 하지만 고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금방 다시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고, 각자의 길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곤 했다.
이 마을에서의 갈등과 고함은 일상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화를 내고, 술에 기대어 자신의 무너진 삶을 잠시 잊으려 했지만, 결국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왔다.
영주는 반장에 이어 학교 싸움 서열 3위로, 명성만큼이나 강인한 태권도 실력을 자랑했다.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딸 정도로 유망한 선수였지만, 그의 일상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현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안경테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했고, 영주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집을 떠나 홀로 남겨졌다. 그는 종종 야간 근무를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혼자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둠이 길게 드리워질 때마다 마음에는 허전함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영주의 동네는 조직폭력배들의 세력이 강하게 자리 잡은 곳이었다. 도시를 양분한 두 거대한 조직이 있었고, 모두 강호초등학교 출신들이 중심에 있었다. 그들은 어린 학생들을 교묘히 이용해 자신의 더러운 일을 처리했다.
조직의 어른들은 촉법소년이라는 법적 허점을 이용해 국민학생들에게 마약을 운반시키거나 위험한 일을 시켰다. 이 세계는 복잡하고 어두웠다. 하지만 아직 어린 영주가 그런 진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어느 날, 동네 형들이 영주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영주가 그저 싸움만 잘하는 소년이 아니라, 뭔가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들이 제안한 것은 단순한 배달이었다.
“이거 좀 배달해 봐. 너라면 문제없을 거야.”
영주는 그들이 주는 돈이 꽤 컸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배달을 시작했다. 무엇을 운반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때 영주는 돈이 필요했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던 그는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들을 스스로 해결하곤 했다. 그것은 주로 군것질 거리나 학교에서 필요한 준비물들이었지만, 술과 담배 같은 어른들의 장난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배달물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그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영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동진이는 유난히 손재주가 뛰어난 아이였다. 그는 무엇이든 손에 잡으면 쉽게 조립하고 수리할 수 있었고, 그런 재능 덕분에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불안정했다. 아버지는 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집은 텅 빈 것처럼 고요했다. 그의 엄마는 현실을 외면하듯 화투장을 쥐고 살았고, 춤에 빠져 밤마다 밖으로 나갔다. 집안의 공허함을 메울 길이 없었던 동진은 점점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런 동진에게 영주는 유일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두 아이는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했고, 일찍이 세상 어른들의 나쁜 습관을 닮아갔다.
"짝짝, "
담배를 피우며 불을 붙이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웃음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철컥, 철컥, "
맥주병이 열리는 소리가 그들의 어린 시절을 정의했다.
난개발이 진행되던 마을은 아이들에게 완벽한 은신처를 제공했다. 반쯤 지어진 건물들, 버려진 공터,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들은 그들의 비밀 아지트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어른들의 세상에 발을 들인 것처럼 느꼈고, 술과 담배로 일상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것은, 작은 일탈이 점점 더 큰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난은 씨름을 하던 전학생 지윤에게도 가차 없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매일 학교에서 주는 급식 우유를 받았지만, 우유를 입에 대지 않았다. 손에 들려진 우유팩은 항상 그대로 집으로 가져가곤 했다. 그의 속내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 우유를 여동생에게 주기 위해 집으로 가져가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
여동생은 지윤보다 나이가 훨씬 어렸고, 그들의 집안 형편은 늘 빠듯했다. 지윤은 그런 형편 속에서도 자신보다 여동생을 먼저 생각했다.
‘내가 참으면, 여동생은 조금 더 나을 거야.’
지윤의 마음속에는 오빠로서의 책임감과, 어린 동생을 향한 깊은 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학교에서 우유를 받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우면, 지윤은 살짝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지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우유가 너무 먹고 싶었던 어린 소년의 본능이 올라왔다.
용수는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아버지를 늘 염려했다. 할머니가 남은 생선을 말려 시장에 내다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먹거리 걱정은 없었지만, 용수의 마음속에는 늘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다는 아버지에게 생계를 위한 터전이었지만, 동시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어부들에게 바다는 매일 맞서는 싸움터 같았다.
"쾅쾅, "
파도가 배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용수는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물살이 거칠어질수록 그 소리는 마치 바다가 무언가를 경고하는 듯하게 들렸다.
어부들에게 죽음은 바다와 함께 공존하는, 늘 가까이에 있는 현실이었다. 아버지가 바다로 나갈 때마다 용수는 마음속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와 함께 불안한 예감이 밀려왔다.
그날도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나섰지만, 용수는 바다 너머 어둠을 바라보며 마음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현주와 반장 9
반장이 다니던 대학교 캠퍼스에 도착하자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학생들은 분주히 오가며 각자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햇살은 초록 잔디 위로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다에서 느꼈던 자유로움과 바람의 냄새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현실은 다시 그를 자신의 길로 이끌고 있었다.
강의실 안에서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 속에는 지식과 권위가 뒤섞여 있었지만, 반장은 그 속에서 자신의 꿈을 지켜 나가겠다는 결심이 더 강하게 다져졌다. 교수님의 강의는 멀리 있는 등대처럼 그의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가 가야 할 길과 이루고 싶은 목표가 어느 때보다도 뚜렷해졌다.
"법은 사람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야 한다, "
교수님이 강조하며 말했다.
그 한 마디는 반장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그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나는 정의로운 검사가 될 거야. 사람들의 방패가 되어 그들을 지킬 거야.’
강의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해운대에서 느꼈던 바람과는 달랐지만, 그 속에는 같은 자유의 향기가 담겨 있었다. 반장은 자신이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 그리고 해운대에서 현주와 나눈 약속이 그의 마음을 더 단단하게 묶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