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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랑 Oct 02. 2024

위기의 용수

현주와 반장 10




위기의 용수     


용수는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이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고개가 빠지도록 기다렸다. 그날도 집 앞에 앉아 바람에 날리는 생선 냄새를 맡는 순간,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수야, 네 아버지 곧 오신다!"


용수는 할머니의 말에 활짝 웃었다. 할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생선을 햇볕 아래로 펼치며 말했다.


"오늘도 많이 잡아오진 못했을 거야. 요즘 바다가 좀 고약하다잖니. 그래도 우린 먹을 건 충분하니까 걱정 말거라."


용수는 할머니가 말린 생선들이 줄줄이 널려 있는 마당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생선 냄새 좋다. 바삭바삭하게 잘 마른 것 같아요."


할머니는 살짝 웃으며 용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지? 이 냄새가 우리 집을 채워 주는 거란다."


그때 멀리서 아버지의 배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에 실려 오는 파도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아버지가 배에서 내리며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

용수가 달려 나가며 외쳤다.


아버지는 거칠어진 손으로 용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늘도 바람이 세게 불더구나. 하지만 우리가 바다에서 얻는 건, 많고 적음에 상관없다, 용수야. 바다는 늘 우리를 살게 해 주니까 말이야."


용수는 아버지의 소금기 어린 손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아버지, 바다는 힘들어요?"


아버지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더니 미소 지으며 말했다.

"힘들지, 하지만 그만큼 소중한 것도 없단다.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파도가 발목을 감아도, 바다는 늘 우리에게 새로운 날을 주지."


용수는 아버지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할머니가 만든 말린 생선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지는 것을 느끼며 속삭였다.

"그럼 오늘 밤도 파도 소리 들으면서 잘 수 있겠네요."


아버지는 부드럽게 웃으며 용수의 어깨를 감쌌다.

"그래, 오늘도 파도 소리랑 함께 꿈을 꾸자꾸나."


  



용수는 전학생이었다. 강호 초등학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들은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 소문만은 빠르게 퍼졌다.


"전학 오기 전 학교에서 짱이었대."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말했을 때, 아이들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싸움은 그에게 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특별히 격투기를 배운 적은 없지만, 그의 몸은 싸움을 익히는 데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날, 운동장에서 용수와 지윤이 마주쳤다. 둘 다 전학생이었고,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너, 전학 오기 전에 짱이었다며?"

지윤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의 말투에는 가벼운 도전 의식이 담겨 있었다.


용수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냥 소문일 뿐이야."


"소문일 뿐이야?"


지윤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확인해 보자고."


용수는 잠시 지윤을 바라보았다. 그 대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둘 다 강호초등학교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뭔가를 쥐고 싶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말없이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갔다.


주위의 아이들이 외쳤다.

"지윤이랑 붙는다!"
"누가 이길까?"


기대와 긴장이 섞인 목소리들이 뒤섞여 공기를 흔들었다. 둘은 서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가벼운 발걸음과 날카로운 눈빛이 오갔다.


"먼저 와."

용수가 말하자, 지윤은 웃으며 자세를 낮췄다.


"그럴 줄 알았다."


그들의 몸이 서로를 향해 튀어 오르듯 맞부딪혔다. 거센 바람이 부딪히는 듯 힘찬 충돌이었다. 이는 단순한 순위 쟁탈전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이곳에서 어디에 속하는지, 누구와 맞설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둘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용수와 지윤은 누구 하나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땀과 흙이 엉켜 붙은 몸들이 격렬하게 맞붙었다. 씨름을 했던 큰 덩치의 지윤이 먼저 용수를 넘어뜨리며 우위를 점하는 듯 보였다.


“내가 이겼다!”

지윤이 잠깐 자신감을 보이며 외쳤다.


하지만 그 순간, 용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힘을 모아 일어선 그는 빠르게 발을 들어 지윤의 얼굴을 향해 정확하게 차올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지윤이 바닥에 쓰러졌다. 주변 아이들이 숨을 멈추며 그 장면을 지켜봤다.


“용수가 이겼다!”

누군가 소리쳤고, 아이들의 시선이 용수에게로 쏠렸다. 그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그때였다.

부반장 철수가 운동장 끝에서 급히 달려오며 외쳤다.


“용수야! 용수야!”


숨을 고르며 철수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용수야... 네 아버지가... 기찻길에서 사고를 당하셨어.”


그 말을 듣자마자 용수의 눈이 커졌다. 땅에 널브러진 지윤을 바라보던 시선이 순식간에 철수에게로 향했다.


“뭐... 뭐라고?”

목소리가 떨렸다.


철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조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찻길을 건너시다가... 그만...”


기찻길. 용수의 가슴이 얼어붙었다. 항상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그 길. 아버지는 밤새 바다에서 고된 조업을 마치고, 무거운 생선 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힘겹게 걸어가다 발이 풀려 넘어졌고, 생선 박스가 기찻길 위에 쏟아졌다.


“아버지...”


용수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아버지 곁에 달려가 있었다. 아버지는 쏟아진 생선을 주우려다가, 그 순간 기차가... 철수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생선을 주우시다가... 기차가...”


운동장은 순간 고요해졌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릴 뿐,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용수는 멍하니 서 있다가, 곧 무언가에 이끌리듯 빠르게 운동장을 벗어나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의 외침은 허공으로 퍼져 나갔지만, 마음속에서는 누구도 잡을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에서 며칠을 버티던 용수의 아버지는 결국 눈을 감았다. 바다와 함께한 그의 긴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얀 천으로 덮인 아버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용수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사는 무겁게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이제 편안히 가셨습니다.”


용수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아버지는 그저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아니었다. 바다의 이야기와 생선 냄새, 그리고 거친 손의 따스함을 전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먼바다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며칠 후, 할머니도 아들의 죽음 앞에서 무너져버렸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할머니는 결국 쓰러졌고, 용수는 병실에서 의사의 또 다른 말을 들어야 했다.


“할머니께서도 많이 위태롭습니다. 마음의 충격이 너무 커서…”


할머니의 약해진 손을 잡은 용수는 한없이 무력함을 느꼈다. 이제 모든 것이 그의 어깨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용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 혼자야.”


그의 입술에서 나지막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 말은 아버지가 떠난 자리를 실감하게 만드는 비수처럼 그의 마음을 찔렀다.


이제 용수는 가장이 되어야 했다. 그의 어린 손에 인생의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철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용수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용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없이 먼바다를 바라봤다. 그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몰라. 하지만… 뭔가 해야겠지.”


그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했다. 바람에 실린 파도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제, 파도는 그에게 더 이상 어릴 적 추억 속 바닷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삶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길고 험한 여정이었다.




그 이후로 용수는 말수가 적어졌다. 아니, 거의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는 고요한 그림자처럼 존재할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이 반찬가게를 하는 길수가 조용히 용수에게 다가왔다. 길수는 늘 밝은 아이였, 하지만 요즘의 용수가 너무 달라진 것을 알고 걱정스러웠다.


“용수야,”

길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보이냐? 무슨 일 있니?”


용수는 잠시 망설였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놓고 싶지 않았지만, 길수의 진지한 눈빛이 그를 조금 누그러지게 했다.


“힘이... 없어서 그래,”

용수는 조용히 답했다.


“사실... 이틀 동안 별로 먹지 못했어.”

길수는 놀란 눈으로 용수를 바라보았다. 용수는 고개를 숙였다. 땅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난... 괜찮아. 굶는 거, 참을 수 있어. 그런데...”

용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목이 메어왔다.


“내 어린 여동생이... 굶는 걸 보는 건 정말 못 견디겠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용수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한순간에 터졌다. 울음을 억누르려 했지만, 이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길수는 놀라서 잠시 말을 잃었지만, 곧 용수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독였다.


“용수야...”


길수는 부드럽게 말했다.

“너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질 필요 없어. 우리 도울 수 있어. 나도,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우리 모두 네 편이야.”


용수는 계속해서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견디며 쌓여온 고통과 책임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길수의 말에 그는 처음으로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용수를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다.




용수의 이야기는 어느새 반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반장은 교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속삭임들을 통해 그 소식을 알게 되었다.


“용수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여동생이랑 같이 굶고 있다더라.”


그 말은 반장의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듯했다.


반장은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항상 책임감이 강한 아이였고, 친구들이나 반 전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용수의 상황은 단순한 싸움이나 다툼과는 달랐다. 그것은 삶의 무게, 그 이상이었다.


반장은 마음속에서 여러 생각이 뒤엉켰다.

'내가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지?'


그의 머릿속을 떠도는 질문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평소 강하고 능력 있는 모습을 유지하던 반장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자신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반장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저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만이 멀리서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고민하던 반장은 결심했다.

'무언가 해야 해. 그냥 지켜볼 순 없어.'


그의 두 손이 천천히 주먹으로 쥐어졌다. 뚜렷한 해결책은 없었지만, 친구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은 점점 더 강해졌다.




현주와 반장 10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현주는 화실의 조용한 구석에 앉아 하얀 종이 앞에 연필을 들었다. 한동안 멈췄던 그림을 다시 그리는 순간, 연필 끝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잊고 지냈던 순수한 기쁨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아무 걱정 없이 그림을 그리며 느꼈던 자유로움이 다시 손끝으로 전해지며, 현주는 미소를 지었다. 그림을 그릴 때면 세상과 단절된 듯한 평온함 속에서 오로지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연필로 스케치를 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를 다시 발견해 나갔다.


‘나는 미대에 가야 해. 이것이 나의 길이야.’

그녀는 그 순간 결심했다.


그림을 통해 표현하는 모든 것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다를 그리며 느꼈던 그 감정처럼, 미술은 그녀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도구였다.


현주는 종이에 그려진 스케치를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제는 멈추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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