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 한 번, 침묵 한 번,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엄청난 소음 하나, 손 하나, 네 모델의 전체 모습, 쉬고 있거나 움직이는, 측면이나 정면으로 잡은 그의 얼굴, 극단적인 롱 숏, 줄어든 공간..." 그리고 이런 것도 있다. "눈이 가진 사정력"
예술은 정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눈 속에, 귀 속에 있고, 피부 하나하나 위에 있다.
우리의 어둠-스크린에 불이 켜지기 전에 반드시 와야만 하는 창조의 어둠-속에서 이 말들은 별들처럼 빛나며, 우리에게 완벽을 향해 가는 단순하면서도 까다로운 길을 보여준다.
-르 클레지오
최근 읽고 있는 책,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노트>의 서문이다. 순전히 표지만 보고 산 책인데 서문부터 가슴이 떨린다. 아무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쓴 서문이니 좋지 않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이 책은 브레송 감독의 456개의 잠언과도 같은 노트를 엮은 것인데 그의 영화에 대한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연극을 복제한 형태와 같은 시네마와 연극 무대에서처럼 연기하는 배우를 경계하라는 그의 충고는 참 고집스럽고 일관적이다. 사물의 본연에 것을 이끌어내는 데 집중하고 그것이 감독의 역할이라는 것. 연기자를 연기하지 않게 하고 순간을 포착하고 짜인 각본에 의지하기보다 즉흥적이거나 우연성이 주는 효과를 놓치지 말 것. 찾아보면 평론집이나 이론서가 외에 감독의 쓴 책은 의외로 흔치 않은데 이런 책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거의 절반을 읽었는데 배울 점이 참 많다.
나는 주로 (그럴만한 규모의 일도 없었지만) 대강의 스토리보드나 샷리스트를 짜두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판단해서 작업하는 편이었는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들을 좀 더 디테일하게 세우되 촬영 환경에 따른 유연성도 가져야겠다. 예전에 2박 3일간의 말도 안 되는 스케줄로 다큐멘터리 촬영을 한 적이 있는데 (결국 추가 촬영을 더 많이 했다.) 그땐 한 컷 한 컷 스토리보드를 다 준비했었고, 그것만 찍어도 스케줄이 빠듯하다고 생각해서 우연이 가져다준 좋은 장면들을 애써 무시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후회가 된다. 그런데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렇게 할 공산이 크다. 스토리보드가 있는 다큐멘터리라니, 그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들의 수가 많아지면, 이들을 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줄어든다.
사건을 이끄는 것은 감정이 되기를. 그 반대가 아니라.
어떤 영상을 만들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와 같은 질문인 것 같다. 억지로 꾸며내지 않은 것, 자연스럽고 단순한 감정, 감정의 본질, 인상파 화가의 그림, 눈이 가진 사정력. 그러한 것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어둠속의 빛. 빛 속의 어둠. 명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