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남편이 일찍 출근하는 날엔 (주로 7시) 나도 그 시간즈음 운동을 하러 나가고, 늦게 출근하는 날엔 나도 덩달아 늦게 나가게 된다. 그와 상관없이 일정한 시간에 나가면 좋으련만, 괜한 핑계를 대며 미적거린다. 운동을 하고 나서 기분 좋은 것과는 별개로 운동하러 가기까지는 아직도 정말 귀찮다. 오늘은 일어나 그와 함께 먹을 계란 샌드위치를 만들고 아침을 먹고 그가 출근하고 한 시간 후에 헬스장으로 향했다. 9시였다. 어차피 가게 될 걸 좀 일찍 다녀오면 좋을 텐데 내일부턴 7시 반이 되면 아무 핑계 대지 말고 그냥 나와야겠다. 그래도 오늘 간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러닝머신으로 달리기를 하면 뒷벅지 근육이 발달하지 않는다고 해서 오늘 웨이트 운동에 뒷벅지 운동 두 개를 껴넣었다. 과연 뒷벅지 근육이 없긴 없는 모양인지 가장 적은 무게로 했는데도 이마에 땀이 송글 맺혔다.
운동을 하고 나오는 길에 비를 맞았다.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전의 한 두 방울씩 내리는 빗방울, 이때의 비가 가장 짙은 냄새를 풍긴다. 도시의 비냄새는 아스팔트 냄새, 쇠냄새, 타이어 냄새, 옅은 풀냄새, 땀 냄새가 뒤섞여있다. 결코 좋은 냄새라고 할 순 없는데도 비를 맞으며 집으로 오는 길 이상하게 기분이 정말 좋았다. 요즘 내 마음을 진단해 보자면 '기분이 나쁜 상태'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고 평소엔 평평한 상태로 있다가 가끔씩 올라오는 이런 환희의 감정이 있을 뿐이다. TCI 검사 결과 늘 일정한 우울이 깔려 있다고 나왔는데 정확하다. 선생님이 이 수치보다 조금 높은 게 정상이라고 했는데 내겐 그 상태가 가장 편안한 상태라 고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살고 있다.
지난주부터 알람을 맞춰놓고 기다렸던 노엘 갤러거 하이 플라잉 버드 공연 예매에 실패했다. (아직 공연이 시작하지 않았으니 완전 실패는 아니다.) 예매 오픈 시간이 되고 0.00001초 만에 예매 버튼을 누른 것 같은데 이미 대기 인원이 10,000이 넘지 않은가. 정말 한국의 인터넷은 이해할 수가 없다. 잔여 좌석이 모두 0이 될 때까지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며 취소표를 노리다 한 시간이 지났고 엄청 간절하진 않았는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오늘 해야 할 일은 끝내고 새벽에 취소표를 다시 노려보기로 했다. 아쉬운 마음을 포카칩 트러플맛을 사 먹고 진정시켰다. 스트레스엔 짠 음식이 최고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나. 계속 고전영화만 보다가 환기시키고 싶은 마음에 어제저녁 남편과 엘레멘탈을 봤다. 이걸 보고 사람들이 많이 울었다는데 난 그냥 재밌게 본 정도다. 나는 이민자도 아니고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살아본 적도 없는터라 공감 가는 부분이 적었던 것 같다. 다만 불과 물, 상극의 원소가 만나 어느 한쪽이 없어져버리는 게 아니라 기존에 없던 새로운 작용을 한다는 점은 내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사람 관계와 문화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전쟁 기간 수많은 이민자들이 모인 것이 미국을 발전시켰듯이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들이 만나 만들어내는 것들의 폭발력은 얼마나 큰가. 그런 의미에서 나와 정 반대의 남편을 만난 것은 남편과 나의 본능이었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