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동물처럼 살고 싶다. 동물들이 그렇듯, 존재한다는 의식 없이 존재하기를 원한다. 동물인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동물들이 부럽다. 동물들의 태평함이 부럽다. 동물들의 영원성이 내게는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나비 안에는 시간이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바로 나비가 누리는 평온한 힘의 비밀이다.'
<인간의 일에 대하여>, 뤽 다르덴
일어나자마자 인간이 죽음을 향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책을 읽기란 쉽지 않다. 옆에서 놀아달라고 보채고 있는 아기 고양이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태어난다는 것, 세상에 나오는 것은 어떤 간격도, 불연속도, 타인도 없는 보호막에서 나오는 것이다. 태어난 존재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보호막을 만들어 두려움을 해결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세상을 바꾸기에 역부족인 인간의 특성, 요컨대 부적은 불안정, 연약함, 무력함을 잘 드러낸다.'
때때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하는데 태어나기 전, 즉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사라지고자 하는 마음은 본능이다. 현실에 보호막을 두르고 살아가지만 먹이를 얻기 위해선 보호막 밖을 나가야 한다. 사는 게 늘 힘에 부치는 이유가 본능을 거슬러서 살고 있기 때문일까? 노엘은 이 페이지 위에 올라와 책 끝을 갈가리 물어뜯는다. 뤽 다르덴이 말처럼 동물들의 태평함이 정말 부럽다.
이런 답도 없는 생각들을 하며 오전을 보냈다. 사실 어제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정말 울적했다. 앞으로 잡힌 일정도 있고 더 좋은 일들이 많이 들어올 것을 믿지만 당장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만한 태평함이 내겐 부족한 것 같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인데 빈 시간이 울적할 따름이다. 많은 책들과 영화를 본다고 한들 실전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일까? 많은 클라이언트들의 선택을 받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일까, 그것만이 나의 보호막을 뚫고 나가는 길일까. 클라이언트 작업을 하며 아직 짜릿한 순간을 맛보지 못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지 않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을 할 순 없을까. 사실 알고 있다. 꾸준히 개인 작업을 하는 게 답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게 너무 귀찮고 두렵기도 해서 클라이언트 잡이니 뭐니 뭐라도 들어오라며 도망칠 구실을 계속 만들고 있다.
그대로 있으면 계속 우울해질 것 같아 산책하며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생각해 봤다. 오전에 잠깐 인스타그램을 켰을 때 뜬 영상으로 영상에선 '좋은 친구, 햇빛, 집, 푹신한 것, 좋은 친구, 가벼운 대화' 같은 것들을 나열했던데 나는 마침 조용히 흘러가는 뭉개 구름을 보고 있어 솜뭉치 같은 그 구름을 눈 속에 꼭 담아 두었다. 그 외에 '노엘의 체온, 남편의 미소, 조용한 음악, 시원한 바람, 낮잠'등이 생각났다. 그런데 이제 그만 마음 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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