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맨 5화

by 미스틱


#15


무표정하게 운전 중인 석구. 철규 역시 무표정하게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다.


“이 동네 애들은 말이야. 다 똑같은 거 같애.”

“네?”

“이럴 때는 그냥 말 놔. 나랑 나이 같잖아.”

“...”

“이 동네 년들은 다 그년이 그년이라고. 재수 없는 년들.. 뭔가 색다른 게 없어.”

“... ”

“아까 그 피에로 말이야. 걔 조선족이라며?”


석구가 룸미러로 철규의 눈치를 살핀다.


“예? ...예.”

“걔, 불법체류자야?”

“....”


석구가 대답을 않자 철규가 뭔가 잠시 생각하다 갑자기 편안한 자세가 된다.


“도와줘야겠네.”

“... 뭘요?"


석구가 계속 철규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철규는 담배를 피워 물고는 창문을 내린다. 훅하고 뜨거운 열기가 차 안을 덮친다.


“우리 형이랑 말이야. 어릴 때 서울 올라와서 진짜 고생 많이 했거든. 그래도 발악해서 이만큼 왔는데.. 이젠 주위도 좀 돌보고 해야지. 그래도 우리 가게에 드나드는 앤 데.. 자네도 힘든 거 있으면 얘기하라고. 언제든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철규의 눈치만 살피는 석구. 차창에 한 두 방울씩 빗방울이 부딪치기 시작한다.


어느새 비는 억수같이 쏟아진다. 그 빗속을 뚫고 철규의 신형 BMW가 용산 재개발 단지로 접어든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여기저기 허물어진 가옥들과 재개발 반대를 외치는 찢어진 현수막이 흉물스럽게 비친다.


“여긴 공사가 덜 끝났나 봐요.”

“....”


대답이 없어 룸미러로 보니 철규는 그새 잠이 들었다. 잦은 회전을 하며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는 철규의 차.


“이 길이 아닌가?”


휘어진 도로를 따라 회전을 하자 갑자기 시커먼 물체가 달려든다. 놀라 급정거를 하는 석구, 상향등으로 바꾸면 웅장한 위용의 크레인이 빗속에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다. 급정거에 철규가 게슴츠레 눈을 뜬다.


“뭐야. 다 왔어?”

“아뇨. 거의..”


후진을 하며 대답을 하는 석구.


“집 앞에 세우고 그냥 가. 난 좀 자다 올라갈 거니까.”


철규는 그렇게 툭 내뱉어 놓고는 좌석 깊숙이 몸을 묻으며 다시 눈을 감는다.


“여기 운전 조심하셔야겠는데요?”

“...”

다시 회전하는 차. 잠자는 철규의 얼굴 너머로 비를 맞고 있는 크레인이 지나간다.


#16

슬레이브 지붕이 지저분하게 펼쳐진 동네. 두 사람이 겨우 지날 갈만한 좁은 골목에 합판으로 만든 똑같은 대문이 늘어서 있고 빗물이 슬레이브 지붕을 타고 처량하게 흐른다. 그 질척한 골목을 피에로가 어느새 다시 분장한 모습으로 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맞은편에서 트레이닝 차림의 10대 사내 둘이 웃옷으로 머리를 덮고 걸어온다. 피에로가 그들을 보고 멈칫하고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발길을 옮긴다. 이내 마주한 사내들과 피에로. 사내들 헉 소리를 내며 놀란다.


“뭐야, 씨발. 놀랐잖아.”


고개 숙인 채 벽에 붙어 길을 터주는 피에로. 벌레 피하듯 반대편으로 바싹 붙어 지나가는 10대들.


“저거 냄비 아냐?”

“냄비든 주전자든.. 귀신인 줄 알았네. 재수 없게..”


그들의 말을 고스란히 들은 피에로는 표정 변화 없이 어느 집 대문에 걸린 자물쇠를 연다. 대문을 열고 작은 백열등이 켜면 비키니 옷장과 앉은뱅이 밥상이 전부인 3~4평의 방이 초라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곧장 비키니 옷장을 여는 피에로, 이불을 꺼내 깔고 힘없이 몸을 누인다. 비에 젖어 일어난 누런 벽지 위로 풍선인형들을 매달려 있다. 이때,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벌떡 일어나는 피에로.


“야! 뭐 해. 급한데..”


흠칫 놀란 피에로, 서둘러 불을 끈다.


대문 밖에는 영락없는 노가다 차림의 사내가 비를 맞으며 한 손으로 문을 짚고 서서 바지 지퍼를 연다.

“아우~ 씨팔... 급하다니까..”


취한 몸이 휘청거리면서 오줌줄기도 갈지자로 휘저어진다. 이내 옷을 추스르고 다시 문을 두드린다.

“야! 씨팔. 뭐 해? 문 안 열어? 부숴버린다?”


이때 옆집 문이 열리고 중년의 여자가 부스스한 얼굴을 내민다.


“어이구~ 이 화상아. 왜 남의 집 문은 두드리고 지랄이야.”

“어라?”

“인제 지 집도 못 찾으니 지 마누라도 못 찾것다. 내 얼른 또 도망을 가야지. 원... 빨랑 안 들어와?”

“으허허. 도망가, 도망가. 못 찾응께. 으허허..”

“허구한 날 술에 절어 사니 언년이 배기것어, 이 인간아. 이 시간까지 술 처먹을 돈 있으면 집구석에 좀 갖구 와 봐.”

“으허허.. 알았어. 알았어..내 돈 벌어 올게.”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피에로. 다시 불을 켜고 목에 걸린 펜던트를 열고 한 참을 본다. 그리고 이내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비 그친 로데오 거리에 파랗게 아침이 밝아온다. 빈 택시들이 오가고 휘청거리며 걷는 사내들, 보도블록에 주저앉아 있는 사내, 남자에게 업혀 가는 여자.. 거리가 지친 듯 흐늘거린다.


주차장 구석에 구역질하고 있는 사내가 보이고 재용은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어 있다. 이때 재용의 어깨를 흔드는 손이 있다. 피에로다. 재용 화들짝 놀라 깬다.


“어??!! 어.. 웬일이야?”

“왜 여기서 자?”

“응.. 취해가지고...”


다시 게슴츠레한 눈으로 시계를 본다.


“어우, 들어가야지.”

“...”


재용이 하품을 하다 말고 시무룩해진 피에로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잠시 후, 재용과 피에로가 새우깡과 소주를 의자에 놓고 주차박스에 기대앉아있다.


“사실, 내가 처음 서울 올라와서 존나 막막한데, 그때 다행히 석구 형 만나 가지고.. 재워주고 돈 주고 한 게, 그땐 존나 고마웠는데.. 그게 벌써 3년 전이네. 근데 요즘 돈독 오른 형을 보면.. 꼭 그렇게 살아야 하나 싶고..”

재용이 맥없이 술잔을 비우고는 인상을 있는 대로 쓴다.


“크~~”

“재용이, 너무 철없어.”


피에로가 봉투를 내밀며 말한다.


“이번에도 부탁해.”

“누나는 번 돈 고향에 다 보내고 나면 뭘로 살어?”

“나는 쓸데없어.”


피에로도 술잔을 비운다.


“오늘 이상하네. 안 먹던 술을 다 마시고..”

“근데.. 석구씨는...?”

“석구 형 보러 나왔구나?”


말을 흐리는 피에로를 보고 재용이 피식 웃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바꾼다.


“그 돌멩이 같은 인간이 뭐가 좋다구. 그 인간, 왔다가 다시 부산 갔어. 여자 친구 만나러.”

“...?”


재용을 빤히 쳐다보는 피에로.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된다. 그러자 재용이 짓궂게 웃기 시작한다.


“뻥이야. 여자 친구 보고 싶다고 부산까지 대리해 달라는 놈이 있어서 부산 갔다고. 스포츠카 타고.. 아주 돈독이 올라서 잠도 안 잘라는지..”

“... ”


피에로가 씁쓸한 얼굴로 술을 따라 마신다.


“난 누나 보면 참 불쌍해. 남도 다 아는 걸 혼자 아니라 그래. 하긴, 나도 마찬가지지만... 하여튼 석구 형은 나쁜 놈이야.”

“석구 씨 나쁜 사람 아니야. 그리고 석구씨도 나.. 사랑해.”

“참, 나. 진짜? 진짜야? 진짜냐구? 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


그러다 아차 싶다.


“알았어, 알았어. 그만해. 니기미.. 또 뜨거운 하루가 시작되네.”


벌렁 드러눕는 재용을 피에로가 원망 섞인 눈으로 재용을 본다.


“석구 씨 웃는 거 한번만 봤으면 좋겠어.”


피에로가 고개를 들어 몇 분 만에 한층 더 밝아진 하늘을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발레맨 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