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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Oct 08. 2021

바둑이와 나 6화

마이신과 기도

*기억에 의존한 글이므로 과장이나 구라가 섞여 있음.


집 앞에 다다를 때까지 누구와도 마주치지 못했다. 목구멍이 찢어지게 아팠지만 또 울어야했다. 이젠 혹시 집에 계실지 모를 부모님께 용서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난, 어린 아이는 우는 것으로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집엔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면서 암담했다. 이런 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던가? 바둑이를 쳐다보니 아무래도 그건 아니고 불행 중 불행인 것 같았다. 어쨌거나 당장은 팔이 후들거려서 일단 바둑이를 방에 누이고 다시 뛰었다. 옆집, 친구 집, 어른이 있을 만한 집의 대문이란 대문은 다 쾅쾅 두드리며 돌아 다녔다. 몇 집을 거쳐 커다란 대문이 빼꼼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어둠에서 빛을 본 심정으로 대문으로 몸을 던졌는데 풀린 다리 때문에 문턱에 걸려 데굴데굴 굴러 들어갔다. 두리번거리는 내 눈에 마루 한 가운데서 내 또래 애와 그 애 아버지로 보이는 후줄근한 아저씨가 상을 두고 마주 앉아 있는 것이 들어왔다. 굴러들어 온 나를 본 둘의 눈이 똥그래졌다. 가만 보니 매번 내게 구슬이나 딱지를 홀랑 털리던 교내 범생이었다. 내가 사기 쳤다고 억울해 하며 대들다 얻어맞기도 했던 애다. 낭패였다. 하지만 바둑이에겐 절체절명의 순간인데 어쩌겠나.      


“아저씨. 우리 바둑이 좀 살려 주세요.”     


벌건 얼굴의 아저씨 눈꺼풀이 안보일 정도로 빠르게 껌뻑였다. 그제야 밥상에 놓여 있는 막걸리 주전자가 눈에 들어왔다.      


“니 누고??”     


입에서 막걸리 냄새가 심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 위급한 시간에 내가 누군지가 왜 중요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시간도 아까웠다. 그래서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눈빛을 가득 담아 범생이에게로 애원의 눈길을 옮기며 말했다.      


“얘랑 친한 친군데요, 우리 바둑이가 죽어가요. 좀 살려주세요.” 


매 맞기 전 애원하는 아이처럼 손을 싹싹 빌고 발을 동동거렸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게슴츠레한 눈만 껌뻑일 뿐 무거운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나는 아예 신발을 신은 채 마루로 올라 아저씨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평소에 우리 집에서 학습한 바, 술 냄새와 혀 꼬부라진 상태인 그 아저씨가 당장 일어설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아저씨는 눈만 껌뻑이며 막걸리 주전자를 들었다. 결국 범생이를 보던 눈을 도끼눈으로 바꿨다. 영문을 모르고 자기 아버지처럼 눈만 껌뻑이던 둔탱이 녀석은 내 눈빛을 알아보고 그제야 지 아버지 등을 떠밀었다.       


“아부지, 내 친굽니다. 누가 죽는다 안합니까?”     


아들의 친한 친구라는데, 학교에서 꽤 공부 잘하는 아들이 등까지 떠미는데 아무리 술이 좋다지만 뭉그적대는 그 아저씨가 하도 답답해서 벼락이 쳐서 아저씨 엉덩이를 따끔하게 쏘아 주길 바랬다. 아저씨는 마지못해 80살 할아버지처럼 일어나더니 슬리퍼를 신다 비틀거리면서도 한참을 뭐라 중얼 거렸다. 그러는 자기 아버지를 보다 내 눈치를 보다 어색한 웃음을 짓는 그 범생이 놈을 보고 있자니 안달이 난 그 와중에 녀석이 참 안됐다고 생각했다. 겨우겨우 대문을 나선 아저씨를 끌다시피 하며 골목을 걷는 동안 사고 경위부터 읊었다. 의사는 아니지만 어른이므로 어떤 판단에 어떤 도움이라도 될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저씨는 대체 듣기는 하는 것인지 모를 표정으로 계속 뭐라 중얼거렸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어쩌면 말씀을 안 할뿐 치료 방도는 이미 머릿속에 다 세워졌으리라 믿고 싶었다. 어른이니까. 

그러나 우리 집에 도착한 아저씨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허연 바둑이 눈을 까뒤집고 건성건성 살피더니 ‘살아있네?’ 란 하나마나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럼 내가 죽은 개를 살려달라고 했겠나?      


‘이런, 그건 아까 말했잖아욧!!’ 이라고 분통을 터뜨리기 직전, 아저씨는 한마디 더 했다.       


“곧 죽겠는데?”

‘아씨, 그것도 아까..’      


분통이 터져 말이 터지지 않았다. 술 취한 아저씨는, 그러니까 내가 자기 집에 굴러 들어가서부터 발을 동동 구르며 바둑이 옆에 서기까지의 시간을 매우 느리게 다시 재생 하고 있을 뿐, 도무지 하는 게 없었다.      


“아저씨. 제발 어떻게 좀 해주세요.”      


내가 참다못해 진짜 벼락이 쳐서 그 아저씨 뒤통수에 꽂히길 바라는 서슬로 다그치자 그제야 아저씨는 좀 움찔해서는 그나마 쓸 만한 말을 뱉었다.      


“조~기 약국 가서 약 사다가 우유에 타 맥여 보그라. 근데 소용 없을기다.”

“무슨 약이요?”

“글쎄다. 사리돈?”     


그건 우리 어머니가 가끔 삼키던 알약이었다.     


“그거 이빨 아플 때 먹는 약 아닌가요?”

“그래? 그럼...”     


아저씨는 얼굴이 더 벌게지더니 다음 말을 찾고 있었다. 정말이지 어른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에라이..’      


내가 실제로 이런 말을 내뱉었는지는 모르겠다. 저 어른을 믿고 어떤 방도가 나오길 바라는 건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난 뒤도 안돌아 보고 냅다 밖으로 튀었다. 그리고 약국으로 뛰며 다짐했다.      


‘범생이 너, 학교서 보자.’       


동네엔 약국이 딱 한군데 있었다. 학교 후문 앞이었다. 학교를 빙 돌아 뛰어가며 당장 내일 등교할 걸 걱정이 뜬금없이 들었다. 바둑이가 죽어가는 마당에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었다. 

약국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서다 또 구른 것 같다. 약국이란 곳은 원래 점잖은 곳이었으므로 창피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서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저씨. 마이신이요.”     


동물 병원이란 용어도 없었을 뿐더러 있다면 ‘동물의 왕국’ 만큼이나 터무니없이 맹랑한 말로 들릴 시절이었다. 우리들 인식엔 병원이란 사람이 가는 곳이고 인간세상에 개와 관련된 업체는 개를 먹는 보신탕집이 전부였다. 설사 약국을 뒤진다 한들 개를 위한 약이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동물관련 약이 있긴 했다. 쥐약. 

그런 때에, 그 아저씨와 열불 터지는 대화를 하던 순간에 번쩍하고 내 머리를 스치는 게 있어서 밖으로 튀어 나온 것이다. 기껏 항생제에 불과한 '마이신'이란 알약 이름이었고 그것은 한 줄기 빛이었다. 

그땐 애나 어른이나 열나도 마이신, 두드러기 나도 마이신, 입술 깨져도 마이신.. 배 아파도...는 훼스탈. 

아무튼, 마이신이란 그 작은 알약은 제약사의 개발목적과 무관하게 본래의 제 치료 영역을 넘어 온갖 증상에 만병통치약처럼 마구 쓰였었다. 몇 년 전에 내가 산에서 굴러 다리가 부러졌을 때, 깁스를 하고 마이신을 먹었던 기억이 번개처럼 스쳤던 것이다. 


최, 만, 석.

약국과 슈퍼에서 아버지 이름 석 자로 외상을 달고 산 마이신과 우유를 들고 집에 도착했을 땐 아저씨도 범생이도 없었다. 


'또 아들 앉혀놓고 썰 풀며 술 푸러 갔겠지.'

 

그래도 누가 옆에 있었으면 했는데, 마이신과 우유병을 양 손에 들고 죽어가는 바둑이와 혼자 마주하니 외롭고 쓸쓸했다. 머리를 쥐어짜 어머니가 내게 약 먹이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쓴 가루약을 먹으면 기침을 해 약을 공중에 다 뿌리는 내게 어머니가 해주셨던 비법이었다. 숟가락에 우유를 조금 붓고 마이신 캡슐을 깨 가루를 새끼손가락으로 저어 녹였다. 그리고 바둑이 입을 벌리고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조심조심 부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건지 전부 다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평소에 물 먹을 때 벌컥벌컥 들이키지 못하고 혀로 날름날름 묻혀 먹는 게 답답해서 역시 개는 개라고 무시했는데, 그게 몹시 후회됐다. 한 알을 더 타 먹였다. 마이신을 많이 먹으면 어지럽다는 것도 기억했지만 바둑이 상태가 보통 위중한 게 아니니까 딱 한 알만 더 먹이기로 했다. 대신 우유는 더 먹이고 싶어 한 병을 다 먹였다. 그 정도면 나도 배부를 양이었다. 


이제 남은 건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때의 기도는 정말 진지했다. 그 동안 먹을 거 줄 때만 교회 가서 죄송하고 앞으로 먹을 거 안줘도 열심히 다니겠다고 했다. 그러니 바둑이 좀 살려달라고. 

오직 바둑이를 위한 기도만 하고 싶었는데 자꾸만 저녁에 아버지한테 안 맞고 넘어가게 해달라는 기도가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이러다간 기도의 효험이 떨어질 것 같아서 집중하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잘 안됐다. 그래서 바둑이도 살고 나도 안 맞으면 좋겠지만, 그건 그냥 덤으로 하는 기도니까 안 들어줘도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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