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내 인생 12화

-수료식-

by 미스틱

재수는 수료식 때 사열이고 총검이고 어떻게 마쳤는지는 모르겠고 수료식 마지막 순서인 교육대 대장의 격려사를 듣는 둥 마는 둥 그저 내일이면 지옥 같은 정찰댄지 뭐시긴지로 간다는 악몽 같은 사실과 그녀가 멀어져 가고 있다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쨌거나 재수의 A급 군모와 군복에 작대기 하나가 붙었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선배 기수들 수료식 때 잠깐 멋진 군인 모습을 그려 본 적이 있지만 지금은 멋이고 나발이고 지옥 같은 부대로 가야 하는 사실을 부모님께 어떻게 알릴까 걱정이었다. 몇 주 전 보낸 편지에 수방사가 얼마나 편한지, 휴가를 얼마나 자주 나가는지, 자신이 그곳으로 가게 됐다고 잔뜩 자랑을 해 놨는데 이제 와 다 취소되고 정찰댄지 뭔지 이름도 모를 그지 깽깽이 같은 곳으로 간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울 동안 격려사가 끝나고 부모님들이 도열해 있는 제 자식을 찾는 순서가 됐다. 선배들 수료식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낯간지럽게 이게 무슨 짓거린지, 상봉의 감격을 고조시키려 만든 순서겠지만 재수는 참 배려 없는 유치한 짓거리라 생각했다. 제 자식을 못 찾으면 그 부모님은 얼마나 쪽팔릴까 싶어 혀를 끌끌 찼었다. 제 자식도 못 찾는 부모는 당황할 것이고 그 아들은 눈물 나게 서러울 것이며 그들을 보는 주위 사람들은 친부모 맞느냐는 시선을 보낼 것이다. 그런데 젠장할. 그 주인공이 재수와 재수 부모님이었다. 도열해 있던 훈련병의 절반 이상이 벌써 부모님을 얼싸안고 연병장을 빠져나갔지만 재수 부모님과 누나는 재수 옆을 세 번이나 지나치고도 아직도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다.


‘으이구 증말.. 엄마!! 여기라고 여기!!’


답답하고 쪽팔려서 이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됐다. 훈련병은 단 한 명만 남더라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눈도 돌리면 안 됐다. 우라질 놈의 규정. 이제 삼분의 일 정도 남은 연병장 인원 속에서도 재수 부모님과 누나는 재수를 찾지 못했다.


‘아니, 바보들이야? 세 명이 흩어져서 찾으면 되지 왜 뭉쳐 다니는 거야? 언제부터 가족애가 그리 돈독했다고.’


꼬인 군 생활에 안 그래도 속이 터지는데 부모님까지 염장을 지르는 것 같아 재수는 열불이 났다. 뭉친 가족은 또 한 번 재수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이제 네 번째였다.


“여기다, 여기. 봐라, 좀.”


재수는 더 참지 못하고 막 지나가던 누나를 향해 속삭이듯 웅얼거렸다. 그제야 재수 누나는 휙 돌아서 재수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봤다.


“나라고 나. 눈깔이 삐었냐?”


그래도 재수 누나는 실눈을 뜨고 무슨 특징이라도 찾는 듯 재수 얼굴을 살폈다.


교육대 한 편 잔디밭에 앉은 재수 가족은 어머니가 푸는 음식 보따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보따리에서는 마술처럼 음식이 끊임없이 나왔다. 빚을 내 음식을 만들어 온 게 아닐까 싶었다. 재수 누나는 음식 만드는데 자기도 한몫하느라 어깨가 쑤신다고 했다. 밥 하나 못 짓는 게. 그새 뻥까지 심해졌다.


“야~ 도통 못 알아보겠드라. 얼굴이 새까만 것이 워째 그리 퉁퉁 살이 쪄 부렀냐?”

“그니까. 군대 밥이 좋은 가봐, 아빠. 여기 애들 다 퉁퉁해.”


재수 누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맞장구를 쳤다.


“부은 거예요.”

“웃기시네, 여자들도 살찌면 꼭 그렇게 말하드라.”

“너 짬밥 오 분 안에 먹어 볼래? 그리고 하루 종일 굴러볼래? 자다가 말고 연병장 집합 해볼래? 붓나 안 붓나?”


실제로 재수는 얼마 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깜짝 놀랐었다. 몸은 더 말랐는데 얼굴만 유독 퉁퉁 부어있었다. 재수만이 아니라 덕환도, 동기들 모두 그러했다. 그 이유가 궁금해 동기들끼리 모여 격렬한 논쟁 끝에 내린 결론은 짬밥의 어원이 짠 밥이라 너무 짜게 쪄서 부었다는 거였다. 재수가 생각하기에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바삐 밥을 퍼먹었지만 떡 진 맛일 뿐 짠맛을 느끼진 못했다. 결국 의문은 신 조교가 풀어 주었다. 짬밥의 어원은 잔반 즉, 남은 밥이라고 했고 얼굴이 붓는 건 너무 피곤하면 어깨와 목 근육이 굳고 혈액 순환이 잘 안 돼 얼굴이 붓는다고 했다. 역시 훈련병과 조교의 수준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남도 아니고 지 동생이 구르고 굴러 부었건만 잘 먹어서 살이 쪘다니. 평소에도 누나에게 어떤 기대도 없었지만 군대 와서 그런 소릴 들으니 재수는 새삼 야속했다.


“말 그만하고 얼른 먹어.”


화풀이를 더 하고 싶었지만 재수 어머니는 상추쌈으로 재수의 입을 막아 버렸다. 저런 게 누나라고. 재수는 씩씩거리며 우걱우걱 씹었다.


“나 휴가 못 나가요.”

“응? 왜?”


재수 어머니 고기쌈을 재수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눈이 똥그래져 물었다. 재수 아버지와 누나 역시 열심히 씹으며 의아한 눈으로 재수를 바라봤다.


“수방사 가지 말고 여기 남으래요.”

“누가?”

“정찰대 대장이.”


재수 어머니뿐 아니라 다들 뭔가 신기하다는 눈빛이 됐다.


“와우~ 대장이 직접 여기 남으라고 했다고? 니가 눈에 띄었나 보다. 잘 됐다, 야.”


잘 됐단다. 재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군모에 작대기 하나인 걸 본 누나는 아까부터 계속 일병이라 불렀다. 군대 계급에 무지한 누나는 대장이라니까 조폭 대장인 줄 알았을 테고, 여기가 싸제처럼 대장한테 잘 보이면 무슨 진급이라도 할 줄 알았을 테다. 그런 누나가 수방사가 뭔지는 알았을 리 없었다. 뭐, 자신도 몰랐고 대대로 군인 없는 가문이었으니까 이해는 됐다.


“아, 몰라. 하여튼 여기 맹수부대 정찰댄가 뭔가 그리로 가래. 그렇게 알어.”


이주 후 휴가를 나올 줄 알았다가 취소됐다는 사실에 서운해하는 건 어머니뿐이었다. 어쩌면 나머지 두 사람은 아예 안 나오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군바리가 휴가 나와 하는 일이라 봤자 부모에게 돈 뜯어 술이나 마시는 거니까.


교육대 오후의 번잡한 잔디밭엔 군모를 쓴 아들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들과 친지들의 흐뭇한 웃음소리가 널리 널리 아주 널리 퍼져나갔다. 그 속에 재수네 가족만 맹맹한 분위기로 음식만 삼켰다. 재수는 무심코 연병장 연단을 바라봤다. 그곳엔 재수와 덕환처럼 두 후배가 바닥을 쓸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열심히 바닥만 쓸고 있었다.


“씨발 놈의 총검술.”

“뭐여? 이노무 새끼가 애비 앞에서 씨발이 뭐여? 이제 군인이니께 막 욕해도 된다 이거여?”

“아뇨. 저기 저 새끼들한테 한 거예요. 죄송해요.”


재수네 가족 모두 고기를 우걱우걱 씹으며 연병장 단상에 있는 두 후배를 멀뚱히 바라봤다.


“엄마. 호떡집은 잘 되고 있지?”


언제부터 호떡집 매출을 걱정했다고. 그러나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날 더워지니 이제 딴 거 해야지.”


하긴 호떡은 추울 때나 먹는 거지.


“아이고, 그래도 우리 아들 군대 갔다니까 너 찾는 사람 많더라.”


연실 쌈을 싸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어머니 말씀에 재수는 퍼뜩 귀가 틔었다.


“누가요?”

“그 있잖니. 농협 아가씨. 너 안 보인다고 하길래 군대 갔다니까 아쉬워하는 눈치더라. 군 생활 잘하라고 전해 달래.”


재수는 맥이 탁 풀려 쌈을 입안 깊숙이 욱여넣었다. 농협은 무슨 얼어 죽을...


“그뿐인 줄 아니? 앞에 문방구 딸내미, 금은방 작은 딸.. 하여간 눈들은 있어가지고.. 하하. 아이고 웃겨 죽겠네.”

“군대 갈 놈이 아주 여기저기 수작을 다 걸어 놓고 왔네. 그것들도 다 골 빈 년들이야.”


어머니의 아들 자랑에 재수 누나는 본 적도 없는 여자들을 욕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재수는 기가 찼다.


재수가 고등학생 때 주요 일과 중 하나가 이제 막 성인이 되어 취직한 누나를 잡아다 집에 풀어놓은 일이었을 정도로 누나야 말로 여기저기 남자들 만나러 다닌 날라리였다. 해서 부녀 갈등은 집안싸움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어머니가 애 기죽이면 안 된다고 바지락 까서 번 돈으로 취직 기념 승용차까지 뽑아줬더니 밤늦게 쏘다니는 것도 모자라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오니 길길이 날뛰는 아버지와 누나 편을 드는 어머니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는 건 재수였다. 해서 누나의 올바른 퇴근길을 사수하는 임무를 스스로 맡았는데, 어느 날 기어이 대형 사고가 터져버렸다. 하필 요령을 피워 누나의 퇴근길 사수를 빼먹고 학교에서 농구를 하던 날 누나가 직장 앞에서 치한에게 납치된 것이다. 사건 후 재수 누나의 이실직고에 따르면, 오래도록 구애를 했던 남자였는데 누나는 대놓고 무시했다. 그날 역시 또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남자는 이번엔 다짜고짜 누나 팔을 붙잡고 무지막지하게 골목으로 끌고 갔다. 하여간 대처능력이 좋은 건 집안 내력인지 같은 날라리로써 인정 안 할 수가 없는 게, 앙심을 품은 남자가 완력으로 모텔로 끌고 들어가려 하자 누나는 기지를 발휘해 그간 자기도 마음에 변화가 있었다고, 안 그래도 조만간 제 심경변화를 전할 생각이었다며 남자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남자는 앙심과 조급함을 풀었고 누나는 어차피 모텔에 갈 거면 회식 때문에 늦는다고 집에 전화를 하고 맘 편히 들어가자고 설레발을 쳤다. 그러자 아마도 그때부터 다른 이유로 흥분했거나 한참 멍청했거나 했을 그 남자는 승낙을 했고 누나는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하필 전화를 받은 사람이 술 취한 아버지였다.


“아빠. 재수 빨리 보내. 나 끌려가고 있어. 버스.”


누나는 공중전화박스 옆에서 지켜보는 남자에게 의심받을까 긴말은 못하고 핵심만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재수가 소나기 때문에 농구를 관두고 집에 와 방문을 여는 순간이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수화기를 내려놓으시던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내려놓은 수화기에서 손을 못 떼시고 재수를 멍하니 바라보셨다. 취했지만 술병을 앞에 놓고 긴장한 아버지의 얼굴엔 뭔가 불길한 예감이 서려 있었다.


“재수야. 니 누나가 뭔 일이 났다는디 너 좀 빨리 가봐라.”


누나를 데리러 가지 않은데 대한 호통대신 들은 말 치고는 너무 긴장되고 불안한 목소리여서 재수는 뭔가 황당하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 드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뭔데요. 어디로 가 보라는 거예요? 회사요?”

“아니. 거시기, 끌려간다는디 버스라더라.”

“버스요? 그럼 경찰한테 끌려간다는 거예요?”

“그랬나 본디?”

“아니, 무슨 경찰이 버스로 사람을 잡아가요? 경찰차 있는데.”

“긍게 말이여. 경찰이 아닌가 벼?”

“으휴.. 진짜."


화가 났다. 저놈의 술. 지긋지긋했다. 재수는 밖으로 튀어나가 큰 도로까지 달려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에게 최대한 빨리 달려달라고 부탁을 해놓고 머리를 고속 회전시켰다. 아버지가 취하긴 했어도 저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누나가 다급하게 말했단 얘긴데, 분명 회사는 아니다. 오전 여섯 시 출근을 하고 오후 서너 시면 직원 대부분이 퇴근하는 건설회사다. 경리직인 누나만 일곱 시까지 일하다 혼자 퇴근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회사일로 급하게 전화할 일이 없다. 택시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일곱 시 이십 분을 조금 넘기고 있다. 그럼 퇴근을 하고 회사를 나와 누군가에게 강제로 끌려가고 있다는 건데, 누군가 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이 경찰 말고 또 누가 있지? 재수의 빠르게 회전하던 두뇌는 여기서 멈췄다. 짐작 가는 건 치한인데, 무슨 치한이 택시도 아니고 버스로 끌고 가나?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사이 택시는 누나 회사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멈춰 섰다. 학교 땡땡이치고 노가다 뛰어 번 피 같은 용돈 중 거금이 택시비로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찾기만 해 봐라. 두 배로 뜯어내고 말 테다.’


그러나 그건 나중 문제고, 우선 정류장 주위를 훑어봤다. 영화에서 보면 형사나 탐정은 사건 현장을 탐색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나 전단지와 담배꽁초뿐 별다른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재수는 끌려가고 있다는 말만 머릿속에서 맴맴 돌아 마음만 다급할 뿐 어디서 어떻게 찾을지 막막했다.


‘어떤 새끼가 여자를 끌고 간다? 그럼 치한이거나 원한 관계인 조폭이다. 건설 회사니까 조폭 사이에 끼는 건 너무 흔해서 영화 단골 소재다. 그럼 조폭이 자기네 근거지로 인질로 데려갔을 수도 있다. 근데, 버스로? 그건 너무 가오 상하지 않나? 뭔 놈의 조폭이 버스로 인질을 데려가나? 그리고 누나가 그렇게 그 회사의 중요 인물인가? 제일 늦게 퇴근하는 일개 경린데?’


이젠 버스란 말이 머릿속을 맴맴 돌기 시작했다. 양쪽 차로에서 차들이 시끄럽게 경적을 울려댔다. 재수는 자기도 모르게 무단횡단을 하고 있었다. 삼층 누나네 회사엔 불빛이 없었다. 뒤편 주차장엔 누나 차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본넷에 손을 얹었다.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러니까 회사에서 나와 차에 타기 전에 어디론가 끌려갔다는 것인데... 음..

그 급박한 와중에 재수는 자기가 형사가 되어 사건을 치밀하게 역 추적하는 하는 듯 착각에 빠졌다. 근데, 어디로 갔냐고. 그 버스는 뭐냐고. 왜 사람을 퇴근시간에 붐비는 버스로 끌고 가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그건 동행이지 끌려가는 게 아니잖아? 그럼 끌려간다는 게 버스가 아니라 목적지? 재수는 무릎을 탁 쳤다. 목적지라면 말이 됐다. 어느 변태 새끼가 깜깜한 밤중에 여자를 끌고 갔다면 으슥한 골목이나 야산일 수 있지만 지금은 네온 반짝이는 초저녁인 데다 여긴 도심 한복판이다. 그럼 뻔하지. 모텔!!!!

이런 개새끼 같으니라구.


재수는 골목을 달리기 시작했다. 유흥가 골목보다 좀 깊은 골목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무리 변태새끼라도 사람 많은 곳으로 끌고 가는 등신은 아닐 테니까.


‘잡히기만 하면 넌 오늘 향냄새 맡는다.’


재수는 씩씩거리며 한참을 달리다 말고 발에 급브레이크가 걸려 넘어질 뻔했다. 바로 코앞에 ‘유니버스 모텔’ 이란 네온이 나 좀 봐달라고 요란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그놈의 술’


누나는 '유니버스'라 말했을 테고 아버지는 알아듣지 못하고 익숙한 ‘버스’만 기억했을 거였다. 재수는 계단을 뛰어올라 카운터 문을 부서져라 두들겼다. 시계는 벌써 여덟 시를 향하고 있었다. 뭔 일이 나도 났을 시간이었다.


‘씨발.’


주인이 초저녁부터 잠을 처 자는지 카운터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다시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동안 온갖 소름 끼치는 상상이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추리력에 감탄을 마지못했다.


'나중에 형사나 될까?'


이윽고 카운터의 쪽문이 열리고 중년의 여자가 불쾌한 얼굴을 내밀었다. 재수는 최대한 긴급한 표정을 만들어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삼사십 분 안에 들어간 남자랑 여자 있죠. 여자는 이십 대.”

“한 쌍 있는데, 왜?”

“몇 호예요?”

“아니, 왜 그러냐구?”

“강제로 끌려간 거예요. 몇 호냐구요!”

“강제로 가는 거 같지 않던데? 그러는 학생은 누구?”

“제 누나예요. 급하니까 빨리..”


모텔에서 친누나를 찾는 동생의 얼굴에서 주인 여자는 뭘 읽었을까? 게슴츠레했던 눈이 갑자기 커진 주인 여자가 후다닥 장부를 펼쳤다.


“201호!!”

“열쇠!!”

“여기!!”


재수가 잽싸게 열쇠를 낚아챈 후 계단을 뛰어올라 문을 따고 객실 문을 쾅 열어젖히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십 초? 침대 앞에 선 남자가 놀라 돌아섰고 남자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여자. 누나였다. 재수의 상상과 달리 아직 무슨 일은 일어나지 않은 차림새였다. 재수를 본 누나는 어울리지 않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그 모습을 보니 재수의 꼭지가 돌았다.


“이런 개새끼가..”


재수의 몸이 날았다. 확실히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놈은 가슴을 붙잡고 뒤로 벌렁 자빠졌다. 재수는 놈을 무릎으로 깔고 흠씬 두들겨 팼다. 재수의 주먹질은 뒤 따라 올라온 주인 여자와 누나의 완강한 제지로 겨우 멈췄다. 집안의 골칫거리에다 누나 때문에 불화가 일어날 때마다 두들겨 패고 싶은 누나였지만 왜 그리 열이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보니 누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폭력 앞에서 무서워 그랬는지 안도감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태어나 왈가닥 누나가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봤다.


잠시 후, 놈과 재수 그리고 누나는 객실에 마련된 믹스 커피를 마셨다. 주인여자의 신고를 보류시키고 내려 보낸 후였다. 놈은 눈탱이 밤탱이가 된 얼굴 여기저기를 쓰다듬으며 제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다. 이십 대 후반이나 돼 보이는 놈은 무릎을 꿇고 앉아 고삐리인 자신에게 울먹이며 존댓말을 쓰는 걸 보고 재수는 놈에게 실제 강간 의도가 있었는지 의심됐다. 아무리 상대가 여자라도 이렇게 허약한 놈이 간 크게 모텔로 끌고 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간 누나가 너무 자존심을 긁어놓은 바람에 실제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고 대로변에서 또 면박을 당하느니 모텔로 끌고 가 가짜 고백이라도 들으면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세워질 거 같아서 한 행동이라며 용서를 구하는 놈의 얼굴에서 진심이 느껴진 건 그래서였다. 재수는 한참 어리지만 같은 남자로서 세상엔 이렇게 상 등신 같은 남자도 있구나 싶어 안쓰러웠다.


“어떡할래? 신고해?”

“됐어. 그냥 가자.”


누나는 재수와 놈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제 가방을 챙겼다.

재수는 놈에게 또 한 번 누나 앞에 나타날 땐 아예 형체를 못 알아보게 만들겠다며 느와르 영화 대사를 읊어 엄포를 놨고 그게 먹혔는지 놈은 그러겠다며 눈물을 훔쳤다.


밖에서 난리를 막고 나니 이번엔 집에서 난리가 났다.

처음엔 재수 아버지도 아무 일 없이 돌아온 것이 다행이라 여겼는지 예상처럼 길길이 날뛰지 않았다. 그러나 누나의 자뻑이 기어코 아버지 가슴에 불을 질렀다. 사건 경위를 설명하던 누나는 회사 앞 급박한 상황에서 발휘한 제 기지가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했는지, 모텔에 끌려가서도 남자를 진정시키며 시간을 끄는데도 제 영리한 머리가 빛을 냈다는 둥 어느새 제 자랑으로 이어졌다. 어떤 스토리도 결국 제 자랑으로 잇는 재능. 확실히 집안 내력이었다. 조금 전까지 위급상황인 걸 잊은 누나의 제 자랑은 남성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은 지까지 이어졌다. 그 덜떨어진 놈부터 회사뿐 아니라 가는 곳마다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 때문에 피곤하다는 것인데, 피곤은커녕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이미 누나가 선을 넘었다는 걸 안 재수는 아버지의 표정 변화만 지켜보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건만 어찌나 천연덕스럽던지 재수는 그냥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하니 아버지가 대신해 주길 바라던 차 아니나 다를까 안도한 표정으로 듣던 아버지가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결국 누나의 머리채가 낚였다.


“악! 엄마~”


재수는 고소한 웃음을 지으며 집을 나섰다.


문득 누나의 과거가 떠올라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회상에 젖어있던 재수를 다시 한번 퍼뜩 깨운 건 어머니였다.


“아! 그리고 모르는 어떤 여자 둘이 와서 너 물어보던데? ”

“....?”

“아들 군대 잘 갔냐고 묻더라. ”

“누구요?”

“모른다니까. 처음 보는 거 같기도 하고 한두 번 온 거 같기도 하고. 근데 눈 화장이 이상하더라. 뭔 화장을 그리 시커멓게 했는지 무섭더라, 야.”


켁! 돼지갈비가 목구멍에 걸려 숨이 탁 막혔다.


“천천히 먹어. 아직 시간 많어.”


어머니는 등을 두드리고 재수는 가슴을 쳤다. 재수는 가까스로 돼지갈비를 삼켰다.


“날라리네, 날라리.”


누나가 또 톡 끼어들었다.


“안 닥칠래?”


재수는 상추로 누나의 주둥이를 찰싹 때려버렸다.


“엄마. 잘 생각해 봐요. 키는 요만하지? 그리고 가방은 이따만 하고. 맞지? 그치?”

“...? 가방은 모르겠고 하여간 키는 맞는 거 같은데? 아는 여자야?”

“머리는 단발이지?”

“그래. 그렇더라.”

“둘이 왔다고?”

“그래. 친군가 보던데, 편지 잘 오냐고 묻더라.”


재수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래서. 그래서 뭐라 그랬어? 응?”

“훈련이 바쁜지 딱 한 번 받았다 그랬지. 왜?”

“그게 언제야? 오래됐어?”

“아니? 그저껜가?”


재수는 잔디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눈 화장!! 그녀였다. 그녀가 혼자 와 물어보기 뭐해서 처음 호떡을 사 먹던 날 같이 왔던 친구와 같이 온 게 분명했다. 그녀가 아직 자기를 기억하고 있다니. 그뿐 아니라 아직 자신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니.


“으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재수는 하늘을 우러러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제 어머니가 한없이 고마웠다. 만에 하나 아들 자랑한답시고 편지 자주 온다고 뻥 쳤으면 그녀는 자신을 그저 장난으로 전화번호나 따는 놈팽이로 인식하고 그대로 돌아섰을 것이다. 가감 없이 솔직한 어머니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이제 정찰대 아니라 북에 침투할 고정간첩이라도 좋았다. 재수는 그간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이 싹 가시고 깜깜했던 앞날에 한줄기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으아아~~”


괴성이 절로 나왔다.


“얘가 왜 이래?”

“저게 누구 하나 꼬시고 들어 왔구만? 쯔쯔. 앞으로 군 생활 어떻게 할래?”


재수 누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수는 얼른 몸을 일으켜 어머니께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호떡을 팔든 바지락을 까시든 장사하시면서 그 여자 지나가면 꼭 붙잡아서 말 좀 전해주십시오. 내가 쪽지를 잃어버려서 편지를 못했다고 전해주시고 주소 좀 다시 적어 달라고 해주십시오.”

“뭐? 애미더러 알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주소 달라 그러라고?”

“어머니. 지금은 알지 못하시지만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그 여자... 며느리 될지도 모릅니다.”


재수가 무릎 꿇고 전에 없던 극존칭까지 써가며 진지하게 말하자 어머니는 눈이 다시 똥그래졌다.


“아주 지랄을 하네, 지랄을. 야, 엄마가 너 때문에 쪽 팔리게 모르는 여자한테 주소 달라 그래야겠냐? 뭐? 며느리? 그 여자 손도 못 잡아 보고 짝사랑이나 하는 주제에 무슨.. 아주 웃기고 있네, 증말.”

“넌 닥치랬지.”


기어이 상추가 재수 누나 주둥이에 찰싹 달라붙었다.


“알았다. 그까짓 게 뭐 대수라고. 내 그 여자 보면 말해 줄 테니까 얼른 먹어.”


면회시간이 지나 어느새 작별의 시간이 왔다. 군대 시간은 더럽게 늦게 간다더니 상봉 시간은 군대 시간이 아닌가 보았다. 재수 어머니는 빈 그릇을 보따리에 쌀 때부터 눈물을 찔끔거렸다. 재수가 이십일 년 살면서 보아온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자, 어머니는 아들과 헤어질 때마다 울었다.


“어머니. 나 자대 가서 미친 듯이 훈련해서 금방 휴가 나갈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요.”


재수 어머니는 눈물을 감추느라 고개를 숙인 채 재수 등을 두드렸다.


“거 너무 씨게 하지 말어. 휴가 나오믄 뭐 허냐. 술이나 퍼먹지. 살살 혀.”


뻔하지. 아버지는 휴가 나오면 뜯길 용돈이 걱정일 것이다. 재수가 옆 눈으로 보자 아버지는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수는 어머니를 한 번 안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머리통 큰 후로 어머니와 포옹 한 번 못해봤다. 어머니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라기보다 자신이 쑥스러워서였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깊었는데 이상하게 어머니께 살 궂은 짓은 못하겠는 거였다. 때마침 기회가 왔다. 군대라는 장소. 수료식 후 기약 없는 이별. 안성맞춤이었다. 재수는 가만히 어머니를 안았다.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재수를 꼭 안고 혹여 얼굴을 잊어버릴까 이리저리 살피며 눈물을 흘렸다.


“다치지 말아야 한다. 응? 알았지?”

“걱정 마세요. 안 다쳐요. 다치면 휴가 못 가게? 어머니나 몸 좀 돌봐요. 누나한테 집안일 좀 시키고..”


모자 포옹이 민망했는지 딴 청 부리던 재수 누나가 고개를 홱 돌려 노려봤다.


“아니야. 너나 조심해. 윗사람들한테 밉보이지 말고 그저 네네하고 참아.”

“알았어요.”

“그리고... 어머니. 아까 제가 한 말 잊지 말고 그 여자한테 꼭 전해줘요. 그리고 곧 휴가 나올 거라고.”


이번엔 누나가 실실 쪼개며 비웃었다. 재수는 슬그머니 어머니 등 뒤로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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