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내 인생 22화

-간첩 출몰-

by 미스틱

어느덧 시월이 됐다. 저주받은 땅, 맹수부대에는 벌써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재수는 제 군화에 광을 내고 있었다. 막 일병 계급을 달고 첫 정기휴가를 가게 된 것이다. 재수는 일병 계급장을 달자마자 계획한 게 있었다. 그건 휴가 기간 동안 막노동을 해 돈을 벌겠다는 것이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등병 때 공수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월급과 함께 세 달에 한 번씩 나오는 생명수당까지 받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 월급에 휴가 기간 막노동을 해 번 돈까지 착실히 모은다면 제대 후 곧 있을 아버지 환갑잔치를 치를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형편상 어머니는 아버지 환갑잔치 따윈 그냥 넘기고 말 것이고, 아버지 역시 섭섭함을 감추고 넘어갈 게 뻔했다. 재수는 외아들이자 맏아들로서 뭔가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난번 포상 휴가 때 눈물을 흘린 어머니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어머니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해서 맨날 몸빼 바지에 앞치마를 걸치고 사신 어머니께 옷도 한 벌 사드리고 오기로 했다.

재수는 이번엔 시장으로 가지 않고 곧장 집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백수 시절 다녔던 인력 사무소로 향했다. 그리고 소장에게 다음날부터 일하겠다며 자리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제 어린애 아니니 일당 깎지 말라는 협박 겸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날 저녁, 모처럼 재수네 가족은 갈비를 구우며 오순도순 단란한 시간을 가졌다. 재수 누나는 평소엔 먹을 일 없던 갈비를 동생이 휴가 나왔다고 굽는 게 못마땅해서 뾰로통하면서도 뜯기는 열심히 뜯었다. 재수는 앞에 놓인 상추를 보고 면회 때마다 누나와 한 입씨름이 허망하기도 하고 먼 추억 같기도 해서 고기를 직접 싸 누나에게 건넸다.


“얘가 왜 이래? 너 또 뭐 아쉽지? 그치?”

“주면 그냥 받아 처먹어라. 좀.”


재수 누나는 재수가 건넨 쌈을 받아 씹으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재수 누나는 당연히 제 전화일 거라 생각했는지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덜 씹은 고기를 꿀꺽 삼키고 갑자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갑자기 딴 사람이 된 듯 상냥하게 변하는 누나의 목소리를 듣고 재수는 신기하면서도 가증스러웠다.

“네? 잠깐만요. 재수야, 너 찾는데?”


응? 이상했다. 막노동을 뛰기 위해 자신의 휴가를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자신을 찾을 사람은 없었다.


“노재수씬가요?”

“네. 그렇지 말입니다.”

“아, 여기 잠실 파출손 데요. 혹시 조 규식 씨라고 아십니까?”


조 규식... 응? 조 중사? 재수는 순간 예의 그 느낌에 사로잡혔다. 뭔가 황당하고 안 좋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드는 그 느낌.


“아, 네. 저희 소대장이신데, 왜..?”

“아, 그래요? 잠실역에서 신고가 들어와 일단 저희가 모시고 있습니다만..”
“신고요?”
“아, 그게 이 분이... 그니까 시민분이 수상한 사람이 역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다고.. 간첩 같다고 신고가 들어왔거든요. 일단 신분 확인됐으니 내보내겠습니다만, 길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아.. 그럼 제가 가겠습니다.”


재수는 전화를 끊고 튀어 나갔다.


‘이 미친 또라이가 서울엔 웬일이지? 친구 만나러 왔다가 길을 잃었나?’


충분히 그럴 만했다. 머리가 웬만큼 돌대가리여야 말이지. 그나저나 이 불길한 예감은 뭐지?

파출소에 들어서자 진짜 간첩이 빙긋이 웃으며 재수를 맞이했다. 북 괴뢰군같이 새로 깎은 각진 상고머리, 쌀쌀한 가을날에 줄무늬 반팔 남방, 쓰봉이라 부를만한 여름 양복바지를 배꼽까지 올려 입고 서 있는 꼴이 영락없이 북한군이 사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재수는 그 모습이 엽기적이어서 경례도 잊고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조 중사는 경찰들에게 각진 경례를 하고는 재수를 향해 다시 한번 씩 웃었다. 소름이 끼쳤다. 경찰들도 얼떨결에 어정쩡한 거수경례를 하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소대장님이 서울엔 어쩐 일로..”

“아. 너 휴가 나갔으니 니 부모님 얼굴 보고 인사나 드리려고 왔지.”

‘씨발.’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휴가 나온 자신의 부모님을 보러 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조 중사를 보고 재수는 대체 저 머리통엔 뭐가 들었을까, 설마 뇌일까 궁금했다.


‘다 큰 젊은이들을 끌고 가 놓고 이제 가정방문을 한단 말인가? 군대가 국민학교야? 미친 또라이 같으니라구.’

필시 부모님은 핑계고 누나를 보러 온 것이 뻔했지만, 그렇다고 서울까지 온 소대장을 그 자리에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소대장이자 모든 특수 훈련의 교관이었다. 만일 그랬다간 안 그래도 힘든 부대 생활과 훈련이 지옥으로 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재수는 조 중사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승객들이 자꾸만 힐끔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조 중사는 승객들의 시선을 아예 못 느끼는지, 자꾸만 재수 곁으로 와 친한 척을 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조 중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서자 부모님은 조 중사를 몰라보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멀뚱히 쳐다봤다. 재수가 소대장이라고 말하자 부모님은 그제야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고, 재수 누나는 조 중사의 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날 저녁 재수 어머니는 정육점으로 뛰어가 갈비를 두 근 더 샀고, 재수는 슈퍼로 달려가 패스포트 양주를 사서 나오다, 조 중사 같은 놈에게 패스포트는 너무 과하다 싶어 가장 싸구려 양주인 ‘캡틴 큐’로 바꾸고 집으로 달렸다. 소대장이니 캡틴이 맞지, 뭐.

술자리는 밤이 깊어도 끝날 줄 몰랐다. 재수 아버지는 소대장이 뭔지, 부대장이 뭔지, 계급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그저 재수의 군 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조 중사의 잔이 빌 새 없이 술을 따랐고, 재수 어머니는 과일까지 깎아 먹기 좋게 이쑤시개까지 꽂아 대령했다. 다만, 재수 누나만 조 중사의 끈적이는 눈길을 피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일병 주제에 소대장을 이런저런 핑계로 돌려보낼 수도 없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데려왔지만, 재수는 파출소를 나서면서부터 이 또라이를 어떻게 돌려보낼까만 생각했다. 평소에도 눈치 없기로 유명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조 중사는 적당히 먹고 돌아갈 인간이 아니었다. 아예 자고 갈 생각을 하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재수는 군대에서 굳은 두뇌를 오랜만에 고속 회전시켰다.

일단 누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친구와의 약속을 핑계로 빠져나가라고 일렀다. 그리고 나갈 때 모레나 들어올 거라 큰 소리로 말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부엌으로 불러 현 상황을 설명한 후, 누나의 거짓말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반응을 보이라고 귀띔했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밖으로 나오라고 아무리 눈짓을 해도 쟤가 왜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눈만 껌벅이다 다시 조 중사에게 자기 인생 얘기를 풀고 있었다. 재수는 속이 터지는 걸 가까스로 누르고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그리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누나가 전화를 받았고, 재수의 작전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아버지 친구로부터 전화 왔다는 거짓말로 재수와 재수 아버지를 전화 연결 시켰다. 비록 군대 갔다 온 사람 하나 없는 가문이지만, 눈치와 상황 대처능력은 역대급 가문이었다.

“아부지. 잘 들으시오 잉?”


재수가 아버지한테 전라도 사투리를 쓸 때는 뭔가 다급할 때와 아버지가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린 다음 날 아침뿐이었다. 그럴 때 재수 아버지는 전날의 잘못에 기를 못 펴고 아들이 훈계하듯 나무라도 먼 산 보듯 담배만 뻐끔뻐끔했다.


“아부지가 시방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디, 소대장이 온 건 나 때문이 아니라 누나 볼라고 온 것이요. 누나 꼬실라고 온 것이란 말이요. 알겄소? 긍께 술 그만 허고 얼릉 보내시란 말이요. 누나를 저런 촌놈한테 보낼라요? 저놈이 얼마나 무식하고 우악스런 놈인 줄 아시오?”

“뭐시여? 내 딸을?”

“아따!! 아부지. 지금 그 말을 하면 어쩐다요? 환장하겄네.”

재수 아버지는 딸을 노린다는 말에 겨우 술이 깬 것 같았다.


“어이, 알았네. 친구. 그라믄 조만간 선보는 자릴 함 만드세. 그려, 그려. 어이 고맙네. 들어가게.”

역시 집안 내력이었다.

재수는 아버지가 소싯적 범생이 과가 아니었다는 걸 짐작으로 알고 있었다. 순간의 눈치로 상황을 파악하고, 기민하게 대처하는 능력이나 천연덕스럽게 능청 떨 때마다 자신처럼 날라리 과였을 거라 믿어왔다. 그러니 지금 제 아버지의 반사적 반응은 재수의 믿음에 확신을 줄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역시 아버지에게 딸은 금쪽같은 존재구나 싶어 살짝 서운함도 들었다.


재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집으로 뛰어가며 아버지 말을 들은 조 중사의 표정을 상상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앉아 조 중사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조 중사의 잔뜩 들떴던 얼굴에 맥이 쪽 빠져 있었다. 이윽고 재수 누나가 친구들과 약속을 핑계로 일어나자 조 중사의 시커먼 얼굴에 실망이 짙게 배어났다. 그런데 재수 누나가 모레나 들어온다고 말하고는 방을 나서려는 순간, 재수 아버지가 고춧가루를 뿌리고 말았다.

“뭐여? 외박을 한다고? 어디 다 큰 년이...”


재수는 아차 싶었다. 전화로 미처 세부 계획까지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짝!!!’


결국 재수 어머니의 강 스매싱이 재수 아버지의 등짝에 꽂혔다.

“으이구. 이 양반이 취해가지고는.. 어제 미리 다 얘기했잖아요. 당신도 허락해 놓고. 어제도 취해서 기억이 안 나지요?”


그러면서 재수 아버지 허벅지를 있는 힘껏 꼬집었다. 역시 구원투수에 마무리는 늘 어머니였다.

“아! 그랬지, 그랬지. 자네 말이 맞네 그려. 하이고. 이노무 술을 끊든가 해야지 원.."

상황을 눈치챈 재수 아버지도 언제 그랬냐는 얼굴로 조심히 갔다 오라며 재수 누나에게 손짓까지 했다.

“그나저나 귀하신 손님인데 편하게 재우고 보내드려야 하는데, 저희 사는 꼴이 이래 가지고...”

“아닙니다. 사실 저도 가볼 데가 있어서..”


맞선 얘기에다 이제 재수 누나도 없는 자리가 되자 조 중사는 세상 침울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그리고 어깨를 떨어뜨린 채 꾸벅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재수는 집 앞 골목까지 배웅을 했고, 조 중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라는 손짓만 한 뒤 골목을 맥없이 걸어 사라졌다. 그렇게 한밤에 첩보영화 같은 작전이 펼쳐진 후 상황이 종료됐다. 재수는 모처럼 죽이 척척 맞는 제 가족을 보고 돈만 아니면 뭐가 돼도 됐을 집안이라 생각됐다. 누나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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