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내 인생 23화

-김 소위-

by 미스틱

겨울이 지나고 다음 해 늦여름, 재수가 상병 계급장을 달았을 때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재수네 가족이 누나와 결혼을 할 남자를 데리고 면회를 왔는데, 재수 아버지 친구분이 선을 주선했다는 것이다. 조 중사가 집에 쳐들어왔을 때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 한 거짓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재수는 누나를 빤히 쳐다봤다. 거짓말이 현실이 된 게 희한해서만은 아니었다. 집안 골칫거리에다 손에 물 한 번 묻히기를 하나, 상냥하기를 하나. 재수는 왈패에 성질까지 드러운 제 누나를 어느 미친놈이 데려갈까 늘 궁금했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의 누나는 다소곳하게 앉아 직접 그릇을 놓고, 고기를 구워 담고, 과일을 깎고, 심지어 목소리까지 상냥하게 바뀌어 있었다. 재수는 이 모든 것이 가증스러웠는데, 가만 보니 가식만은 아닌 것이 그 표정에서 진정성이 보였다. 역시 사랑의 힘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 생각됐다. 신랑 될 사람은 점잖고 반듯한 인상이어서, 재수는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 아니, 짚신이 구두를 만난 것 같았다.


그리고 일주일 후.

누나의 결혼식을 이유로 휴가를 갔다 온 후, 재수의 군 생활은 더욱 꼬여버렸다. 재수 누나의 결혼 소식을 들은 조 중사의 갈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젠 훈련 때 남들 다 쉬는 동안 재수가 속한 조만 굴린다거나, 얼차려 때도 엎드려뻗쳐 있는 재수 등에 팔짱을 끼고 앉아 무게를 더 하는 식이었다. 무식하고 눈치 없는 조 중사는 재수를 특별 대우할 때도 노골적으로 하더니, 갈굴 때도 노골적으로 특별 대우했다. 재수는 소대장이 바뀌길 매일 밤 기도했다. 안되면 훈련 교관만이라도 바뀌길 기도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보초 근무 때마다 재수를 괴롭히던 사수 김 병장이 정찰 훈련 중, 밤에 라면을 사러 민가로 내려가다 낭떠러지에서 굴러 허리가 부러져 후송됐고, 또 그날 재수네 소대장이 새로 부임했다. 김 병장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있는 정찰 훈련 때마다 뺀질 대느라 허구한 날 의무대로 빠졌으니, 재수도 다 아는 산속 지리를 몰라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유 없이 소대장이 바뀐 건 그야말로 하늘이 도우사였다.


그는 육사 출신 김 소위였는데, 육사 출신이라 그런지 확실히 전술에 밝았으며 특히, 대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합리적이었다. 훈련 때는 엄하고 카리스마 넘쳤지만, 내무생활 땐 어찌나 따뜻하게 대했는지 재수는 어떤 때는 그가 친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제로 김 소위는 재수를 동생처럼 대한 일이 있었다.


힘든 부대 생활 중 위로가 되는 것들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도둑라면이었다. 물론 쫄따구 때는 마음씨 좋은 고참과 보초를 서야 그 맛을 볼 수 있었지만, 고참들은 야간 보초를 서고 들어와 창고 뒤에 숨어서 반합에 라면을 끓여 먹는 게 일종의 관례처럼 굳어있었다. 재수도 이등병 때 땅구덩이 속에서 그 라면 맛을 보고 기절할 뻔했었다. 그래봤자 반합에 라면 다섯 개를 부셔 넣고 끓이는 거라, 끓였다기보다 불려서 먹는 거였는데, 희한하게도 병장 정도 되는 고참들이나 다섯 개를 넣고 끓이지, 짬밥이 부족하면 라면 세 개만 넣어도 국물이 넘쳐 버너 불을 꺼먹기 십상이었다. 짬밥이 적으면 국물이 넘치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국물이 넘쳐 버너불을 꺼먹는 쫄따구는 피할 수 없이 헬멧으로 머리통을 얻어맞았다. 국물도 아깝고, 한번 껐다 다시 끓이면 맛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재수는 처음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끓이기보다 불려 먹는다고 해야 할 라면 맛이 불 잠깐 꺼졌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건지, 쫄따구를 괴롭히기 위한 괜한 트집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재수도 머리통을 맞아가며 수차례 끓여보니 진짜 맛이 미묘하게 달랐다. 역시 군대 짬밥은 무시할 게 아니라 생각했다.


정찰대는 라면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정찰 훈련 시 비트를 파고 땅속에 들어가서도 전투식량 대신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이 다반사라 출동 시 군장 검사가 이뤄졌는데, 라면이 발각되는 순간 개박살 날 일이라 고참들은 군장 속 수많은 전투품 안에 혀를 내두를 만큼 교묘한 수법으로 라면을 숨겼으며, 군장, 방독면, 판초우의, 침낭, 건빵 주머니, 하다못해 허리에 테이프로 붙이기까지, 출동 당일 날 군장 검사를 하는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 숨기는 곳을 달리했다. 짬밥으로 지휘관의 군장 검사 성향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수 없게 철저한 지휘관을 만나 미리 챙기지 못했을 땐, 야밤에 마을로 내려가 문닫힌 구멍가게를 두드려서라도 사 왔고, 그러다 헌병이나 순찰관에게 걸리면 군기 교육대 행이지만, 그런 위험 정도는 사뿐히 즈려밟을 정도로 만큼 라면을 사랑했다.


그날도 재수가 새벽 보초를 서고 돌아온 길이었다. 재수는 같이 보초 선 이등병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싶었다. 재수도 상병 4호봉이니 그 정도는 해도 되는 짬밥이었다. 그런데 관물대엔 숨겨 놓은 라면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전날 내무반 검열이 있어서 고참들이 죄다 회수해서 먹어치운 걸 깜박했던 것이다. 낭패였다. 옆의 이등병에게 잔뜩 기대를 불어넣고는 라면이 없어서 못 끓여준다는 건 고참으로서 무척 가오 상하는 일이었다. 당황한 재수는 간부식당을 털기로 했다. 사병은 몰래 숨어서 먹어야 했지만, 간부들은 식당에서 간식으로 무척, 자주, 툭하면 먹는 걸 재수는 알고 있었다. 재수는 불침번의 눈을 피해 이등병을 데리고 간부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간부식당을 뒤졌다. 후레쉬를 켤 수도 없어서 장님처럼 이곳저곳 더듬더듬 뒤져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뒤졌을까. 재수의 손에 박스 안 라면 봉지가 잡혔다. 그때 촉감은 전기가 흐르듯 짜릿했다. 재수는 라면 다섯 봉지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했다. 어차피 숨어서 먹는 거 꼭 창고 뒤에서 먹어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이왕 도둑라면 먹는 거 대담하게 먹겠다고 생각한 재수는 그냥 간부식당에서 끓여 먹기로 하고 버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내친김에 수통에 있는 물 대신 식당 수돗물로 반합을 채웠다. 촥~ 시원하게 쏟아지는 수돗물을 보며 재수는 자신의 대담함에 감탄 어린 표정을 하고 있을 이등병을 상상했다. 라면 다섯 개를 부셔 넣으면서도 이등병이 자신의 라면 짬밥에 침을 질질 흘릴 것을 상상했다.


그런데..

라면이 보글보글 끓고, 입맛을 다시며 젓가락을 쫙! 찢는 동시에 주위가 번쩍! 눈 부시게 환해졌다. 둘은 양손으로 젓가락을 벌린 채 그대로 얼음이 됐다. 그리고 뚜벅뚜벅 군화 소리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던 듯 지체 없이 가까워지더니 그들 앞에서 딱 멈췄다. 재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위를 봤다. 김 소위였다.

‘....’


재수는 그간 정성껏 쌓아 온 돌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간 김 소위는 훈련 성적 1위에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후임을 괴롭히지도 않으며 착실한 내무생활을 한 재수에게 남다른 신뢰를 보여왔다. 재수 역시 그런 김 소위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더욱 훈련에 열심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게 한 번에 무너지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재수가 이제 모든 게 다 망했음을 깨닫고 철퍼덕 주저앉은 순간, 김 소위는 버너를 통째로 들더니 식당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재수는 멍하니 김 소위를 바라봤다.

“뭐 해. 얼른 먹어. 나도 젓가락 하나 주고.”


그제야 재수는 이 시추에이션이 뭔지 모르지만, 좆 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젓가락을 건네고, 그때까지 얼음처럼 굳어 있던 이등병을 일으켜 세워 앉히고 김 소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김 소위는 아무 말 없이 젓가락으로 라면 한 다발을 입에 넣었다.

“오우~ 잘 끓였네. 상병 짬밥에 이 정도라니. 역시 노 상병이야. 뭐 해? 얼른 먹어.”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는 재수와 이등병은 조심스럽게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김 소위는 딱 두 젓가락 먹더니 젓가락을 내려놓고 재수와 이등병이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야. 니들, 그렇게 배고프냐?”

“그게 말입니다. 군대에선 왜 이리 배가 고픈지 모르겠지 말입니다.”


사실 배가 고파서 먹는 게 아니라, 스릴 넘치는 도둑 라면이 맛있어서 먹는 거였지만,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김 소위가 그 사정을 모를 거 같아서 재수는 너스레를 떨었다. 현 상황상 김 소위에게는 그래도 될 거 같았다.

“근데 소대장님은 오늘 웬일이십니까? 당직도 아니시지 말입니다?”

“오늘 당직사관 와이프가 출산한다고 해서 대타 근무 나왔다.”

“아, 그렇습니까? 순산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재수는 마음에도 없는 설레발까지 쳤다.

“근데, 야 임마들아. 몰래 먹겠다고 숨어 먹으면서 수돗물 소리까지 내고 먹냐?”


말은 나무라고 있지만, 김 소위는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띠고 있어서 재수는 더는 너스레도 설레발도 치지 못했다. 김 소위의 너그러움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어제 내무반 검열했는데 라면은 어디서 났어? 니들 혹시 숨기는 장소가 나 모르는 곳이 또 있냐?”

“아니지 말입니다. 그런데 없지 말입니다.”

“그럼 이 라면은 어디서 났어?”

“...그게... 저기서...”


재수는 고개를 숙인 채 냉장고 위 라면 박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어쭈. 이것들이 감히 간부식당을 털어? 우하하. 노 상병. 너 간 큰 건 알아줘야겠다. 얼른 먹고 깔끔히 뒷정리해.”


사병은 간부 식당에 출입 자체가 금지였건만, 김 소위는 나무라기는커녕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그 일이 있던 주말 토요일, 김 소위는 재수와 이등병을 데리고 지프차에 올랐다. 그리고 십여 분을 달려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허름한 단층 가옥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김 소위가 사는 집이라는 건 방 안에서 그들을 반겨준 김 소위의 아내를 보고 나서였다. 방안엔 이미 한상 가득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재수는 며칠 전 배가 고프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간부식당의 일이 떠올랐다. 재수는 양심이 찔려서인지, 감동해서였는지, 가슴 한구석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차오름을 느꼈다. 김 소위의 아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을 밥그릇 가득 채워 줄 때는 너무 울컥해 심호흡까지 해야 했다. 장교들은 왠지 모르게 삐까뻔쩍한 좋은 집에 사는 줄 알았는데, 소박하다 못해 허름하기까지 한 김 소위의 집을 다시 둘러본 재수는 멀게만 느껴졌던 장교도 처지가 별반 다름없어 보여서 처음으로 같은 군바리라는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항상 합리적이고 따뜻한 김 소위가 친형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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