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어느덧 재수는 두 번째 정기 휴가를 맞이했다.
그간 휴가 때마다 그녀를 기다리고, 조 중사 때문에, 또 막노동을 하느라 제대로 휴가를 보낸 적 없는 재수는 이번 정기휴가 중 며칠만은 진짜 군바리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집에 와 그렇게 하려니 할 게 없었다. 친구 놈들 만나 봤자 술이나 퍼마실 게 뻔하고, 이제 군대 얘기도 친구 놈들이 지겨워했다. 그러다 제대한 고참 중 한 명이 휴가 나오면 남대문 시장으로 놀러 오라고 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백 병장이었는데, 남대문에서 옷 도매 장사를 한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장사를 한 탓인지 그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입대 전 논 썰을 들어보아도 보통의 고참들과 훨씬 담대했고, 직접 돈을 굴린 탓인지 술을 먹어도 선술집이나 호프집이 아니라 룸살롱에서 먹는다고 했다. 스탠드바 기도를 서는 형들도 많이 알고 있다고도 했다. 재수도 날라리였지만, 그저 어디 숨어서 담배나 피우고, 건드리는 놈이나 패고 다녔지, 룸살롱이니 스탠드바니 하는 곳은 근처에도 못 가봤다. 휴가 갔다 온 고참들이 어느 룸살롱에서 술을 먹었다느니 어느 집 아가씨가 정말 예쁘다느니 휴가 썰을 풀 때도 재수는 부러워한 적이 없었다. 저급하고 부러 군바리 티를 내는 것 같아 같은 군바리로서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엔 한 번 가보고 싶어졌다. 노는 김에 좀 화끈하고 어른스럽게 놀아 보고 싶었다. 왜일까? 곧 병장을 달 상병 말호봉이니 어른이 됐다고 생각됐을까? 아니면 진짜 군대 짬밥이 자신을 어쩔 수 없는 군바리로 만든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 욕망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복잡해지자 재수는 그냥 왠지 군바리는 좀 그래도 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힘들게 군생활 했으니 저급하더라도 그 정도 보상은 받아도 된다고 자기 합리화를 했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재수는 대문을 박차고 나왔다.
재수는 남대문시장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시장이라면 청담시장과 똑같을 줄 알았는데, 청담시장이 구멍가게라면 남대문 시장은 대형마트였다. 걷기가 힘들 정도로 사람으로 북적일 뿐 아니라 뭔 놈의 옷가게가 그리 많은지, 또 가게마다 젊은 여자들은 왜 그리 많은지, 군바리인 재수는 여자들에게 눈이 쏠린 채로 걷느라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백 병장이 일러준 대로 제대로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스치는 여자들의 향수 냄새에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이 일었다. 그러다 문득, 이 여자 저 여자 힐끔거리는 제 모습이 낯설고 저열하게 느껴져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기껏 자기 합리화를 하고 호기롭게 대문을 박차고 나왔지만,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갈등이 지속됐었다. 그렇게 군대를 혐오하고, 쫄따구 대하기를 개 취급하고 병정놀이에 취해 스스로 인간 위신을 저버리는 군바리들을 증오했건만, 결국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들과 같은 군바리라고 인정해 버린 거 같아서였다. 그리고 막상 제 저급한 욕망을 풀 길에 들어서자 기어이 자괴감이 불쑥 고개를 들어버린 것이다. 곧바로 백 병장이 룸살롱이나 스탠드바에 데려가 주길 바랐던 제 모습이 부끄러울 뿐 아니라 비참하게 느껴졌다. 날라리 시절에도 더 삐딱한 길로 들어서는 골목을 늘 지키고 계셨던 어머니가 또 떠오른 것도 자괴감을 부추겼다. 어머니는 시장바닥에 앉아 고생하시고 있는데 아들이란 놈은 유흥업소에 가려고 길을 헤매고 있다니.
‘미친놈’
재수는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다시 방향을 틀었다. 그냥 오늘은 집에서 영화나 보고 다음날부터 막노동을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런데 자신이 어느 길로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골목이 하도 미로처럼 얽혀 있는 데다 여자들한테 한눈팔고 걸어서 더욱 그랬다. 표지판을 살펴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표지판에 쓰여있는 지명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찰대에서 배운, 지도를 판독하는 독도법도 지도가 없는 이상 무용지물이었다. 재수가 큰길로 가는 방향을 찾느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재수의 머리를 툭 쳤다. 머리 맞는 걸 제일 싫어하는 재수가 도끼눈으로 돌아봤다. 그런데.. 젠장. 앞에 백 병장이 반갑게 웃고 있었다.
“여~ 노재수.”
“아~참 머리는 좀 때리지 말지 말입니다!!”
재수는 눈에 힘을 주었다. 왜 남들은 최 병장, 김 상병, 이 일병 직급으로 부르면서 유독 자기만 이름으로 부르는지 부아도 났다.
“잘 찾아왔네? 잘 왔다. 내가 얼른 옷 갈아입고 와서 기가 막힌 데 데려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너 오늘 홍콩 가는 날이야, 임마.”
백 병장은 그렇게 제 할 말만 마치고 바로 앞 건물 이 층으로 올라갔다.
‘홍콩?’
재수는 말로만 듣던 퇴폐 영업소를 데려가는 건 아닌지 걱정부터 들었다. 하필 멈춰 선 곳이 백 병장네 가게 앞이었다니. 좀 더 일찍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걸 후회했다.
백 병장네 가게는 옷가게라기보다 옷 공장에 가까웠다. 백 평은 됨직한 넓은 매장 앞쪽엔 갖가지 옷들이 걸려 있고, 중앙 매대에는 만들다 만 것 같은 옷들이 널려 있었다. 아마도 직접 옷을 만드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제 고참인 백 병장을 바람 맞히고 그냥 집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돼버려 난처해진 재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슬기롭게 빠져나갈까 고민했다. 그냥 얼굴이나 보러 왔다며 차나 마시자고 할까? 그러나 찻집을 갈 백 병장이 아니었다. 아니면 옷이나 사러 왔다고 할까?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 서성이던 중 매장 안쪽에서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생김새가 비슷한 게, 아마도 백 병장의 아버지 같았다. 그는 옷을 뒤집어도 보고 펼쳐 자신의 몸에 갖다 대기도 하며 앞의 두 여자에게 의논하듯 뭔가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그때, 손님일 거라 생각한 그 여자들 중 한 여자가 눈에 번쩍 띄었다. 갑자기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단발머리에 작은 어깨, 짙은 눈썹 화장. 멀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 그녀만의 그 독특한 분위기,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미리 느껴지는 알 수 없이 흥분된 기분.
‘아.’
재수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졌다. 재수의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무작정 매장 안으로 들어가 붐비는 사람들은 헤치고 곧장 그녀에게로 달려가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 뒤에 서서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여자의 어깨를 조심히 건드렸다. 그리고 놀라 돌아선 얼굴. 맞았다. 그녀였다. 그토록 찾고 기다리던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조금 성숙해진 느낌 말고는 1년 반 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토록 애타게, 시커멓게 마음 썩어가며 기다린 그녀를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박박 기어 겨우 따 낸 두 번의 휴가를 그녀만 기다리다 허무하게 보냈건만, 이런 엉뚱한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니, 재수는 가슴이 쿵쾅거리면서도 왠지 허망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저 기억나세요? 호떡집...”
놀란 눈으로 재수를 빤히 보던 그녀는 이내 원망의 눈빛이 되어 고개를 홱 돌리고는 다시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옆에 있던 여자는 재수를 오래전부터 알았다는 듯 배시시 웃고 있었다. 호떡집에 처음으로 그녀가 들어온 날 옆에 있던 그 여자였다.
“저.. 잠깐 얘기 좀..”
“저, 지금 바빠요.”
재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녀의 싸늘한 목소리에 다시 한번 낙담했지만, 천재일우로 만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몇 시간이고 기다릴 테니 일 보세요. 저 요 앞에 있을 게요.”
밖으로 나와 매장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재수는 흥분에 휩싸임과 동시에 그녀의 싸늘한 반응이 불안해 안절부절못했다.
‘그래. 라사라 복장학원. 이제 디자이너가 되어 이곳에 납품하러 왔구나.’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 했던가? 그렇게 기다렸건만, 이제 영영 못 보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곳에서, 군대 고참 만나러 왔다가 돌아가려는 순간 백 병장이 자신을 발견하고, 때문에 그녀를 보게 되다니. 재수는 그녀가 언제고 어떻게든 만날 운명 같은 여자로 느껴졌다. 그때 백 병장이 하얀 빽바지 차림에 머리에 무스를 잔뜩 바르고 내려왔다. 삼류 영화에서 본 제비 같았다.
“가자.”
“저 백 병장님. 오늘은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뭐? 그럼 왜 왔어, 임마.”
“아니, 그게.. 지금 막 급한 일이 생겨서...”
쩔쩔매며 사정하는 동안 그녀가 친구와 함께 재수에게로 왔다. 몇 시간이고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일을 마쳤나 보았다.
“무슨 할 말 있으세요?”
그녀가 재수를 빤히 보며 차갑게 물었다. 친구는 아직도 얼굴에 웃음기를 띄고 있었다.
“저 여기서는 좀 그렇고. 어디 찻집이라도 가시죠.”
백 병장은 재수와 그녀들을 번갈아 보다 또 재수의 뒤통수를 탁 쳤다.
“이 새끼. 그새 꼬셨냐? 이게 은근 능력 좋네? 그래, 잘했다. 둘둘, 딱 좋네. 자, 갑시다.”
백 병장에게 뒤통수를 또 맞은 데다 무례하게 끼어드는 꼴에 재수는 울화가 치밀었다. 게다가 그녀를 시장바닥에서 꼬신 여자쯤으로 취급하는 걸 보고 결국 재수의 꼭지 임계점이 무너졌다.
“에이 씨. 내가 머리 때리지 말라고 했지?”
군대에서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백 병장은 이제 싸제인이다. 그리고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도 아니고 그지 같은 정찰대 출신 싸제인이다. 재수의 서슬에 움찔한 백 병장은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야. 노재수. 왜 그래. 같이 한잔하러 가자는데.”
“백 병장님. 이 분들 꼬신 여자들 아니구요. 제겐 중요한 분들이고 저희끼리 할 말이 있으니까 좀 빠지세요.”
재수는 그녀 앞에서 투박한 군바리 티를 안 내려고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최대한 공손히, 그러나 무게를 실어 말했다. 그녀들 앞에서 쫄따구 취급당하는 모습을 여지없이 보인 데다, 그녀들을 뻘쭘히 서 있게 만든 미안함과 조급함이 겹쳐 마음이 복잡했다. 혹시나 그녀들이 자신과 백 병장 때문에 그냥 가버릴 것만 같아서 마음이 더 조급했다.
“가지죠. 여기 어디 조용한 찻집이 있을 거예요.”
재수는 멍청한 표정이 된 백 병장을 외면하고 서둘러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그녀는 재수의 팔을 슬그머니 풀더니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희한한 건 그녀의 친구가 재수의 팔을 잡고 끌다시피 걷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 남녀가 그렇게 시장을 벗어나는 모습을 백 병장은 멍한 얼굴로 서서 바라봤다.
그녀와 친구가 재수를 데리고 들어간 곳은 시장 밖 대로변에 있는 전통 찻집이었다. 입구에서부터 한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부대 종교 행사로 외출했을 때 고참이 다방에서 사 준 쌍화차 냄새 같았다. 찻집은 아늑하고 조용했다. 그녀는 창가에 자리 잡고 앉더니 재수에게 눈길도 안 주고 말없이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반면, 친구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재수에게 메뉴판을 펼쳐 내밀었다.
“아. 저는 그냥 쌍화차...”
친구가 쿡 하고 웃었다.
‘이게 아닌가? 딴 건 아는 게 없는데.’
재수는 당황해서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그러는 사이 친구는 쌍화차 한 잔과 이름 모를 차 두 잔을 주문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뭐부터 얘기해야 하지? 어디서부터 얘기할까?’
재수의 급한 마음과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주문한 차가 나올 때까지 말 없는 어색함만 그들 사이를 꽉 채우고 있었다.
“군 생활은 잘하고 계세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친근하고 다정한 느낌의 목소리. 친구는 자신에 대해 뭔가 아는 느낌이었다. 왜 어떻게 나를 알지? 그녀가 내 얘길 했을까?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친구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 줬다는 게 고마울 뿐이었다.
“아, 저 말입니까? 예. 이제 상병 4호봉이지 말입니다.”
재수는 그녀 앞에서 표준어를 쓰려고 했는데, 친구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준 바람에 일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입에 배어버린 군대 말투가 튀어나왔다. 친구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나 재수가 온통 신경을 쏟고 있는 그녀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저, 사실 입대 전날 주신 쪽지를 잃어버렸지 말입니다.”
재수가 고개 숙인 채 한 맺힌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그녀는 재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친구의 표정에서도 웃음기가 싹 가셨다.
“입대하면서 얼마나 원통했는지.. 그 후로 휴가를 두 번 나와서 계속 호떡집 자리에서 기다렸지 말입니다. 매일, 하루종일...”
그쯤에서 재수는 목이 메어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그래서 뜨거운 쌍화차를 후루룩 마셨다. 갑자기 혀와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목을 쥐어뜯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어머. 그 뜨거운 걸...”
친구는 얼른 물을 건넸다. 재수는 친구가 건넨 물을 허겁지겁 들이켜자 좀 살 거 같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치를 슬며시 살폈다. 확실히 아까보다 풀어진 얼굴이었지만, 아직도 아무 말 없이 찻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면, 친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재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창피했지만 지금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마음고생 많으셨겠어요.”
“네. 진짜 마음 아팠지 말입니다.”
“사실, 우리 정음이도 그간..”
“지수야. 넌 좀 가만있어.”
그녀가 처음으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이제 자신에게 아예 일말의 기대도 없어진 걸까? 그녀가 뿜어내는 냉기에 재수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면서도 그녀 이름은 정음, 친구의 이름은 지수, 둘 다 참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제 이름은 재숩니다. 노재수.”
차가운 분위기를 깨고 싶었다. 그래서 웃으라고 일부러 묻지도 않은 제 이름을 밝혔다. 그러나 그녀들은 웃지 않았다.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군대에선 다 웃었는데. 역시 예쁜 만큼 교양 있는 그녀들이었다.
“그 소중한 쪽지를 잃어버린 건 제 불찰이지만, 어떻게든 빨리 휴가 나와서 편지 못 한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지 말입니다. 그래서 포상휴가가 걸린 훈련이란 훈련은 다 지원했지 말입니다. 이 악물고 훈련받고, 휴가 따내서 그때마다 거기 시장에 서 있었지 말입니다. 정음 씨 보려고... 사격 훈련 때는 눈두덩이가... ”
“이유야 어쨌든 연락이 안 되면 그냥 잊고 말지, 뭐 하러 그렇게 애쓰면서 저를 만나려 한 거예요?”
재수는 설명하고 싶었다. 그간 얼마나 자책하고, 당신을 보기 위해 얼마나 기를 썼는지. 그 지옥 같은 훈련을 당신을 보기 위해 이 악물고 덤볐다고. 하루하루 당신만 생각하며 겨우겨우 잠들었다고. 그러나 그녀가 재수의 말을 막으며 두 번째로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나 표정이 싸늘한 건 변하지 않았다.
“세상에. 휴가 나와서 거기서 계속 기다렸단 말이에요? 두 번이나?”
지수가 놀란 눈으로 재수를 보며 말했다.
“처음 봤을 때 제 심정이 어땠는지 모르시지 말입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잠도 못 잤지 말입니다. 그리고 한 달을 정음 씨 지나가는 것만 보고 마음 졸였지 말입니다. 그리고 입대 전날 죽을 용기를 내서...”
또 재수는 설명하고 싶었다. 얼마나 짝사랑했는지. 그런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을 전달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재수는 답답했다. 그래서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 지수가 또 어색함을 깨뜨려 주었다.
“우리 군인 아저씨. 순수한 구석이 있네.”
지수의 말에 재수는 뜨끔했다. 순수라니. 처음 들어 본 말이었다. 재수는 학창 시절에도 날라리 소리만 들었지 순수하단 말은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래서 어쩌고 싶으신 거예요?”
정음이 아직 냉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버스 정류장에서 말씀드린 대로 편지라도 주고받고 싶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 저 휴가 나오면 음악다방 데려가신다고..”
그때, 정음이 피식 웃었다. 그건 마치 커다란 빙산이 우르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막상 말해 놓고 보니 민망해서 쌍화차를 후루룩 마셨다. 이제 식은 쌍화차는 다시 군대 다방을 상기시켰다.
“저, 제대하려면 아직 244일이나 남았지 말입니다. 앞으로 힘든 훈련도 많이 남았고 해서 정음 씨와 편지라도 주고받을 수 있다면 더 씩씩하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말입니다. 그동안 버틴 것도...”
“알았어요. 일어나요.”
뭘 알았다는 건지, 왜 벌써 일어나자는 건지, 재수는 또다시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의 입장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까? 그간 편지 못 한 이유를 설명했건만, 아직 화를 풀지 못한 걸까? 정음은 벌써 계산대에 서 있었고 지수는 엉거주춤 일어서는 재수를 빙그레 웃음으로 바라봤다.
셋은 남대문 시장에서 남영역까지 걸었다. 앞서 걷는 두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지금 정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재수는 그저 말없이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수가 계속 뭐라 속삭였지만, 정음은 대꾸 없이 땅만 보며 걸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청파동 위로 노을이 드리워졌다. 군대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노을이었다. 아니, 군대에서도 노을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미처 못 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서울에서 노을을 보니 모래가 꽉 들어찬 듯 삭막한 재수의 마음이 그새 촉촉해졌다. 잠깐 군대를 벗어났을 뿐인데 낭만적 감정이 드는 제 모습에 재수는 놀랐다. 노을을 보면서 그녀와 길을 걸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정음이 자신에 대한 마음이 싹 가셔 이제 눈곱만큼도 없다 해도 이렇게 우연히 만나 노을 속을 걷는 것만으로 재수는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정음이 재수를 데리고 간 곳은 남영역 근처 지하에 자리 잡은 아담한 음악다방이었다. 재수는 약속대로 자신을 음악다방에 데려 온 정음에게 감격했지만, 이렇게 약속만 지키고 그걸로 끝일까 봐 불안한 건 여전했다. 몇 개월 전, 이제 잊기로 했건만 막상 만나고 나니 처음 봤을 때처럼 가슴 떨리고 그녀를 다시 못 볼까 불안해하는 자신이 신기했다.
그들은 디제이 박스에서 좀 떨어진 4인용 테이블에 앉았다. DJ 박스엔 긴 머리의 곱상한 DJ가 느끼한 목소리로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그는 음악 내용보다 주로 유머를 구사했는데, 그가 별로 웃기지도 않은 멘트를 느끼한 목소리로 날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깔깔대며 박수를 쳐 댔다. 재수는 살짝 실망감이 들었다. 재수가 아는 음악다방이란 음악에 관한 지식과, 노래와 가수에 대한 DJ만의 견해를 듣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쉽게 듣지 못하는 음악을 실컷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치한 멘트나 들으며 커피나 마신다 해도 재수는 마냥 좋았다. 지금 자기 앞에 꿈에 그리던 그녀가 앉아있지 않은가? 그런데 정음은 뜻밖에도 맥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재수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정음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군인 휴가 나왔는데 술 한 잔 사드려야죠.”
역시, 아름다운 데다 사려까지 깊은 그녀. 재수의 가슴 깊은 곳에 감동이 격하게 일었다.
셋이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누는 동안 DJ가 바뀌었다. 새로 앉은 DJ는 앞의 DJ와 달리 음악신청에 집중했고, 가수와 노래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럼 그렇지. 천상의 여인 정음이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는 음악다방에 다닐 리 없다는 확신이 들자 재수는 그녀를 더욱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맥주가 네 병째 비워졌을 때 ‘땅’ 하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캐논 변주곡이 실내 공기를 채웠다.
‘어? 이거...’
금방까지 약간 소란스러웠던 실내는 순식간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하필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곡이 2년이 지나 우연히 그녀를 만난 지금 흘러나오다니. 재수는 마치 비켜갈 수 없는 운명처럼 그녀를 만나고 결국 재회에까지 이르게 됐음을 확신했다. 어떤 이는 운명이라 말하는 현실 너머의 보이지 않는 힘.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설명이 안 됐다. 멍하니 곡을 듣던 재수는 곡이 클라이맥스로 향할 때, 결국 버릇처럼 두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어머. 재수 씨. 이 곡이 그렇게 좋아요? 무슨 남자가 음악 듣고 울기까지 해?”
몰래 눈물을 훔친다고 훔쳤는데 그새 지수가 본 모양이었다. 정음도 놀란 눈으로 재수를 바라봤다. 재수도 스스로 눈물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영화를 보다가도 울고, 음악을 듣다가도 울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눈물이 아니었다.
‘그래. 당신들이 지금 내 마음을 알 리가 없지.’
정음을 처음 본 날 재수를 얼어붙게 했던 그 곡. 그리고 그녀를 생각하며 테이프가 늘어져 장송곡이 될 때까지 들었던 그 곡. 그 곡이 그녀 정음과 마주하고 있는 지금 비현실적으로 웅장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곡을 듣자 입대 날부터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정음을 그리워하며 죽을힘으로 버텼던 군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쳤고, 때문에 울컥해서 눈물이 나와 버리는 걸 그녀들이 알리 없었다. 아, 얼마나 힘들게 버텼던가. 이제 영영 만나지 못한다고 절망하고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던가. 그런데 지금 꿈에 그렸던 그녀가 자기 앞에 앉아있다니. 재수는 주책맞게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지수가 건넨 휴지로 눈물을 닦는 모습을 정음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재수 씨, 감성이 풍부한가 보다. 나 음악 들으면서 눈물 흘리는 남자 처음 봐.”
“아. 죄송하지 말입니다. 그게... 나 참.. 쪽팔리게 왜 이러지?”
“괜찮아요. 남자라고 울지 말라는 법 있나?”
지수가 위로랍시고 한 말들이지만 재수는 하나도 위로가 안 됐다. 그녀 앞에서 씩씩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왜 그간의 세월이 생각나 사람을 이렇게 쪽팔리게 하는 걸까. 눈물을 감추느라 고개를 푹 숙인 재수에게 이번엔 정음이 손수건을 건넸다. 재수는 망설였다. 그녀의 소중한 손수건으로 이 주책맞은 눈물을 닦아도 되는 걸까?
“괜찮아요. 어서 닦아요.”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정음이 말했다. 정음의 손수건에선 향기가 났다. 어릴 적 부잣집 여자들에게서 나던 그 냄새. 재수는 갑자기 헛기침을 하고 얼굴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 어깨를 펴고 씩 웃어 보였다. 어릴 때부터 있는 집 애들 앞에서 항상 하던 버릇이었다.
“정음 씨. 저 사실 고졸에 호떡이나 팔던 보잘것없는 놈이지 말입니다. 하지만 정음 씨 처음 보고 나서 열심히 살았지 말입니다. 그래야만 할 거 같았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 정음이 손가락으로 재수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윽한 눈으로 재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재수의 입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이게 무슨 일이지? 재수는 급작스런 상황에 너무 놀라 눈을 똥그랗게 뜬 채 얼음처럼 굳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어릴 적 솜사탕이 입술에 닿았던 그 느낌이었다. 보드랍고 달콤했다. 제 마음을 이제 알아준 걸까? 그제야 요동치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정음은 한참 동안 입술을 떼지 않았다. 재수는 그녀를 처음 본 그 겨울 그날로 돌아가 하얀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뜻 모를 한숨이 나오려 했지만 재수는 숨이 멎을 각오로 참았다. 그 순간에 콧바람을 내는 건 아니잖나? 지수는 맥주잔을 든 채 그런 둘의 모습을 토끼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후 입술을 뗀 정음은 무안했는지, 매무새를 고치고 맥주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재수와 정음의 잔이 힘차게 부딪치고 둘 다 원샷을 했다.
“저 사실, 재수 씨가 절 갖고 장난한 줄 알았어요. 괜히 여자한테 연락처 받고 여기저기 자랑이나 하는 그런 하찮은 남자들처럼요.”
“아니,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제가 얼마나..”
“알아요. 이제 알았어요. 그러니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고 신나게 놀아요. 오늘은 제가 다 쏠 테니까.”
“아니지 말입니다. 저도 월급에 생명수당 받고 해서 돈 있지 말입니다.”
“군인이 휴가 나왔으면 친구가 술 사주는 거지 말입니다. 고집부리지 말지 말입니다?”
셋은 모처럼 깔깔거리며 크게 웃었다. 이후 셋은 오래된 친구처럼 왁자지껄 떠들기도 하고, 각자 신청한 음악이 나올 때면 가만히 음악에 빠져들었다. 정음이 신나는 노래 신청해 보라고 해서 재수는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를 신청했다.
그날 재수는 정음이 아직 정식 디자이너는 아니고, 중소기업에서 수습 중인 예비 디자이너라는 사실과 함께 지수는 이미 백화점에 입점한 유명브랜드 의류회사의 정식 디자이너가 됐다는 걸, 지수의 아버지가 그 회사 사장이며 그 덕에 빨리 디자이너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수가 자기 얘기를 자랑처럼 얘기하는 동안 재수는 정음의 표정을 살폈다. 누군가는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같은 학원을 나온 동기는 부모덕에 일찍 정식 디자이너가 됐으니 질투나 샘이 날만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음의 표정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다만,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의 눈빛에서 느낀 우수를 보았다. 뭘까? 체념일까? 학창 시절부터 열등감을 삐딱한 방식으로 풀어 온 재수는 정음의 무덤덤함이 이해가 안 됐다.
재수는 지수의 얘기를 들은 후 갑자기 정음이 안쓰러워졌다. 그렇게 신비로운 그녀도 나름의 아픔이 있겠다 싶으니 가슴이 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