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내 인생 25화

-육군 헬기 조종사-

by 미스틱

정음과 재회한 날, 셋은 음악다방을 1차로 해서 호프집까지 새벽까지 달렸다. 그리고 헤어질 때, 다시 한번 정음의 기습 키스를 받은 재수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남영역에서 가락동 집까지 걸어왔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녀를 만난 데다 키스까지 받았으니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처음 본 날처럼 또 한 번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그녀가 다시 적어 준 쪽지는 밤새 걷는 동안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재수는 그 쪽지에 담긴 주소를 열 장의 메모장에 옮겨 적어 벽에 붙여놓고 장롱과 책상 서랍, 하다못해 부엌 쌀통에까지 따로따로 붙여놨다. 그래도 불안해서 날이 밝을 때까지 잡귀신 든 놈 마냥 중얼중얼 외웠다. 그리고 복귀 날엔 군모 안에 테이프로 붙이고 시외버스에 올랐다. 그녀를 다시 만난 기념으로 새로 산 카세트테이프로 캐논 변주곡을 들으며 부대로 향했다. 매번 휴가 후 복귀 때마다 부대가 보이기 시작하면 심장이 두근거려 우황청심환을 먹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음과 재회한 이상 내일 당장 북한으로 넘어간다 해도 껄껄대며 갈 수 있었다.


재수는 고참과 한 번 갔었던 다방에 들렀다. 다방 레지는 남자 손님이 앉으면 무조건 옆에 앉아 제 커피를 사달라는 걸 알고 있는 재수는 아예 두 잔을 사 준 후, 소중한 워크맨을 맡겼다. 그리고 다음 휴가 때 찾아가겠다고 잘 보관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걸 들고 부대로 들어갔다간 치도곤을 당하고 압수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부대에 복귀해서 매사 싱글벙글하는 재수를 소대장부터 고참들까지, 다들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일주일 간격으로 정음에게 편지가 왔고, 재수는 그때마다 손으로 꼭꼭 눌러 정성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언제나 근황과 안부를 묻는 뻔한 내용이었지만, 하트 문양으로 마무리하는 마지막 문장은 재수를 꿈꾸듯 행복감에 젖게 했다. 재수는 정음의 편지를 받을 때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고 답장을 쓸 때 가장 행복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냈더라도 정음에게 편지를 쓸 때면 피곤도 잊고 뭉게구름 위에 앉은 듯 마음이 두둥실 떠다녔다. 그리고 어서 빨리 또 휴가를 가기 위해 사단장 시범이나 휴가가 걸린 고난이 훈련을 고대했다.


정음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일까? 재수는 제대가 아직 1년 넘게 남았지만,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적어도 제대 후 번듯한 직업은 있어야 정음에게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찰대는 육군 항공대와 막사를 반씩 나눠 쓰고 있었다. 재수는 자대 배치 후부터 매일 헬기가 뜨고 앉는 것을 봐왔다. 그걸 볼 때마다 헬기 조종사들이 부러웠고 막연하게 자신이 헬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더랬다. 어릴 적부터 높은 곳에 오르기를 좋아했던 재수였다.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다. 지상에서 멀어질수록 재수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높은 곳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 구질구질한 지상에서의 삶을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하늘을 날고 싶었다.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저 하늘이라면 분명 아파트 굴뚝에 올라간 것보다 훨씬 딴 세상에 있는 기분일 거라 상상했다. 게다가 헬기 조종사는 월급 이외에 비행시간만큼 수당이 따로 나왔다. 재수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준위로 진급해 헬기 조종사가 되면 자신이 꿈꾸던 하늘도 날고 돈도 톡톡히 벌 수 있으니 정음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


‘육군 헬기 조종사가 돼야겠다.’


진절머리 나는 군대지만, 변변찮은 학력에 자격증 하나 없는 자신이 정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재수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목표를 세워버렸다. 무식하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번번이 일어나고 그걸 당연하듯 받아들여야 하는 군대에서 일하는 군인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음과 재회하지 않았다면 그런 상상조차 끔찍하게 느꼈을 것이다. 재수는 직업군인이 된다는 사실을 막연히 상상했던 하늘을 나는 꿈의 실현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육군헬기 조종사는 재수에게 이제 실제적 목표가 됐다.


재수는 지금까지 꿈도 목표도 없이 살았다. 될 만하면 일이 터졌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무력한 백수가 됐고, 차마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없어 막노동으로 용돈이나 벌뿐이었다. 정음을 처음 본 호떡 팔 때가 머리통 크고 나서 그나마 열심히 산 때였고, 정음을 보기 위해 기를 쓴 군 생활이 가장 맹렬히 살았던 때였다. 그리고 정음을 다시 만난 지금, 재수는 처음으로 꿈을 가졌고 미래에 대한 목표가 생겼다. 그것도 확실하고 간절한 목표였다. 재수는 자신의 꿈을 이루고 정음 앞에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이 뛰었다.

고졸인 재수가 준위시험을 보려면 먼저 부사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 부사관 시험을 통과하면 준위로 진급할 수 있다는 것, 준위는 장교와 부사관의 중간 계급으로 준사관으로 불린다는 것, 소위는 입대 초년생 취급을 받아 병장들이 함부로 대하기도 했지만, 준위는 항공이나 통신, 수송 등 전문 기술을 가진 특수 계급이라 사병도, 웬만한 계급의 장교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까지, 재수는 며칠 새 항공대 대원들을 PX로 데리고 가 월급을 털어주고 정보란 정보는 다 입수했다. 이제 육군 헬기 조종사가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 마당에 재수에게 한 달 치 월급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병으로 강제 징집당한 재수가 직업군인이 되는 길은 분대장인 단기하사 밖에 없었다.

“소대장님. 저 단기하사 시험 보고 싶습니다.”


군대에서 재수가 의지할 사람은 재수에게 무한 신뢰를 보낸 김 소위 밖에 없었다. 소대장실을 찾은 재수는 앉으라는 소대장 지시에도 꼿꼿이 서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자대 생활을 일 년 반 더 하겠다고?”

“네.”

아무리 매사 적극적이고 최고 훈련 성적인 재수지만, 갑자기 군 생활을 더 하겠다니, 소대장은 이해 못 하겠단 표정으로 바라봤다.


“왜? 왜 갑자기 하사가 되겠다는 거야?”

“분대장이 되어 제 팀을 좀 더 정찰대다운 정예요원으로 이끌고 싶습니다.”


재수는 계급은 소위보다 낮지만 위상이 더 높은 준위 시험을 보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마음에도 없는 엉뚱한 이유를 댔다. 눈치 빠르고 알맞게 둘러대는 재수의 특기는 곧바로 먹혀 소대장은 재수의 진지한 표정과 진심 어린 말투에 의구심을 접고 승낙했다.

분대장 시험은 두 달 후였다. 부사관 교육 훈련이야 몸으로 때우는 거니 문제없는데, 필기시험이 문제였다. 학창 시절부터 운동이라면 자신 있었지만, 당최 공부 머리는 안 돌아가던 재수는 시험이라는 단어 앞에 불안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군대 시험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군 생활 경험으로 볼 때, 말만 시험이지 분명히 시험 흉내만 낼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재수는 소대장으로부터 전술 및 지휘 매뉴얼 몇 권을 받아 든 날부터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특히, 소대장의 특별 배려로 훈련 외에는 부대 작업 및 축구 등 전투 체육에서도 열외 됐다. 일과가 끝나고 훈련 시간과 보초 시간, 그리고 먹고 자고 싸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책과 씨름했다. 학교 다닐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 아니, 하버드에 갔겠다고 생각이 들 만큼 책을 파고들었다.

눈이 내렸다. 군대 와서 처음 본 함박눈이었다. 저주받은 땅은 겨울에 눈이 내려도 을씨년스럽게 진눈깨비가 내리거나, 쏟아지듯 내린다 해도 바람이 휘몰아쳐, 낭만은커녕 시베리아 한 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모처럼 소리 없는 함박눈이 내리자 재수는 보초를 서며 정음을 처음 본 날을 떠올렸다. 그때의 정음의 모습을 그리자 가슴이 촉촉이 젖어왔다. 그리고 지금 혼자 호떡을 팔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시렸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소대장이 초소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재수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책을 초소 밖으로 휙 던져 버렸다. 경계근무 서면서 공부를 한 사실을 들키는 순간, 앞으로의 배려는 둘째치고 시험 응시도 취소시킬 중대한 수칙 위반이었다. 재수는 얼른 자세를 고쳐 잡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단 생각을 했다. 소대장은 오늘 당직사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맹수!”


맞경례도 하지 않는 소대장을 보는 순간, 역시 재수는 또 그 기분이 들었다. 뭔가 황당하거나 놀랄 일이 터지기 직전 드는 기분 말이다.

“노 상병. 어쩌냐?”
“......”


어쩌냐니. 뭔가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사단에서 공문이 내려왔는데.. 그게.. 단기하사제도가 폐지 됐단다.”

“.......”

“넌 병장 달면 분대장 아니어도 훌륭하게 팀을 이끌 능력이 충분하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


재수는 주저앉을 뻔했다.


“군 생활 더 하면 뭐 하냐. 얼른 나가서 좋은 직장 잡아야지. 간다.”


재수는 어이가 없어 경례도 못하고 총총 사라지는 소대장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봤다.

‘씨발. 되는 일이 없네.’


그랬다. 재수는 꼭 중요한 순간에, 절실한 순간에 일이 틀어졌다. 재수가 어머니와 함께 호떡을 팔기로 마음먹었을 때, 개떡 같은 청춘이 호떡 같은 청춘으로 변하지 않을까 의심한 것도 항상 일이 좋게 흐르다가도 어느 순간 호떡 뒤집듯 훌떡 뒤집혔기 때문이었다. 대입을 몇 개월 앞뒀을 때도 하필 옆의 놈이 자존심을 건드려 두어 대 때렸을 뿐인데, 일이 어마하게 커져 대학을 포기해야 했다. 돈이 없어 재수학원에 근무 학생으로 갔을 때도 칠판을 지우고, 분필 지우개를 털고, 교무실을 청소하다 막차를 놓치면 서울역에서 개포동까지 걸어와 두세 시간 자고 또 등원할 만큼 열심이었다. 어머니 소원을 풀어드리고 싶어 대학 입학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학력고사를 몇 개월 앞두고 돈도 안 내고 수강한다고 허구한 날 빈정대던 강사가 재수가 치우던 재떨이에 가래침을 뱉기에 재떨이로 내려치고 고소당해 시험을 포기해야 했다. 자신의 욱하는 성질 탓이라 여기기도 했지만, 어째서 꼭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테스트라도 하듯 일이 터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입대 전날 그 소중한 쪽지를 잃어버리질 않나, 기껏 수방사에 차출돼 군 생활만이라도 풀리나 싶더니, 그지 같은 정찰대로 재 차출되질 않나. 난생처음 미래 목표를 세우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제도가 폐지됐다니. 열심이면 열심일수록 일은 더 꼬였다.


'인생 진짜 좆같네.'


재수는 이제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목표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막살고 싶어졌다. 영화에서 본 깡패들처럼 꼴리는 대로 살고 싶어졌다.

하지만 며칠 뒤 신 조교가 자포자기 상태의 재수의 마음을 그나마 일으켜 세워줬다.

종교행사를 핑계로 읍내에 나온 재수는 음악이나 들으면 마음을 위로하려 다방을 찾았다. 그런데 워크맨을 맡겼던 다방 레지가 보이지 않았다. 재수는 마담에게 사정을 얘기하며 워크맨을 찾아달라고 했지만, 돌아온 대답이 재수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아유~ 순진한 군인이네. 한 다방에 몇 달씩 있는 레지가 어딨어. 걔들은 돌고 돌아. 한두 달 있다가 다른 지역으로 가고, 또 거기서 한두 달 있다가 다른 지역으로 가고.. 그 워크맨인가 워크걸인가 그거 비싼 거지? 비싼 거면 벌써 갖고 튀었지, 여기 두고 갔겠어?”


순진하단다. 지수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방 마담에게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드러웠다.


‘그게 얼마짜린데.. 나쁜 년.’


하지만 마담에게 따질 일이 아니었다. 한낱 다방 레지한테 비싼 워크맨을 맡긴 자신이 멍청한 거였다. 재수가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돌아설 때 신 조교와 마주쳤다. 신 조교는 영외에서 만나서인지,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재수를 동생 만난 것처럼 반기며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옆에 앉으려는 레지를 물리치고 재수의 근황을 물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려줬다. 그건 준위 진급시험은 부사관이라고 다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상사 이상 계급이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재수에게 PX 음식을 종류별로 다 골라 먹으며 이런저런 정보를 줬던 항공대원들 정보는 핵심이 빠진 정보였다.


“이런 등신 새끼들. 마주치기만 해 봐라. PX를 다 털어 버릴 테다.”


늘 그랬듯, 재수는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실제적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가 또다시 엉뚱한 이유로 수포로 돌아간 사실을 지독한 불운이라 여겨야 할지,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몰라 마음이 복잡했다. 하마터면 준위 진급시험도 못 보고 지긋지긋한 군 생활만 1년 6개월 더 할 뻔했던 사실에 재수는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한편으론 이제 무엇을 해야 정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지 미래가 막막해서 하루하루 갈피를 못 잡고 헤맸다. 꿈같은 재회를 했지만, 어느덧 미래에 대한 불안이 고통스럽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정음은 가끔 꿈에 나타나 호떡을 팔거나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는 제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봤다. 그런 날은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진저리를 치며 하루라도 빨리 번듯한 계획을 세우고 싶어 마음만 급해졌다. 그러나 정보가 막힌 군대에서 제대 후 무엇을 할 것인지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재수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찾느라 그해 겨울을 속절없이 보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개 같은 내 인생 2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