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내 인생 27화

-이별-

by 미스틱

싸제라면 봄 향기 가득했을 5월. 보초를 서는 재수는 아직도 추웠다.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네 달째 정음에게서 아무런 답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편지를 썼건만, 아무리 바쁘다고 네 달째 답장이 없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재수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이런저런 상상만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디자이너라면 여기저기 다니는 거래처도 많을 테고, 그런 거래처에는 재수 같이 후줄근한 군바리가 아니라 잘 나가는 패션업계 놈들이 수두룩할 테니, 미모의 정음을 놈들이 그냥 둘 것 같지 않았다. 군바리인 자신과 TV에 나오는 남자 패션 디자이너들을 비교해 보니 갑자기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그런 놈들과 어울리다 고무신 거꾸로 신은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답장이 없을 리 없다.’


상상은 어느새 확신이 되었고, 재수는 진짜 탈영을 하고 싶어졌다. 군바리들이 애인 때문에 탈영하는 심정을 이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만 졸이다 애인이 실제로 고무신 거꾸로 신은 걸 확인하면 탈출구 없는 군대에서 막막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거였으리라.


사실, 재수의 불안은 일찍 시작됐었다. 면회를 한 번 와달라는 재수의 편지에 답장은 없고 뜬금없이 지수 혼자 면회를 보냈을 때부터였다. 지수가 돌아가서 내 안부를 전했을 것이고, 그러면 정음은 최소한 편지 한 통이라도 써서 어떤 반응이라도 보였어야 하는 게 마땅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네 달째 편지 한 통 없단 것이 재수의 불안을 극대화시켰다. 의심이 확신이 되고 불안이 극에 다다르자 재수는 기어이 탈영 계획을 세웠다. 이판사판 심정이 된 것이다. 심정이 그러하자 탈영했다가 잡혀 영창을 간다 한들, 그딴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영창 생활까지 포함해서 군 생활 몇 년 더 한다 해도 재수는 당장 정음이 왜 연락이 없는지 확인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날 밤 재수는 기어이 치밀하게 탈영 계획을 세웠다. 다음날이 일요일. 그럼 종교 활동을 보낼 것이다. 군대 종교 활동 중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는 곳은 천주교다. 다들 미사 드리느라 앉았다 일어섰다 할 때 혼자 슬그머니 빠져나온다. 그 많은 군바리 중 누구 하나 없어진 걸 알아챌 때는 복귀 때 인원체크 할 때뿐이다. 그땐 이미 자신은 시외버스를 타고 검문소를 지나고 있을 것이다. 승용차는 검문해도 일반 시외버스는 검문하지 않는다는 걸 재수는 알고 있었다. 주민들 민원도 많거니와 감히 버스로 탈영하는 놈은 없을 테니까. 재수 자신이 생각해도 완벽한 플랜이었다. 계획을 완벽히 세웠음에도 그날 밤 재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중범죄를 저지를 두려움보다 정음을 만났을 때, 이미 변해 있을 정음의 표정과 반응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쫄따구들은 비록 종교 활동이지만 그래도 외출이랍시고 군화를 닦고 군복을 다리느라 법석을 떨었다. 그 이유를 재수는 잘 알고 있었다. 종교 활동 끝나고 인심 좋은 고참 인솔자가 다방에라도 데려가면 레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인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세상 모든 군바리들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재수는 구겨진 군복을 주섬주섬 입으며 읍내에 나가자마자 은행에 들러 가지고 있는 현금을 다 챙길 계획까지 세웠다. 여차해서 서울에서라도 검문에 걸리면 택시를 잡아타고 정음에게로 내뺄 심산이었다.


“종교 활동자는 지금 즉시 연병장으로 집합!!”


드디어 안내 방송이 울렸다. 재수는 심호흡을 하고 내무반을 나와 터벅터벅 연병장으로 걸었다. 벌써 2년 넘게 지낸 부대 막사가 유난히 낯설게 보였다. 이곳에 다시 돌아올 때는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탈영병 딱지를 붙이고 오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오한이 와서 몸을 떨었다. 재수는 누구보다 먼저 연병장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은 하늘엔 뭉게구름이 예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저 맑은 하늘과 구름에 감탄했을 테지만, 재수의 마음은 소나기 쏟아지기 전 하늘처럼 잿빛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쫄따구들과 몇몇 고참들이 어슬렁거리면서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들아. 빨리빨리 안 와?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평소에 재수는 쫄따구들 교육 때에도 구타는커녕 얼차려 한 번 주지 않았다. 웬만해선 욕도, 큰 소리도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제가 당한 괴로움을 대물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너그러울 수 없었다. 탈영이라는 어마한 범죄를 앞두고 마음이 하도 불안한 나머지, 어차피 저지를 일 빨리 저질러 버리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해 죽겠구만, 꿈 뜬 쫄따구들이 못마땅하기 그지없었다. 재수가 평소와 달리 버럭 하자 쫄따구들이 움찔해서는 우다다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그 무리 중 한 놈이 재수에게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가만 보니 손짓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다급히 부르고 있었다.


“노 병장님. 애인 면회 오셨어요. 얼른 면회실로...헉헉..”

‘아. 정음이구나. 결국 하늘이 날 살려주시는구나.’


재수의 두렵고 무겁게 내려앉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흥분으로 바뀌었다.


“근데.. 얌마. 내 면회소식은 왜 꼭 니가 전하냐?”


재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성실한 쫄따구한테 쓸데없는 면박을 주고는 모자를 벗어 들고 면회실로 내달렸다. 면회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선 재수에게 PX병의 경례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 전 그 자리에 똑같이 지수가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 이건 또 뭔가? 그렇게 기다린 정음은 왜 안 오고 지수가 또 와있냐 말이다. 이쯤 되자 재수는 지수가 반가운 게 아니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지수야. 대체 정음이는 왜.. 편지도 안 하고.. 왜, 왜 자꾸 니가 오는 거야? 엉?”


재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가쁜 건 전력질주를 한 탓만은 아니었다. 궁금증이 재수가 숨을 더욱 몰아쉬게 했다. 언제나 재수를 볼 때 빙그레 웃었던 지수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재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테이블과 창밖을 번갈아 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재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고 있음을 확실하게 느꼈다. 언제나 그랬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정음이.. 무슨 일 있는 거지?”


재수가 떨리는 소리로 물었지만 지수는 역시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야! 김 지수. 말 좀 해 봐. 정음이 무슨 일 있냐고?”


어찌나 큰소리로 외쳤는지 면회실에 있던 면회객 전부가 재수를 바라봤다.


“야! 노 병장. 니가 여기 전세 냈어? 어디 싸제인 많은 면회실에서 큰 소리야?”


군바리들은 부대 내에선 개 같이 굴러도 외부인 눈에는 늘 점잖고 깨끗하며 여유롭게 생활하는 모습이어야 했다. 그래서 대민 봉사 나가서는 군바리들끼리 얼차려를 주거나 욕마저 해서도 안 됐다. 그렇게 항상 눈 가리고 아웅 식이어서 실제로는 수많은 사건 사고가 매일 일어나지만 뉴스에 나가는 건 군대 내에서 일어나는 일 중 백분의 일, 아니 천분의 일도 못되었다. 어쩔 수 없이 유출된 사건들일뿐인 것이다. 그런 군대 주제에 싸제인 많다고 큰소리치지 말라니. 울그락불그락 다가선 유 병장 코앞에 재수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유 병장님. 저리 좀 가시죠. 나, 지금 돌았지 말입니다.”

“이 새끼가 미쳤나. 저 번에도 그러더니. 오냐오냐해 주니까 고참이 고참으로 안 보여?”


재수가 꼭지 도는 임계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씨발 놈이. 꺼지라고 했지. 응? 나 지금 돌았다고 했잖아.”


재수는 유 병장의 멱살을 잡고 바로 주먹을 날릴 기세로 말했다.


“알았어. 내 지금은 비켜준다만 너 이따 좀 보자. 오늘 부대 뒤집어지는 날인 것만 알어.”


재수의 서슬 퍼런 기세에 유 병장은 지수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재수는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이번엔 가슴이 답답하고 혈압이 올라서였다.


“재수 씨. 흥분 가라앉혀. 얘기해 줄 게.”


처음으로 냉정하게 가라앉은 지수의 목소리를 들은 재수는 심호흡을 하며 지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재수 씨. 정음이 유학 갔어.”

“.........뭐? 유학? ......어디로?”

“파리.”

“아니, .....왜, 갑자기 유학을..”

“지금 다니는 회사에선 혼자 일 다 하느라 힘들고, 대우도 제대로 못 받고 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해도 대학도 아니고 학원출신이라 어디 좋은데 취직도 안 되고... 그래서 유학 경력이라도 쌓겠다고 갔어. 아무래도 파리 유학 경력이면 대학 경력보다 더 쳐주니까.”

“그래서 나한테 말도 없이.. 아니, 네 달 넘게 연락도 안 하다가 갑자기 갔다고?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믿건 안 믿건 그건 재수 씨가 알아서 해. 난 사실만 말한 거니까. 그리고 정음이..”


안 그래도 충격을 먹은 재수는 또 한 번 그 기분이 들었다. 황당하거나 놀랄 일이 생길 때 드는 그 기분.


“정음이 뭐? 남자 생겼다고?”

“........”

지수는 절망 어린 재수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최악의 상상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

“그 남자가 유학자금 대줬나 봐.”


지수는 창밖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너무 어이없어서일까? 그냥 멍하고, 몸이 땅 끝까지 푹 꺼지는 것 같을 뿐, 재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재수는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면회실 밖으로 비실비실 걸어 나갔다.


“야. 총 좀 줘봐.”


재수는 위병 근무를 서고 있는 쫄따구에게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 총말입니까?”

“그래, 임마!”


위병 근무자는 고참인 재수가 안전장치 등 총기 점검을 하려는 줄 알았는지 제 총을 이리저리 훑은 후 긴장한 얼굴로 건넸다. 반대편 위병 근무자도 얼른 제 총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나 재수는 총을 받아 들자마자 노리쇠를 당긴 후 총구를 제 입에 넣었다. 위병 근무자가 기겁을 하고 달려드는 순간, 재수는 방아쇠를 당겼다.

‘딸각!’

“악!!!”


뒤따라 나온 지수의 비명 소리가 위병소를 흔들었다. 동시에 두 위병 근무자가 재수에게 엉겨 붙었다.


“노 병장님. 왜 이러십니까?”

“얌마, 그냥 한 번 해 본거야.”


재수는 순순히 총을 던져주고 돌아섰다. 지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재수는 지수 옆을 비켜지나 면회소로 들어갔다. 두 위병 근무자는 한참을 서로 멀뚱히 바라보다 이내 행정반으로 연결된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재수 씨, 미쳤어? 뭐 하는 짓이야!!”

“히히~ 저거 총알 없어. 히히~”


뒤따라 들어온 지수는 이제 실실 웃기까지 하는 재수를 바라보다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재수 씨... 그러지 마. 제발...”


지수의 눈물을 보자 재수는 곧 절망스러운 표정이 됐다.


“지수야. 나 지금 꿈꾸고 있는 거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을까? 정음과 관련된 재수의 경험상 이럴 땐 눈물이 나와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안 나왔다. 분명 현실임이 틀림없는데, 가슴이 무너지는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데 눈물이 안 났다. 재수는 눈물이 왜 안 날까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한테 아무 말도 없이 훌쩍 떠났다는 배신감 때문일까? 배신이든 뭐든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눈물이 안 나는 게 이상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슴 졸이며 그리워하고 아파했는데, 그렇게 우연처럼 재회한 후 운명이라 믿었고, 몇 달을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였는데, 그 시간이 재수에겐 태어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건만, 무심히 그녀가 떠났는데, 이제야말로 다시 볼 수 없는 진짜 이별인데, 왜 눈물이 안 날까? 재수가 초점 잃은 눈으로 테이블만 바라보는 동안 지수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지수야. 나 이제 어떻게 사냐?”


한참 만에 재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지수를 보며 넋 나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재수 씨. 지금 너무 슬프고 충격이겠지만, 이겨 내야 돼. 부대에서 사고 치지 말고. 응?”

“아니. 나 오늘 누구 하나 쏴 죽이고 나도 죽어버릴래.”

“재수 씨. 제발...”


재수는 자리에서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그런 재수의 초점 잃은 눈에서 정말 사고를 칠 것을 예감한 지수는 얼른 재수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재수는 지수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이상하게 여자 손 하나 뿌리칠 힘이 없어 비틀거렸다. 그런 재수를 지수는 안간힘을 써 자리에 주저앉혔다. 그리고 재수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재수는 쓰러지듯 지수의 가슴에 묻혔다.


“지수야.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냐? 내 인생은 왜 맨 날 이 모양이냐고?”


지수 품에 안겨서일까? 드디어 재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이 지수의 옷가슴을 적셨다. 지수의 눈물도 재수의 머리에 뚝뚝 떨어졌다.


지수는 재수를 끌다시피 해서 위병소를 지나 읍내로 향했다. 아무래도 그냥 들여보냈다간 분명 사고를 치고야 말 것 같아서였다. 멍하니 비척거리는 재수를 지수는 힘겹게 부축하고 걷는 동안 지나는 군인들이 곁눈질을 했다.


“뭘 봐, 새끼들아.”


타부대 장병들이고, 그중엔 재수보다 더 많은 짬밥도 있었지만, 교육대 신 조교가 말 한 대로 정찰대 마크를 본 그들은 재수의 시비에 대꾸를 안 하고 외면했다.


읍내에 도착한 재수는 무작정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주 다섯 병을 봉지에 담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지수는 얼른 이것저것 안주를 집어 들었다. 가게를 나오자마자 재수는 병나발을 불었다. 지수는 그런 재수를 끌고 모텔로 향했다.


“재수 씨. 힘들겠지만 잊어. 잊어야 돼. 안 그럼 재수 씨가 죽어.”


그간 정음을 향한 재수의 마음을 아는 지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간절히 빌며 말했다. 그러나 재수는 아무 말 없이 깡 소주만 들이켰다. 지수는 안주를 집어 재수의 입에 물리려 했지만 재수의 굳게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소주가 세 병째 비워졌을 때, 재수는 마음이 조금 진정됐는지 입을 열었다.


“지수야... 딸꾹.. 정음이 이런 게 말이 되냐? 딸꾹.. 하~ 씨발... 넌 정음이.. 딸꾹..이해 되냐고.”


재수는 소주를 하도 급하게 들이부어선지 자꾸만 딸꾹질을 했다.


“재수 씨. 근데, 정음이 입장에서 보면 이해 돼."

“이해된다고? 너 지금 뭔 개소리야?”


재수가 욱해서 버럭 소릴 지르자 지수는 고개를 숙였다.


“뭐? 이해한다고? 넌 어떻게 내게 아무런 말없이.. 그렇게, 응? 그새 다른 남자 만나서 유학 보내준다고 훌쩍 떠난 걸, 그걸 어떻게 이해하냐고? 여자들은 원래 그래?”


갑자기 부아가 나서인지 딸꾹질이 멈췄다.


“재수 씨는 정음이를 다 안다고 생각해?”


같은 여자라, 친한 친구라 편드는 것만 같아 노려보는 재수의 눈을 피해 지수는 허공에 대고 말하듯 차분한 목소리였다.


“걔도 다 자기 사정이 있어.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는 거야. 그러기엔 둘이 만난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잖아.”

“개뿔. 사정은 무슨... 딸꾹.. 야, 조까라 그래. 나쁜 년.. 여자가 남자 군대 있다고.. 딸꾹... 고무신 거꾸로 신었으면 그걸로 다...딸꾹.. 얘기 끝난 거야. 뭐? 이해한다고? 딸꾹.. 너도..다 똑같은 년이야... 씨발... 딸꾹..”

재수는 다시 딸꾹질을 했다. 정음을 욕한 건 처음이었다. 지수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병째 들어간 술이 억하심정을 만들었고 입에서 욕이 나오게 했다.


“그래. 차라리 원망해. 그게 나아. 나쁜 년이야. 나도 나쁜 년이고. 여자들은 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술 그만 마시고 정신 차려.”

“지랄 마. 나 말리지 말라고.”


재수는 남은 소주 뚜껑을 이빨로 깠다. 그리고 퉤 뱉어버렸다. 그런 재수를 지수는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마지막 소주병이 비워지자 재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어디 가?”

“나? 술 사러 간다. 술 먹고 뒈지든가, 총 맞고 뒈지든가..”

“여기 가만있어. 내가 사 올게.”


지수는 재수를 붙잡아 앉힌 후 밖으로 나갔다. 지수는 군인이 부대 복귀 때 술 취해 있으면 안 된다는 걸 몰랐다. 면회소에서 재수를 데리고 나올 때만 해도 어디 가서 마음을 위로해주려 했지만, 현재 재수는 위로조차 받을 심정이 아님을 깨달았고, 차라리 복귀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면 사고는 안 치리라,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지수가 술과 국밥을 들고 다시 방에 들어설 때까지 재수는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만, 눈만 짐승처럼 사납게 번뜩였다. 지수가 종이컵에 술을 따르자 재수는 병을 낚아 채 마치 극심한 갈증에 지친 사람처럼 벌컥벌컥 마셨다. 한 병을 단숨에 마시고 다시 다른 병을 집어 드는 순간, 재수는 얼른 화장실로 튀어 들어가 변기를 붙잡고 토하기 시작했다. 먹은 게 없으니 쏟아지는 건 노란 위액과 섞인 하얀 술뿐이었다. 얼마나 쏟아냈는지, 더 이상 나올 게 없는데도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부러 더 구역질을 하는지도 몰랐다. 재수는 창자를 끄집어낼 듯 있는 힘을 다해 구역질을 했다. 그런 재수의 등을 가만히 두드리는 지수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한참 후, 지수는 외박이 아닌 외출이라 이제 복귀해야 하는 걸 알고 재수를 가까스로 일으켜 세웠다. 그런 지수에게 재수는 몸을 맡긴 채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다 포기한 듯 실실 헛웃음만 나왔다. 둘은 해가 저물어 어둑해진 거리로 나왔다. 위태위태하게 걷는 두 사람 앞으로 헌병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군모를 주머니에 꼽고 비틀거리는 재수를 보자 그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어이. 누가 군모 벗고 다니래. 외박증 줘 봐.”

“뭐, 어이? 이런 씨발 놈들이 어따 대고 어이야? 짬밥도 안 되는 것들이.”

“하, 참... 갑시다. 복장 위반에 술 취해 난동 부렸으니 군인 품위 유지 위반입니다. 갑시다.”

“아니에요. 지금 이 사람이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헌병들이 재수의 팔을 잡아끌자 지수는 급히 헌병 옷소매를 잡고 애원했다. 재수는 그 모습에 술이 확 깼다. 그리고 지수의 팔을 잡아 빼 제 뒤로 숨기고는 뒷주머니에서 군모를 뽑아 헌병 머리에 씌우려 했다.


“야, 써라, 써. 너나 많이 써라.”


헌병 헬멧 위로 기어코 군모를 씌우려고 달려드는 재수를 헌병들은 뿌리치느라 뒷걸음질 쳤다.


“뭐, 품위? 이 새끼들아. 맨날 박박 기고 맨날 두드려 맞는 군바리가 품위가 어딨냐? 니들은 군바리인 게 그렇게 좋냐? 그래서 각 잡고 돌아다니냐? 야, 니들도 다 그냥 군바리야. 소모품이라고. 새끼들아!!”


결국 헌병 하나가 재수를 제압하려고 덤비는 순간, 다른 헌병이 제지했다. 재수 모자에 붙은 부대 마크를 본 것이다. 그들은 지수에게 얼른 자대로 데리고 가라고 당부한 뒤돌아섰다.


“야. 니네 어디가? 왜 안 잡아가! 왜 안 잡아가냐고? 니들도 내가 불쌍하냐? 불쌍하냐고!!”

“제발 그만해. 제발..”


악을 쓰며 덤비는 재수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봄바람에 흙먼지 휘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걸어 무대 막사 앞에 섰다. 재수는 갑자기 전봇대를 감싸 안았다.

“으랏찻차...끙~~”


뽑힐 것만 같은데 전봇대는 뽑히지 않았다. 지수는 그 짓을 하는 재수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렸다.


둘은 위병소를 나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위병소에 섰다. 위병 근무를 하는 쫄따구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경례를 했다.


“재수 씨. 제발 사고 치지 마. 알겠지? 제발 부탁이야. 응?”


재수는 팔을 붙잡고 애원하는 지수를 뿌리치고 비틀비틀 돌아섰다. 재수가 막사 계단을 휘청거리며 오를 때까지 불안하고 안타깝게 바라보던 지수 눈에 또 눈물이 흘렀다.


내무반에 들어온 재수는 그대로 침상에 뻗어버렸다. 잠시 후 유병장이 내무반 문을 부수듯 열어젖히고 들이닥쳤다.


“야, 노 재수. 일어나. 일어나라고 새끼야.”


유 병장이 당장 몸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달려들어 재수의 멱살을 잡았지만 재수는 그의 손에 몸을 맡긴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좆 까고, 때리고 싶으면 얼른 때려라.”

“뭐 좆...?”


유 병장의 주먹을 치켜든 순간 벼락같은 외침이 터졌다.


“야!! 유 병장!! 그 손 안 놔!!”


소대장 김 소위였다. 말년병장 유 병장이지만 김 소위의 위엄을 알기에 부르르 떨던 주먹을 풀고 멱살을 놓았다. 김 소위는 유 병장을 내무반 밖으로 등 떠밀어 내보낸 뒤 재수 옆에 앉았다.


“야. 노 병장. 일어나 봐. 너 아까 총구까지 입에 넣었다며.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상병 때 집까지 데려가 따뜻한 밥을 먹여줬던 소대장이었다. 재수는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훅하고 끼치는 술 냄새에 아랑곳 않고 김 소위는 재수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일이냐고? 얼른 말해봐.”


재수는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임마, 말을 해야 내가 뭘 도와주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김 소위는 재수의 손을 꽉 잡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 손이 유난히 따뜻했다.


“소대장님. 저 이제 어떻게 군 생활 합니까, 예?”


재수의 넋 나간 얼굴에서 뭔가 심각한 일이 터졌음을 읽은 소대장은 우선 재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여자가 떠났답니다. 저 멀리 외국으로..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소대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일까? 어떨 땐 형처럼 느껴졌던 때문일까? 재수는 자기도 모르게 고백을 했다. 김 소위는 감싸 안은 팔에 힘을 더 줬을 뿐 아무 말하지 않았다. 휑한 내무반에 두 남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행정반에 당직사관인 김 소위 앞에 유 병장을 비롯한 말년병장 몇과 이등병 하나가 서 있었다.


“너희들 잘 들어. 당분간 노 병장 건드리지 마. 알았어?”

“네...”


평소 합리적인 데다 훈련 때를 제외하면 늘 대원들을 따뜻하게 대한 김 소위라 말년병장들은 못마땅한 명령이지만 거역할 수 없어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쭈. 대답들 봐라.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내 말 안 듣고 노 병장 건드리면 다들 각오해.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아까보다 더 힘이 들어간 김 소위의 말에 다들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오늘 불침번이 너라고?”


김 소위가 가리킨 것은 이등병이었다.


“안 돼. 유 병장, 오늘 불침번 바꿔. 상병이상으로. 그리고 총기관리 확실히 하라고 일러. 알았어?”


그제야 유 병장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네!!”


그날 밤.

재수는 술에 잔뜩 취했지만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울지는 않았지만 혼자 중얼거리다 씨팔, 씨팔 욕을 하며 군대를 욕하다가, 하늘을 원망하다 갑자기 정음을 원망하며 중얼댔다. 군대는 왜 가기 싫다는 사람을 끌고 와 가지고 사람을 생이별을 하게 만드는 것인지, 이럴 거면 차라리 다시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이지, 겨우 잊기로 마음먹고 부대 생활 잘해나가고 있었건만, 하늘은 왜 다시 만나게 해서 사람 마음을 몽땅 뺏어 놓고는 결국엔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건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정음은 그깟 출세가 뭐라고, 그새 다른 남자를 만날 거면 사랑한단 말을 하지나 말 것이지. 재수의 머릿속 분노와 원망이 끝없이 입 밖으로 계속 새어 나왔다. 때문에 정신 이상 증세라고 판단한 소대원의 보고 후, 재수는 모든 훈련과 일체의 부대 활동에서 열외 됐다. 부대원들이 연병장을 구를 때도, 구보할 때도, 하물며 청소를 할 때도 재수는 넋 나간 얼굴로 그들을 바라만 봤다. 전투수영 때 점수를 깎아 먹었지만 그 외 모든 훈련에서 부대 내 최고 성적일 뿐 아니라 모든 부대활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재수였기에 소대장과 부대장의 특별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가끔씩 이층 창틀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기도 하고 때론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지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도 해서 부대원들을 기겁하게 만들었고 그런 넋 나간 증세는 한참 동안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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