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내 인생 32화

-여자 지수 2-

by 미스틱

재수의 협박 가까운 제안으로 재수 어머니는 일요일은 장사를 쉬기로 했다. 재수 아버지도 술을 줄이고 착실히 돈을 벌었고 재수도 가계에 보탬이 되었으니 그래도 됐다. 재수도 모처럼 쉬는 일요일, 지수를 만나기로 했다. 아직 정음이 가슴속 한구석에 응어리처럼 남아있긴 했지만 머릿속에선 지워졌고, 지수에게 빚 진 기분이 들어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지난 시간, 지수를 만나는 건 부담이 컸다. 지수와의 관계가 우정인지 사랑인지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만나면 자신의 마음이 심란하고 무거워질 것이 뻔해서 지수에게 여러 번 연락이 왔어도 재수는 그때마다 일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미뤄왔었다. 그때마다 재수는 죄짓는 기분이 됐었다. 정음이 떠났을 때 눈물을 흘려줬던 지수였다. 그 먼 마산까지 몇 번씩이나 면회를 와 자신을 걱정해 준 지수였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재수였다. 전날도 삐삐로 연락이 왔었다. 만나자는 지수에게 재수는 이번엔 그러자고 했다. 이번에 만나 친구임을 확인시켜 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마음도 정리하고 싶었다.


명동거리는 여기저기 캐럴이 흐르고 반짝이는 트리가 거리를 뒤덮어 크리스마스이브임을 실감케 했다. 찻집 이층 창가에 앉은 재수는 거리의 연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다들 밝고 행복해 보였다. 재수는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때 무엇을 했나 기억을 떠올려봤지만 아무 기억이 없었다. 재수는 갑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23년을 살면서 제대로 크리스마스를 즐긴 경험이 없다는 게 마음을 헛헛하게 했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재수가 창밖을 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지수가 재수의 어깨를 툭 치고 앞에 앉았다. 재수는 반가운 인사를 던지려고 했던 마음과 달리 얼빠진 얼굴로 지수를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지수의 외모가 그새 또 확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짙은 갈색 눈썹 화장에 단발머리, 작아진 걸로 보일 만큼 날씬한 몸. 순간이지만 재수는 정음이 제 앞에 앉아 있는 착각을 했다.


“아우~ 사람을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무안하게..”


지수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지수는 얼른 메뉴판을 펴고 재수의 시선을 피했다.

여자는 원래 저렇게 확확 변하는 걸까? 마산 통합병원에서 면회 때 보고 못 봤으니 거의 5개월 만이지만 패션 디자이너라 그런지 지수는 이제 예전의 지수가 아닌 것처럼 풍기는 분위기가 또 달라져 있었다. 원래부터 부티가 났지만 지금은 이국적 이미지까지 더해져 한층 고급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재수의 가슴이 오랜만에 조용히 뛰었다.


‘내가 또 왜 이러지?’


재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뭐 먹을래? 난 파르페.”


겨우 정신을 차린 재수는 지수가 내민 메뉴판으로 얼른 시선을 돌렸다.


“파르페? 그게 뭔데?”


지수는 깔깔 웃었다. 분명 뭔가 무시당한 상황인데 재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수의 웃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확실히 오늘 뭔가 이상했다. 분명 마음을 정리하려고 나왔는데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마음이 흐르고 있었다.


“파르페 몰라? 아이스크림에 과일 들은 거?”

“겨울에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감기 들게.”

“어머. 재수 씨, 지금 내 걱정해 준 거야?”


무심코 한 말이지만 상황이 점점 더 이상하게 흘렀다. 그러나 재수는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부인하기 싫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지수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것도 부인하기 싫었다. 왜 순식간에 마음이 변했는지 재수는 알 수 없었다.


“딴 거 먹어. 따뜻한 거. 여긴 쌍화차 없나?”


지수는 또 한 번 배를 잡고 웃었다. 재수도 웃기려고 한 말이라 같이 웃었다.


“안 되겠다. 재수 씨 거는 내가 시켜줘야겠다.”


메뉴판을 넘기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지수의 모습을 재수는 혼란스런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왜 갑자기 지수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을까? 외모가 바뀌어서? 그간의 정성 때문에? 설마 정음의 모습이 보여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수는 자신이 미친놈처럼 느껴졌다. 정음이 떠난 후 지금까지 가슴 한구석에 남았던 응어리는 원망이고, 어떻게 그리 급하게 마음이 변했는지 하는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 앞에 앉아있는 지수는 분명 지수였다. 잘 웃고, 밝고, 자신에게 오랫동안 변함없는 정성을 쏟은 지수에게서 굳이 정음의 모습을 본 자신이, 그리고 그걸 이유로 삼는 자신이 미친놈 같았다.


‘얘는 왜 자꾸 나를 죄짓는 기분이 들게 하는 걸까?’


둘은 명동거리를 걸었다. 지수가 걷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재수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에 여자와 함께 보통의 연인들처럼 캐럴을 들으며 거리를 걸었다.


‘이런 건가? 크리스마스 때 데이트하는 것이 이런 느낌인 건가?’


쉴 새 없이 캐럴이 흐르고 크리스마스트리에다 이제 네온까지 켜져 세상이 온통 반짝였다. 재수는 자기도 모르게 낭만적 감정이 드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상대가 지수라도 아까부터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으니, 아니 어쩌면 마산 병원에서부터 친구라고만 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으니 당연할 수도 있다고 합리화를 했지만, 그러나 아직 어색한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인파를 뚫고 걷느라 둘이 자꾸 떨어지자 지수는 얼른 재수의 팔짱을 끼었다. 재수는 당황했지만 그대로 두었다. 굳이 거부하기 싫었다. 지수가 재수의 팔을 바싹 당겨 안자 지수의 통통한 가슴이 재수의 팔에 밀착됐다. 이런.. 재수는 야릇한 기분이 되어 숨이 가빠졌다. 걸으면 걸을수록 재수는 숨이 가쁠 뿐 아니라 가슴도 뛰었다. 게다가 아랫도리가 불편해져서 걷기가 불편할 지경이었다. 코트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슬쩍슬쩍 정리했지만 어찌 된 게 그럴수록 이놈의 아랫도리는 더 빳빳이 고개를 들었다. 재수는 속으로 애국가도 불러보고 어머니를 떠올리며 어머니 마음도 불러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재수는 도무지 자신이 이해가 안 됐다. 관계를 친구로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나왔건만, 그새 지수가 여자로 보이는 데다 숫제 발기마저 되니, 자신이 저급하고 저열하게 느껴졌다.


“지수야. 사람이 너무 많아 걷기가 힘들다.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


재수는 당황스런 상황을 피한다고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지수와 떨어져 앉는 것이었다.


“술? 좋지. 크리스마스이브에 술이 빠지면 안 되지.”


그렇게 술자리에 마주 앉은 재수는 오히려 더 야릇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술이 들어가자 지수가 더 예뻐 보이는 데다 전에 없던 정욕이 마구마구 일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두서없이 막 쏟아내도 정욕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하~ 미치겠네.’


왜 이런지 알 수 없었다. 재수는 하는 수 없이 테이블에 장식으로 놓인 스노우 글로브를 집어 제 머리를 후려쳤다.


“악!”


비명을 지른 건 지수였다.


“재수 씨, 왜 그래?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그게.. 자꾸 두통이 나서..”

“그렇다고 머리를 때리면 두통이 나아? 머리 맞는 거 제일 싫어하면서 자기 머리를 왜 때려? 아우~ 진짜..”

지수는 재수의 머리를 안쓰럽게 쓰다듬었다. 그랬다. 지수는 늘 한결같았다. 변함없이 자신을 걱정했다.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다독여줬다. 뜬금없이 부대에서부터 병원에 있을 때까지 봐 온 지수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그런 마음에 지수의 따뜻한 손의 촉감까지 더해지니 재수는 미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욕정을 주체 못 해 군대에서처럼 허벅지를 꼬집어도 소용없고, 다리를 꼬아도 봤지만 아랫도리는 고개를 숙일 줄 모르고 오히려 아프기만 했다.


“안 되겠다. 지수야. 우리 어디 들어가자.”


결국 재수는 제 욕정에 항복 선언을 했다. 술기운이 음탕한 마음에 음흉한 말도 쉽게 튀어나오게 했다. 관계정리고 나발이고 끓는 정욕 외에 당장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슨 자신감일까. 짐승 같은 사내 본색을 그대로 들어 내놓고도 재수는 지수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고 대답 없이 얼굴만 붉힌 채 술잔만 바라보는 지수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날 밤 재수는 뜨겁고 집요하게 지수의 육체를 탐했다. 재수의 끓는 피는 좀체 식을 줄 몰랐다. 혈기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펄펄 살아 꿈틀대 짐승 같은 신음을 몇 번이나 내질렀다. 처음엔 제 욕정을 어쩌지 못해 그랬다면 이후로는 오랫동안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던 응어리와 내면에 겹겹이 쌓인 정체 모를 한을 끄집어내는 몸부림 같은 거였다. 그런 재수의 몸부림을 지수는 그대로 다 받아주었다.


재수는 실로 오랜만에 무척이나 깊은 잠에 빠졌다.

재수가 눈을 떴을 때 지수는 벌써 화장까지 마치고 앉아 재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수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땐 지수는 그새 사 온 커피를 건넸다. 그러나 재수는 옷을 입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었다. 지수를 택시에 태울 때 잘 가라고 한 인사 한마디가 그날 재수가 한 말의 전부였다. 지수에게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제 욕정만 푼 것 같아 또다시 죄스러웠다.


재수는 집에 와 드러누워서 생각했다. 대체 지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뭘까.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지수의 애틋한 눈길을 거부하지 못하는 걸까. 왜 지수가 여자로 보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재수는 제 마음의 정체를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지수를 향한 제 마음을 정리하고 지수에게도 정리시키려고 만났다가 외려 더 복잡하게 만든 사실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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