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비디오-
봄날 토요일. 알루미늄 새시 일이 없어서 재수는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이틀이나 쉬게 됐다. 사실, 지난겨울부터 새시 일이 확연히 줄었다. 규제강화로 건설 붐이 꺼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재수는 그간 자주 쉬었다. 일도 없는데 괜히 업장에 나가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도 서로 불편하고 서로 눈치 보게 돼서 사장은 전날 나오지 말라고 미리 이르곤 했다. 그래서 재수는 월급을 받을 때마다 미안했다. 사장도 그리 달갑지 않은 얼굴로 월급봉투를 건넸다. 재수는 이제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 때가 온 걸 직감했다.
재수는 오랜만에 봄 향기를 맡으며 압구정동 거리를 걸었다. 어느 청춘 영화에 압구정동 거리가 너무 낭만적으로 나오기에 뜬금없이 그 거리를 걷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것이다. 재수가 사춘기 시절을 통과했던 곳이기도 해서 추억을 더듬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곳은 많이 변해있었다. 백화점은 이름도 바꾸고 더 높아졌으며 거리는 고급 브랜드의 옷가게, 화장품 가게, 뜻을 알 수 없는 이름의 술집들이 즐비했고 인파가 넘쳐나서 번잡하기까지 했다. 거리는 더 화려해졌지만 낭만적이진 않았다. 역시 영화는 영화였다. 추억에 젖고 싶어 자신이 다니던 중학교 정문 앞에 선 재수는 오히려 우울한 감정이 들었다. 재수가 가장 열등감에 시달렸던 곳이었고 과거 기억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재수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재수는 이어폰을 꽂고 큰길을 건넜다. 말로만 듣던 로데오 거리라는 곳을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세 블록쯤 지나 들어선 로데오 거리는 휘황찬란했다. 헤어샵이라고 간판을 단 미용실도 우아하고 고급스러워서 미용실이란 단어를 떠올린 자신이 왠지 창피하기까지 했다. 액세서리를 파는 곳도 그렇고 옷 가게들도 고급스런 상품만 진열돼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도 옷차림부터 여느 동네 거리에서 보기 힘든 세련미가 흘렀고 온갖 네온이 반짝이는 좁은 도로를 외제차가 연이어 인파를 뚫고 지나는 모습에 재수는 영화에서 본 베벌리힐스나 라스베이거스를 떠올렸다. 거리가 풍기는 이미지와 그들의 이미지가 일치해서 재수는 역시 부잣집 사람들은 그들만의 공간에 따로 모여 사는 걸 확인한 것 같아 그 거리를 걷고 있는 자신이 이질적 존재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중학생 시절에도 부잣집 애들은 그들만의 공간에 모였고 놀기도 그들끼리만 모여 놀았던 기억이 떠올라 다시 우울해졌다.
‘근데 이름은 왜 로데오야? 말은커녕 카우보이 한 명 안 보이는구만.’
재수는 괜한 투정으로 우울감을 떨치려 했다. 재수는 쓸데없는 호기심에 이 거리에 온 걸 후회하며 발길을 돌렸다. 영화 한 편보고 하찮은 낭만을 느끼고자 압구정동이란 곳을 찾은 자신을 자책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큰길에 다다라 건널목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던 재수는 문득 건너편에 서있는 한 사내를 발견하고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 낯익은 얼굴이었다. 신호가 바뀌고 그와 점점 더 가까워지자 재수는 그가 군대 고참이자 동기인 유 병장임을 알아챘다. 그는 2주 먼저 입대를 했지만 논산 군번이라는 이유로 부대에서 재수와 동기 취급을 받았다. 빡센 맹수 교육대 출신들은 빡센 신병 훈련을 받았다는 이유로 널널한 논산 훈련소 짬밥을 2주 깎아 대우했다. 군대는 무조건 짬밥이라면서 교육훈련의 강도를 두고 짬밥을 깎다니. 역시 합리와는 거리가 먼 군대였다. 때문에 재수에게는 유 병장에게 존댓말 금지 명령이 떨어졌고 그래서 그와 맞먹을 수밖에 없었다. 재수는 처음엔 유 병장의 군바리답지 않은 곱상한 외모에 호감을 느꼈지만 몇 개월 만에 그 마음을 접었다. 그는 훈련 때마다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 역시나 오리지널 서울 뺀질이였다. 덕분에 같은 서울 출신인 재수는 유 병장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서울 출신들은 왜 그렇게 죄다 뺀질이냐는 이유였다. 그리고 고참들이 그를 재수와 동기 취급을 했으니 동기 관리 잘하라는, 말도 안 되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때문에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훈련에 빠지는 유 병장이 징그럽도록 미웠다.
재수가 그를 아는 체를 할지 지나칠지를 갈등하는 찰나, 유 병장이 재수를 알아보고는 호들갑을 떨며 반가워했다.
“이게 누구야? 여~ 재수, 재수, 노재수.”
이것들은 왜 계급으로 안 부르고 꼭 이름을 부르는 걸까?
“여~ 병장, 병장, 유 병장.”
“이 새끼야. 그게 뭐야. 개그 좀 쌈박하게 못하냐? 하여튼 촌스러운 건 여전해.”
재수는 내키지 않았지만 유 병장이 내미는 손을 잡고 반가운 척 악수를 했고, 근황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얄미워도 3년을 같이 한 군대 동기를 악수만 하고 헤어질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여긴 웬일이냐?”
“나 저 너머에 있는 중학교 나왔잖아. 오랜만에 한 번 와보고 싶어서.”
“오우~ 보기보다 부촌에서 살았네? 그 중학교 부자 학교잖아. 지금은 옥상에 수영장도 있다더라.”
보기보다? 보기에도 내가 가난해 보였단 말인가? 유 병장은 뺀질이답게 말도 얄밉게 했다. 재수는 순간적으로 욱했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서 화를 가라앉혔다. 재수는 알고 있었다. 있는 집 애들과 없는 집 애들은 풍기는 분위기부터 다르다는 걸.
“그러는 너는 여기 웬일이냐?”
살기는 빈민촌 같은 곳에서 살았지만 뺑뺑이 돌려 배정받은 학교가 이곳 학교라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던 걸 굳이 밝히기 싫어서 재수는 다시 근황으로 화제를 돌렸다.
“우리 스튜디오가 여기 있잖아. 저기 건물 보이지? 저기 2층이 내가 다니는 스튜디오야.”
재수는 그제야 유 병장이 입대 전 사진사였다는 걸 기억해 냈다. 웨딩 스튜디오에서 신랑 신부 야외촬영과 실내 촬영, 그리고 결혼식 사진까지 찍는다고 했었다.
“아, 그랬지. 웨딩 사진 찍는다고 했지? 그럼 요즘 많이 바쁘겠다. 봄에 결혼들 많이 하잖아.”
기껏 생각해 주는 것처럼 말했건만, 유 병장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대꾸가 없었다.
“야. 노재수. 군대 동기를 이렇게 길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
“야, 대낮부터 무슨 술이야? 그리고 지금 문 연 술집이 어딨냐?”
압구정동 거리에 들어설 때부터 기분이 우울해졌던 재수는 완곡히 거절하고 싶었다.
“하~ 이런 촌놈. 얌마. 내가 여기 토박이야. 잔말 말고 따라와.”
또 촌놈이란다. 유 병장은 재수를 끌다시피 해서 다시 로데오 거리로 들어섰다. 하필 왜 또 이곳인가?
유 병장은 재수를 끌고 로데오 거리 뒤쪽 골목으로 향했다. 그곳엔 주택가 골목과 어울리지 않게 실내 포장마차가 있었다. 게다가 안에는 대낮부터 손님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유 병장은 사장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손짓을 했고 사장은 두 사람을 위해 밖에 파라솔 테이블을 설치했다. 분명 잘 아는 단골들만의 아지트인 것 같았다. 그곳에서 재수는 유 병장과 싱싱한 회와 함께 이름 모를 일본 술을 세병이나 비웠다. 그리고 날이 어둑해지자 유 병장은 얼큰해진 재수를 이끌고 다른 골목을 찾았다. 재수가 이번에 끌려들어 간 곳은 모텔 건물 지하에 위치한 말로만 듣던 룸살롱이었다. 아무리 반갑기로서니 1차에 이어 2차로 이 비싼 곳에 자신을 데리고 온 유 병장을 재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부촌의 로데오 거리에 있는 스튜디오에 다녀서 월급이 많은가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남대문 백 병장이 자주 간다는 룸살롱이 이런 데구나.’
룸살롱에 들어선 재수는 긴장한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커다란 룸 전체를 휘감듯 둘러져 있는 빨간 소파에 유 병장과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자니 휑한 기분에 자신이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야. 너 룸살롱 처음이야? 하~ 촌놈.”
또 촌놈이란다. 재수가 계속 두리번거리자 유 병장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임마, 누가 처음이래? 여러 번 갔거든? 얼른 아가씨나 불러.”
재수는 더는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 허리를 젖히고, 소파 등받이에 양팔을 쫙 펴 얹고는 허세를 부렸다. 이윽고 늘씬한 몸매의 여자 둘이 들어와 꾸벅 인사를 했다.
“오우~ 예쁜 것들이 들어왔네. 너는 여기 앉고 너는 쟤 옆에 앉아.”
저 새끼가. 처음 보는 여자한테 반말을 해? 게다가 것들이라니. 평소에도 얄밉게 말하는 유 병장은 싸가지마저 없었다.
재수 옆에 앉은 여자는 앉자마자 재수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리고 재수에게 술병을 건넸다. 응? 이걸 왜 날 주는 거지?
“아유~ 오빠. 나도 한잔 달라고.”
주니까 받긴 받았는데 뭘 어쩌라는 건지 몰라 술병만 들고 있는 재수에게 여자가 말했다. 그제야 재수는 두 손으로 공손히 여자의 술잔을 채워줬다. 그리고 얼른 유 병장의 눈치를 살폈다. 제 옆의 여자와 속닥이느라 방금 상황은 못 본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곧이어 모두의 잔이 채워지자 유 병장이 건배를 외쳤고, 다들 잔을 부딪친 후 원샷을 했다. 재수는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켁켁 사레들린 듯 기침을 했다.
“재수야. 너 양주 처음 먹냐? 하~ 촌놈.”
“너 자꾸 촌놈, 촌놈 할래?”
재수가 도끼눈을 치켜뜨자 유 병장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자. 각자 자기소개 좀 해봐.”
그러자 그녀들은 일어나서 제 이름과 장기를 말한 후 꾸벅 인사를 했다. 재수는 문득 자대배치받던 날이 생각났다. 그때도 자기소개를 하고 장기를 보여줘야 했다. 그리고 응원이랍시고 국군 도수체조를 했다가 머리가죽이 벗어질 만큼 대가리박아를 당했다.
‘저 새끼는 군대에선 뺀질뺀질 군바리답지도 않더니 이런 데서 고참 행세 하네.’
재수는 굳이 일어나 자기소개까지 하는 여자들에게 괜히 미안해서 그녀들이 인사를 할 때마다 같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런 재수를 보고 유 병장은 킥킥대고 웃었다.
“아 놔. 룸에서 파트너한테 인사하는 놈은 또 처음 보네.”
‘아, 아가씨가 아니라 파트너라고 부르는 거구나.’
그나저나 이제 유 병장이 자기를 깔보는 것을 더는 참을 수 없어 재수는 결국 욱하고 말았다.
“임마. 파트너라도 예의는 지켜야지. 이 자식이 군대서는 뺀질이더니 사회에선 완전 싸가지네.”
순간, 유 병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싸가지? 야, 노재수. 나, 너보다 고참이야.”
“지랄. 훈련이란 훈련은 죄다 빠져놓고 고참은 무슨..”
“어머. 오빠들 군바리야? 어휴. 고생 많겠다.”
분위기가 험해지자 재수의 파트너가 나섰다.
“우리 제대했거든요? 그리고 파트너 아가씬 그거 그물이에요?”
재수는 파트너의 망사 스타킹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두 여자가 깔깔 웃었다. 하지만 유 병장은 표정을 풀지 않고 술만 털어 넣었다. 재수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한 번 날려 본 개그가 안 먹히자 내친김에 한 번 더 날렸다. 1,2차 비싼 술 얻어먹는 마당에 일단 유 병장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쪽이 신은 그 하이힐은... 어우~ 살벌한데? 완전 무기야. 특공무술 때 표창을 던질게 아니라 하이힐을 던져야겠다, 야.”
재수는 몸서리치는 시늉까지 하면서 유 병장 파트너의 송곳처럼 뾰족하고 높은 굽의 힐을 바라봤다. 그제야 유 병장은 제 파트너의 힐을 보고 표정을 풀고 킥킥댔다. 재수는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음을 알고 건배를 외쳤다.
술이 거나해지자 유 병장은 재수 옆으로 옮겨 앉았다.
“재수야. 너 요즘 뭐 하냐?”
“나? 노가다 뛰어.”
“노가다? 이 새끼, 군대에서도 악바리더니 제대해서도 좆나 열심히네.”
“나는 가진 게 그거뿐이다.”
재수는 한숨을 쉬며 독한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었다. 술이 쓰디썼다.
“너 내일도 일하냐?”
“얌마. 노가다도 일요일은 쉬어.”
유 병장이 갑자기 재수의 어깨에 팔까지 올리며 바싹 다가 않았다.
“잘 됐다. 재수야. 너, 내일 나 좀 도와주라.”
“내가 뭘 도와?”
재수는 유 병장의 팔을 내치며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다. 뭘 도와달라는 것 자체가 의심부터 들 만큼 유 병장은 뺀질이었다.
“하~ 씨발. 아니, 우리 스튜디오에 비디오 기사가 하나 있는데, 이 새끼가 툭하면 펑크를 내더니 내일도 못 나온다네? 하~ 뺀질이 새끼.”
갑자기 허공에 대고 욕을 하는 유 병장을 보고 재수는 누가 누구한테 뺀질이라는 건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왜 웃냐?”
“아냐. 얘기해."
재수가 어물쩍 넘어가자 유 병장은 갑자기 애절한 표정으로 또 재수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 내일 땜빵 좀 해주라.”
“땜빵이라니. 무슨 땜빵?”
“내일 비디오 좀 찍어달라고.”
재수는 대체 무슨 소린지 황당해서 눈만 껌뻑였다.
“비디오 촬영 그거 별 거 아냐.”
“야, 이 미친놈아. 카메라를 본 적도 없는 내가 무슨 촬영을 해. 너 술 취했냐?”
“진짜 별 거 없다니까? 그냥 카메라 메고 내 옆에 서서 버튼만 눌렀다 뗐다 하면 돼.”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됐어, 임마.”
재수가 완강히 거부하자 유 병장은 낯빛을 바꿨다.
“야, 노재수. 동기끼리 이럴 거야? 우리가 동고동락 한 세월이 얼마냐? 근데, 동기가 이렇게 간절히 부탁하는데 생각도 안 해보고... 너 정말 이러기야?”
동고동락? 훈련 때마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주말마다 애인을 호출해서 외박 외출을 나가느라 전투축구도 안 한 놈이 언제 동고를 했단 말인가? 그런 유 병장 때문에 구박을 받느라 같이 동락한 적도 없는 재수는 또 헛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유 병장 얼굴에 배인 서운함이 너무도 짙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를 본 적도 없구만 촬영을 해 달라니... 미친놈아. 부탁할 사람한테 부탁을 해야지.”
“야. 됐어. 그냥 촬영 펑크 내야지 뭐. 재수야. 내가 괜한 부탁을 해서 좆나 미안하다.”
유 병장은 서운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야. 얼마 나왔어. 좆나 많이 나왔지?"
유 병장은 지갑을 꺼내며 제 파트너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 파트너는 계산서를 가지고 오겠다며 나갔다. 그러는 동안 유 병장은 지갑 안을 계속 훑었다.
“하~ 씨발. 오늘 날린 술값이 얼마야?”
그제야 재수는 유 병장이 왜 1차에 이어 비싼 룸살롱으로 자신을 데리고 왔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되지도 않을 일에 헛돈 썼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뺀질이답게 속되 보였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이 승낙할 거라 믿은 유 병장에게 비싼 양주에 비싼 안주까지 얻어먹고 완강히 거부한 자신이 염치없게 느껴졌다. 뱉어 낼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지만 토해내 봤자 누런 위액과 섞인 알콜과 음식찌꺼기뿐일 거였다.
“야. 그거 진짜 버튼 눌렀다 뗐다만 하면 돼?”
유 병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래, 임마. 별거 없다니까?”
“카메라 그거 복잡한 거 아니야? 촬영이라는 게 그리 쉽다는 게 난 도무지...”
“재수야. 딱 내 옆에 서서 내가 누르라면 누르고 떼라고 하면 떼면 돼.”
“알았다. 까짓 거 한 번 해보지 뭐.”“하~ 노재수. 역시 뭐든 일단 들이미는 그 정신, 여전해. 아주 좋아.”
유 병장은 감탄하듯 말하며 계산서를 들고 서 있는 제 파트너에게 외쳤다.
“야, 그 계산서 치우고 한 병 더 가져와. 과일 안주 하나 가져오고.”
다음 날 재수는 방송용 카메라라는 무겁고 해괴한 기계덩어리를 어깨에 메고 덕수궁 돌담길에 서서 뷰 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 병장말대로 찍는 행위는 쉬웠다. 녹화 버튼을 눌렀다 뗐다만 하면 됐다. 촬영 전 카메라에 테이프를 넣고 오디오 체크와 색감을 맞추는 등 복잡한 과정이 있었지만 그건 유 병장이 다 해줬다. 그런데 뷰파인더를 처음 눈에 댔을 때 신랑 신부가 눈으로 보는 것과 사뭇 달라서 재수는 당황했다. 그들이 무척 작아 보이는 것은 당연했고 카메라를 움직일 때마다 그들의 이미지가 확확 달라졌다. 때론 어색하고, 때론 자연스럽고, 때론 답답했다가 때론 아름답기도 했다. 재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유 병장은 ‘눌러’ ‘때’라고 명령하기만 했지 어떻게 해야 사각의 틀 안에 인물들이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재수는 어차피 땜빵하러 나온 거 그냥 되는 대로 찍자는 심정으로 신랑 신부를 제 마음대로 사각 틀 안에 넣었다. 그렇게 뭘 어떻게 찍었는지 모르게 반나절의 촬영이 끝났다.
그날 저녁, 스튜디오 사장실에서 재수는 긴장한 상태로 뻘쭘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장과 유 병장이 재수가 찍은 비디오를 모니터로 뜯어보고 있었다. 재수를 뒤에 두고 둘이 화면을 보고 쑥덕쑥덕 대니 재수는 뻘쭘했고, 혹여나 그들이 재수를 욕하고 있는 것 같아 긴장됐다. 슬쩍슬쩍 엿본 모니터엔 자신이 찍은 화면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왜 긴장을 하지? 지들이 급해서 땜빵해달라고 해서 난생처음 카메라를 멨는데. 그런 내게 설마 뭐라 하진 않겠지. 만약 뭐라 하기만 해 봐라. 아주 그냥...’
재수가 대들 각오를 다지는 순간 사장과 유 병장이 VCR을 끄고 돌아섰다. 사장의 얼굴이 굳은 듯 진지해서 재수는 다시 한번 맞받을 준비를 했다. 괜히 땜빵을 부탁해서 사람 뻘쭘하고 쓸데없이 긴장하게 한 유 병장이 군대에서보다 더 얄미웠다. 상황이 이런데 유 병장은 실실 웃고 서 있어서 재수는 그 머리통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재수라고 했나? 노재수?”
“네.”“자네 우리 스튜디오에 들어 올 생각 없나?”
으잉?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
“네?”
재수는 지금 뭘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우리 스튜디오에 입사할 생각 없냐고 물었네.”
분명 사장은 재수에게 자기 스튜디오로 입사를 권유하고 있었다. 재수는 사장과 유 병장을 번갈아 볼 뿐 어리둥절해서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자네 카메라 처음이라는 말 진짠가?”“네. 사진 카메라는 봤지만 비디오카메라는 오늘 처음 봤습니다.”
“음.. 자네가 촬영한 화면 보니까 처음 찍은 솜씨가 아닌 거 같아서 물어본 거야. 아무튼 무척 훌륭해. 그래서 내가 자네를 우리 회사로 데려 오고 싶어서 그래. 어때, 우리랑 함께 일해 보겠나?”
재수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도 않고 뜬금없고 급작스런 제안을 받으니 어찌해야 할지 몰라 유 병장만 바라봤다. 유 병장은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저 말씀은 감사한데, 제가 이쪽으로는 아는 게 없어서.. 잠시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유 병장은 재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황급히 사장에게 눈짓을 한 후 재수를 끌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야. 너 왜 그래? 너 이 업계 발 들이기가 쉬운 줄 알아? 대학 사진과 나온 애들도 테스트받고 겨우겨우 들어오는 데야. 사장이 그런 학력, 경력도 없는 너를 특채하겠다는데, 생각하긴 뭘 생각해?”
“얌마. 그러니까 생각해 본다는 거라고. 나 이런 거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어. 이쪽 일은 아예 모른다구. 근데 갑자기 이 일을 하라고 하면, 앞으로 내가 해낼 수 있는지는 좀 생각해봐야 할 거 아냐?”
“야~ 노재수. 제대하더니 많이 변했네. 무작정 들이밀던 무대뽀 정신은 어디 가고..”
그랬다. 재수는 언젠가부터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어쩌면 소심하다 할 만큼 신중해졌다. 무언가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나면 꼭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상황도 재수의 진로가 결정되는 순간이니 앞으로 제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몰라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 바닥은 생판 모르는 데다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카메라 기사가 된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더욱 그랬다.
재수는 궁금했다. 난생처음 보고 만진 카메라인데, 왜 사장이 초짜가 찍은 게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잘 찍혔을까. 혹시 내 안에 천재성이 있는 거 아닐까? 그럴 리 없는 걸 아는 재수는 옆에서 담배만 뻐끔거리는 유 병장의 입에서 담배를 뺏어 물고는 한 모금 깊이 빨아 내쉬었다. 그때, 문득 지금의 기이한 상황을 이해할 단서가 번개처럼 뇌리에 꽂혔다. 그건 바로 중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영화광으로 산 재수의 취미가 그것이었다. 늘 보던 영화 속 화면이 어느새 자신의 무의식 속에 스며서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사각의 틀을 구성한 것 아닐까?
‘아, 이게 또 여기서 이렇게 먹히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재수는 갑자기 용기가 불끈 솟았다.
‘그래. 부딪쳐 보자.’
“유 병장. 할 게. 내려가자.”
아무리 모르는 이쪽 바닥이지만 뺀질이 유 병장도 하는데 자신이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도 용기를 내는데 한몫했다. 유 병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재수, 재수, 노재수. 역시 살아있네.”
유 병장이 재수의 어깨를 탁 치며 말하자 재수는 짐짓 태연한 듯 피식 웃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입대할 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이 바닥에 적응할 생각을 하니 입대할 때처럼 긴장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게 재수는 군대에 이어 또 한 번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