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내 인생 35화

-신분상승-

by 미스틱

재수는 열등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국민학생 때부터 있는 집 애들과 없는 집 애들이 외모부터 해서 풍기는 분위기조차 다름에 위축됐었다. 재수가 그것이 열등감이란 걸 알고 그 감정에 본격적으로 시달리기 시작한 건 중학생 때였다. 이미 남녀 합반인 데다 사춘기 시절에 올바른 성의식을 고양한다는 목적으로 전국 최초 중학교 남녀 합짝을 시행한 학교는 올바른 성의식을 함양시켰는지는 모르지만, 차별 의식은 바로 잡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교사가 먼저 차별을 했다. 교무실에서 손들고 벌을 서면서 교사에게 건네지는 노란 봉투를 재수는 많이도 봤다. 그리고 교사는 노골적으로 봉투 값을 했다. 봉투의 자녀들은 특별대우를 받았고 재수와 같이 봉투는커녕 육성회비조차 밀리는 빈촌 애들은 노골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그런 봉투 자녀들은 꼭 재수와 같은 빈촌 애들을 노골적으로 꺼려했다. 한창 사춘기인 재수는 사내놈들이 무시하거나 꺼려하면 바로 들이받아 분을 풀었지만 여자애들이 꺼려하고 무시하면 어찌할 도리가 없어 속만 끓여야 했다.

전국 포크댄스 경연대회에 출전하기로 한 재수네 학교가 거의 매일 오후 연습을 할 때였다. 곡의 리듬에 맞춰 파트너가 계속 바뀌는데, 다른 남자애들 손은 잘 잡으면서 재수의 손만 안 잡는 여자애가 있었다. 꺼리는 게 분명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연습 시간만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던 중 그 여자애가 재수의 팔소매만 잡고 몸을 비틀어 돌다 기어코 넘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음악 교사이자 댄스 지도 교사는 애꿎은 재수의 머리통만 쥐어박았다. 재수가 이유를 설명해도 교사의 구타는 계속 됐다. 울화가 치밀고 억울해 땅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사건은 이후로 재수가 머리통 맞기를 가장 싫어하게 된 계기가 됐다. 연습이 끝나고 우르르 교내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던 중, 울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씩씩대던 재수의 눈에 하필 그 애의 엉덩이가 떡하니 들어왔다. 부잣집 애답게 비싼 ‘죠다쉬’ 청바지의 브랜드 상징인 말대가리가 재수의 눈앞에서 실룩거렸다. 그 말대가리는 분명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다. 순간, 재수는 자기도 모르게 냅다 발이 올라가고 말았다. 그 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재수는 교무실에서 육성회장 딸이 엉덩이를 걷어 차인 사실에 기겁을 한 담임에게 죽도록 맞았다.


빈촌에서 자란 재수가 서울 강남에서도 가장 부촌인 압구정동 한 복판에 있는 그런 학교에서 생활했으니, 위화감은 재수만 느낀 게 아니라 부잣집 애들도 느꼈다. 분임조를 짤 때도 재수는 다른 애들의 표정과 말투에서 못마땅해하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마도 국민학교 시절부터 체화된 감각이었을 테다. 방과 후에도 그들은 그들끼리만 모였기 때문에 재수는 자신과 환경이 비슷한 몇 안 되는 애들과 어울려야만 했다. 그들에게 느끼는 열등감을 어찌 다뤄야 할지 모르는 재수는 그들을 이기기 위해 기를 썼다. 공부머리도 안되지만 비싼 과외를 하는 그들을 이길 수는 없어서 집 앞 배추밭에 말뚝을 박고 타이어를 달아 배팅 연습을 하고, 다녔던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경비 아저씨가 쫓아낼 때까지 공을 찼다. 부잣집 놈과 가난한 놈 차별 없는 건 스포츠뿐이었다. 야구든 축구든 반 대항 시합은 선수를 선발하는 데 있어 무조건 잘 치고 잘 차는 놈이어야 했다. 손바닥 껍질이 벗겨지도록 타이어를 치고 분풀이하듯 공을 차면서 재수는 교사인지 학교 애들인지,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러나 그들이 재수의 실력에 감탄하고 환호해 봤자 애초 운동을 못해서 차별당한 게 아니었기에 재수는 복수에 성공했다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 무시하고 깔보는 놈들을 쥐어 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다시는 재수를 깔보고 무시하진 않았지만 친구가 될 순 없었다. 재수는 그들과 같아진다는 건 애초 불가능하다는 걸 그때부터 알기 시작했고 세상이 더럽게 불공평하다는 것도 그 시절 어렴풋이 깨달았다. 때문에 이후 재수는 굳이 그들과 같아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나름대로의 세상을 살기로 했다. 그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진다면 그 속에서 살기로 다짐했다. 재수가 영화에 빠져든 건 그 때문이었다. 허구의 세상으로 도피한 것이다.


그런데 프로덕션 입사 후 재수는 불가능이라 여겼던 신분 상승이 이뤄진 기분이 들었다. 비록 촬영 보조지만 업계 사람들이 회사 이름만 대도 부러운 시선을 보냈고, 누군가와 명함을 주고받을 때도 당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됐다. 지수와 데이트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수의 예쁜 얼굴과 외모에서 풍기는 고급스런 이미지에 주위 사람들이 흘깃거리면 재수는 괜히 제 어깨가 으쓱해졌다. 지수는 데이트를 할 때면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 커피숍으로 재수를 데리고 갔다. 계산도 지수가 다 했다. 재수는 자존심 상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계산을 할 수는 없었다. 모아 놓은 돈은 그렇게 허투루 쓸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지수를 흔한 선술집이나 호프집에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고급진 분위기의 지수를 보면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지수는 재수에게 고급 승용차도 뽑아줬다. 재수는 부담되었지만 운전 못하는 지수가 드라이브 가고 싶어서라니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이전의 재수라면 자존심 때문에 펄쩍 뛰었을 테지만, 지수의 호의에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그새 속물이 됐는지, 속으론 난생처음 자기 차가 생긴 것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재수는 쉬는 날이면 지수와 함께 경춘 국도를 타고 낭만을 즐겼으며 재수가 웨딩 비디오 찍던 풍경 좋은 곳에서 지수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식당 개 삼 년이면 라면을 끓인다고, 재수는 유 병장의 어깨너머로 배운 사진 찍는 기술을 활용했으니 그 사진은 지수를 감동시켰다.


“재수 씨, 확실히 감각 있어. 어쩜 사진도 이렇게 잘 찍어?”


지수는 재수가 찍어 준 사진을 보며 감탄을 과장되게 표현했다.


“재수 씨는 세상에서 가장 빨리 카메라 입봉 한 조수로 기네스북에 오를 거야.”

“기네스북이 그렇게 할 일이 없대? 기껏 프로덕션 입봉 기록이나 재게?”

“음...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여간 이 정도 감각이면 영화 쪽도 노려 볼만한 거 아냐?”


재수를 늘 존중할 뿐 아니라 때때로 과장되게라도 치켜세워주는 이는 지수가 유일했다. 재수는 그게 고마웠다. 자신과는 비교가 안 될 훌륭한 환경에서 곱게 자란 지수가 자신을 존중해 주는 게 고마웠다. 가진 것도 없고 내세울만한 무엇도 없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는 게 고마웠다.


영상 바닥 사람들은 어딘가 남다른 외모와 패션으로 자기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같아지고 싶었던 재수는 지수로 인해 어느새 그들보다 더 세련된 모습으로 변신해 갔다. 지수와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때, 매번 옷을 사 입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타일을 만들어 준 지수를 자신과 동등한 모습으로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 자존심 상했지만 애써 거부하지 않았다. 자신도 그 바닥에서 더 이상 열등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에 지수가 입히는 대로 만들어주는 대로 자신을 맡겼다. 그리고 변한 자신의 모습을 회사 사람들도, 친구들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걸 느꼈고 은근히 즐겼다. 지수가 회사에 들를 때면 다들 지수를, 그리고 자신을 부러운 듯 존중하는 걸 즐긴 것이다. 태어나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시선이었다.


그날도 지수는 재수를 데리고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역으로 향했다. 백화점 옷들보다 질은 떨어질지라도 남대문 시장 못지않게 다양한 옷들이 즐비한 지하상가를 가보기로 했던 것이다. 둘이 한참 담소를 나누다 보니 지하철은 어느새 터미널 역에서 도착했다. 열차가 막 정차를 하는 순간, 공교롭게도 반대편 열차가 역사로 들어왔다. 둘이 막 내리려는 순간, 재수는 예의 그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뭔가 황당하거나 놀랄 일이 생길 때 드는 그 기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뒤를 돌아본 재수의 눈에 막 정차를 하는 반대편 열차 창에 한 여자가 포착됐다. 정음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작은 어깨, 우수에 젖은 눈. 정음이 분명했다. 재수의 뇌에 정음의 모습이 각인 됐을까? 재수는 아무리 많은 인파 속이라도 정음의 모습을 가려낼 수 있었다.


재수는 뭘 생각할 틈도 없이 전력질주를 했다.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오르고 개찰구를 허들 넘듯 뛰어넘어 반대편 승강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아마 그 순간이 재수의 역사상 가장 빨리 달린 기록이 될 만큼 육상선수 저리 가라의 속도였다. 그러나 열차의 문은 속절없이 닫히고 재수는 닫힌 문을 한스럽게 쳐다볼 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덜컹 거리며 열차가 출발하는 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재수는 허탈함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돌아섰다.


‘왜 뛰었을까? 봐서 뭐 하려고.’


재수는 다시 반대편 승강장으로 가며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냥 반사적으로 뛰긴 뛰었는데 왜 뛰었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미련이 남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남았다면 차라리 원망의 마음이 남아있었다. 헌신짝 버리듯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난 그녀였다. 그런데 왜 뛰었을까?

“뭐야. 사람 혼자 두고...”


지수는 놀란 표정에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아... 그게.. 군대 고참을 본 것 같아서..”

“무슨 원수 졌어?”

“아냐. 가자.”


재수는 급작스럽게 지수에게 미안해졌다. 그녀를 혼자 두고 정음에게로 달려간 자신이 천하의 죄역대인이 된 기분이었다. 지수는 손을 잡아끄는 재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재수는 뜨끔했다. 사람 속을 꿰뚫는 재주가 있는 지수였다. 재수는 지수가 무슨 말이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하며 인파 속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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