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봉-
지수와 사랑을 키워가고 목표에 성큼성큼 다가서며 모처럼 탄탄대로를 걷던 재수에게 다시 한번 불운이 닥쳤다. 역시 어이없는 이유로 말이다. 연초부터 사회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찮더니 연말쯤, 기업이 내는 건 줄 만 알았던 부도를 국가가 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멀쩡히 다니던 회사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퇴사당한 직장인들이 거리로 내몰렸고 서울역엔 노숙자들이 넘쳐났다. 방송사는 외주제작을 자체제작으로 급선회했고 기업은 홍보비부터 줄였다. 재수네 회사도 IMF의 한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곧바로 인원감축에 들어갔다. 재수는 지수 아버지 빽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많은 직원들이 눈물을 머금고 퇴사해야 했다. 그중엔 카메라 감독도 있었다. 그리고 사장은 재수를 바로 카메라 감독으로 입봉 시키려 했다. 이제 카메라 보조 4개월 차인 재수에게 입봉을 하라니. 재수는 큰 부담을 느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인원 감축뿐 아니라 매출이 쪼그라드니 그만큼 회사 규모도 작아져 외주 제작사의 외주를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재 하도급 업체가 된 것이다.
재수는 촬영감독이 나가고 입봉 소식을 듣고 나니 막연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커지더니 가슴 한 복판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재수에겐 기대고 의지할 누군가의 존재 의미를 절실히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재수는 느닷없이 얹힌 책임감에 무거운 며칠을 보냈다. 그 바닥에서 딱히 기댈만한 선배나 친구가 없던 터라 혼자 그 무게를 이겨내야 했다. 촬영 관련 서적을 찾아 뒤졌지만 현장은 매번 다른 내용, 늘 다른 변수가 존재했으므로 그 분야의 대응 매뉴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면 주구장창 영화를 음소거 상태로 틀었다. 소리가 들리면 어느새 스토리에 빠져들기 때문에 화면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많이 본 덕분으로 무의식 속 장면이 위기의 순간에 기특하게 튀어나오길 기대했다. 그러던 중 기어이 사장의 호출이 있었고, 곧 입봉 촬영이 있을 거라는 중차대한 얘기를 사장은 아주 쉽게 던졌다. 재수는 어떤 촬영인지를 다급히 물었다. 촬영 내용을 안다 한들 해본 적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별 도움이 안 될걸 알면서도 일단 두려움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사장은 모른다는, 무척 무책임한 말을 대답이랍시고 천연덕스럽게 했다. 무슨 재벌 회장도 아니고, 이제 직원 열 명도 안 되는 주먹만 한 회사 사장이, 거기다 직원 지출 내역까지 직접 체크하는 양반이 촬영 내용을 모르다니.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지됐다. 역시나 불안한 예감은 기어이 들어맞아서 잠시 후, 외주 제작사 PD와 조연출이 박카스 박스를 들고 찾아왔다. 사장은 아끼는 후배라는 PD에게 재수를 앞으로 그들과 가족처럼 지낼 카메라 감독이라고 소개했다.
‘가족처럼 지내다니. 다른 회사로 날 팔아넘기는 것인가?’
뭔가 매우 이상한 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날 그 자리 자체가 이상했다.
군대로 치면, 이제 막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소대장으로 배치된 소위와 직업 군인인 선임하사나 병장이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치르는 상황이었다. 소대장은 계급은 높지만 내무 생활 전반이나 훈련 등의 실전에선 짬밥에서 밀리기 때문에 일정기간 하사관이나 짬밥 꽉 찬 병장들에게 눈치와 무시를 받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장교는 장교대로 가오가 안 서고, 병장은 군대는 계급이라 멍청한 명령이라도 따라야 하니 깔보고 무시하며 따르는 척 안 따르기 때문에 그들 사이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그런 관계인 것이다. 그날 그 자리가 딱 그랬다. 재수 앞의 조연출은 연출부이지만 초짜 조수이고 재수는 연출부의 지시를 받는 카메라 부문이지만 엉겁결에 조수 딱지를 떼고 입봉 할 감독이므로 조연출은 재수를 짬밥 많은 병장으로, 재수는 조연출을 햇병아리 소대장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둘 사이에는 미묘하고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기싸움 팽팽히 흐르고 있었다. 촬영감독이 다른 건 안 가르쳐줬어도 현장에선 누구에게도 기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걸 몸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사장과 PD가 마주 앉아 고리타분한 ‘왕년’ 질을 하는 동안 재수는 박카스를 쪽쪽 빨며 조연출의 어벙한 얼굴에서 허점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재수는 그가 많이 낯익은 얼굴임을 알아챘다. 앗! 조연출은 재수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허구한 날 촬영을 다녀서 그런지 얼굴이 새까매져서 처음엔 못 알아봤지만 땅딸만 한 키에 눈만 부리부리한, 게다가 조심조심하는 말투까지, 고교 시절엔 감히 재수에게 엉기지도 못하던 범생이 그 녀석이 맞았다.
“저기.. 혹시 나 몰라요?”
“...알아요.”
“맞지? 너 기준, 강 기준 맞지? 강가딘.”
“...응”
녀석의 별명은 강가딘이었다. 영화 ‘강가딘’의 주연배우 이름인데, 꼭 이름이 비슷해서 별명을 그리 붙인 건 아니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물 심부름꾼이라 그리 붙인 거였다. 고교시절에 좀 사는 집 자식이라고 재수를 대놓고 무시했다가 흠씬 두들겨 맞은 후 빵 심부름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녀석이라 분명 들어올 때부터 자신을 알아본 게 틀림없었다. 녀석은 생긴 대로 공부를 워낙 잘했던 놈이라 어디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따거나 판, 검사를 점쳤던 놈이었는데, 이렇게 예능 업종에서 만날 줄이야. 재수는 쾌재를 불렀다. 재수는 녀석에게 눈짓으로 옆 자리로 옮기자는 신호를 보냈다. 사장님과 PD가 ‘왕년’ 질에서 비즈니스 썰로 넘어가는 동안 재수는 조연출에게 과거를 상기시켜 확실하게 서열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재수가 자리를 옮겨 범생이 조연출에게 과거를 상기시키는 동안, 한쪽 귀로 들리는 사장과 PD의 대화가 아무래도 심상찮았다. 들어보니 그 PD가 속한 외주 제작사는 이제 주먹만 해진 재수네 회사보다 더 작은 코딱지만 한 방송 전문 외주제작사인데, 불규칙한 촬영일정 때문에 카메라 부문에 직원을 따로 두지 않고 촬영 일정이 잡힐 때마다 그때그때 외주를 준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그때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원을 두는 거 아닌가?’
재수는 이상한 회사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앞으로 따로 촬영만 전담할 카메라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자연스러운 대화 같지만 살펴보면 웃긴 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 촬영 부분만 재하청을 주는 셈인데, 대개 하청은 종합 제작사가 부문 제작사에게 주는데, 이 경우는 정 반대로 코딱지만 한 회사가 주먹만 한 회사에게 하청을 주는 이상한 모양새인 것이다. PD는 그런 모양새를 의식한 듯 친분을 무기로 부탁형식을 취했지만, 전담 카메라 운운할 때부터 재수는 눈치채 버렸다. 역시 팔려가는 것임을.
회사 입장에선 초짜를 내부 프로젝트에 투입하느니 외부로 돌려 월급 충당하고, 재수가 방송물 촬영을 하면 소속이 자기 회사니 어느 프로덕션이나 원하는 다양한 방송 제작 경력도 쌓고, 꿩 먹고 알 먹고,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거였다. 재수는 잠시 머슴이 된 기분이었다가 재빨리 생각을 고쳐먹었다. 귀동냥으로 듣은 바, 이 바닥 습성상 한 회사에서 5년 이상 일하는 장기 근속자가 드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회사 규모가 크건 작건, 월급이 많건 적건 간에 자신만의 경력을 쌓는 게 스카우트 시장의 골드 멤버로 가는 지름길임을 알기에 서운함은 잠깐이었다. 팔려가든 말든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차라리 기왕 한 팀으로 일하게 된 조연출 동창과 자신의 직업적 위치를 재정립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쉽게 결론을 낼 수 없었다. 조연출이면 프로그램에서 분명 자신보다 위 직책인데 녀석은 초짜 시다바리, 자신은 이제 카메라 감독. 하청 받는 사장이 하청 주는 PD에게 반말하고, 카메라 감독이 조연출에게 임마, 임마 거리는, 계급 정리하기엔 매우 희한한 그림이 한 사무실에서 펼쳐지고 있어서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한때 자신의 시다바리였던 녀석이 자신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그림을 머릿속에서 지우느라 이제 자신에게 떨어질 첫 촬영이 하필 현장 학습 한번 못 한 교양 다큐라는 것과 PD가 인상 더럽고 제법 꼬장꼬장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도 생각 잊고 오직 동창 시다바리 놈이 자신을 만만히 보지 못하도록 어떻게 옛 고교시절의 고통을 절절하게 떠올리게 할 것인가, 그것만 궁리했다.
어느새 PD와 사장은 비즈니스 대화를 끝내고 악수를 하고 있었다.
“노 감독. 그럼 내일 봐. 잘 부탁하고..”
“...? 아, 네.”
‘내일?’
PD는 그렇게 재수에게 깜짝 폭탄을 안기고 총총 사라졌고 사장은 재수의 눈을 피해 사장실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야, 강가딘. 내일이라니. 무슨 촬영인데?”
“교양 다큐...”
“그니까 뭘 찍냐고?”
“몰라..”
“이런 등신새끼. 넌 조연출이 뭔 촬영인지도 모르냐?”
“PD님이 아직 설명을 안 해주셨어.”
“으이구.. 니네 회사 콩가루구만?”
“......”
다큐 촬영에서 직간접적인 경험은 필수조건이다. 방향을 제시하는 큰 틀에서의 대본이 있지만, 실 대본은 찍은 영상을 보고 작가가 다시 만들므로 촬영하는 데는 별 의미가 없다.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따라 세부 대본이 얼마든지 바뀌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PD가 대략의 윤곽만 가지고 지휘하고, 카메라는 알아서 대상을 찾아서 찍어야 하며, 상황판단도 기민해야 한다. 준비된 배우와 배경으로 연출하는 게 아니므로 현장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메라 감독은 촬영 중에도 다음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야 한다. 한쪽 눈은 뷰파인더로 피사체를 쫓음과 동시에 다른 한쪽 눈은 시야 내의 상황을, 머리는 이후 펼쳐질 상황을 예측해야 한다.
이 모든 걸 글로 배운 재수는 몹시 불안했다. 짧은 경험상, 콘티 촬영이야 밑그림이 미리 나와 있어서 현장을 가늠해 자신이 찍을 장면을 미리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나 있었다. 다른 연출 촬영도 현장에서 카메라 NG가 나면 오케이 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찍으면 됐다. 그 시간 동안 PD의 짜증과 스텝들의 비난의 눈초리만 꾸역꾸역 삼키면 될 일이다. 막 입봉 한 카메라 감독이라는 어드벤티지까지 계산하면 입봉에선 가장 이상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보통의 입봉 과정은 여차하면 두 팔 걷어붙이고 땜빵을 해줄 선임을 옆에 두고 가급적 안정된 심리상태로 촬영에 임한다. 그런데 지금 현장이 무슨 유치원 재롱잔치도 아니고, 바닥 경력 4개월짜리 생 초짜를 떡하니 현장으로 혈혈단신으로 보내는 사장은 없을 것이었지만, 재수네 사장은 그리했다. 콘티 촬영도 아니고 순간을 놓치면 끝인 다큐 촬영에 재수를 보내기로 했으니, 보내는 사장이나 가는 재수나 둘 다 미친 건 마찬가지였다. 하다못해 사장이 일말의 양심이 있었다면 다른 대체 인원을 투입했어야 했는데, 사장이란 사람은 원체 앞뒤 안 가리고 지르고 나서는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라 그러려니 치고, 그럼 왜 재수는 생 초짜 주제에 베테랑급 미션을 넙죽 받았느냐. 이유는 딱 하나였다. 첫 촬영 현장에서 감격에 젖어 초고속 입봉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덕분에 군대에서의 무대뽀 정신이 한창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내 후회하기 시작했다.
‘장면을 놓치기라도 하면 무슨 개쪽인가? 방송 펑크 나면 지수 아버지는 무슨 낯으로 대한단 말인가?’
재수는 그날 밤, 한마디로 좆 된 상황에 한숨도 못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