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내 인생 39화

-재회 2-

by 미스틱

꽃바람 부는 5월. 재수는 지수와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일생일대의 중차대한 결혼이지만, 어차피 이렇게 될 거란 걸 오재 전부터 재수는 직감하고 있어서 무덤덤했다. 보통 결혼을 앞둔 신랑, 신부는 예식장 구하랴, 예물 맞추랴 바쁘고, 양가 부모님은 살 집과 혼수 때문에 정신없이 바쁠 것인데, 재수와 지수는 바쁠 게 하나도 없었다. 재수는 양가의 살림살이가 차이가 많이 나면 사돈끼리도 싸운다는 걸 웨딩비디오 찍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수는 ‘결혼 비용’이란 제목의 예산서를 3장 프린트해 지수 부모님께 1장, 제 부모님께 1장 그리고 지수에게 1장씩 건넸다. 예산서라 봤자 A4 용지 반도 못 채운 내용이라 처음엔 지수 부모님이 펄쩍 뛰었다.

1. 예물 없음.

2. 혼수 없음

3. 살 집은 부모님이 가게에 딸린 방으로 들어가고 부모님 사시던 코딱지만 한 아파트에서 살기로 함.

4. 음식 값은 축의금으로 충분할 테고, 신혼여행은 내년에 돈 모아서 갈 것임.

5. 예식장은 아버지 친구분이 택시를 오래 하셔서 교통회관에서 이주 저렴한 가격으로 치르기로 함.

6. 사진과 비디오는 유병장이 찍어주기로 했음.

-이상-


“아버님. 결혼식이라는 게 그때 잠깐 기분 느껴보자는 허례인데, 그러자고 큰돈을 들여야겠습니까? 예물은 살면서 선물로 사주겠습니다. 집도 좁지만 지수와 제가 착실히 모아서 큰집으로 이사 가겠습니다. 그간 아버님께 신세를 졌지만 이젠 저와 지수 힘으로만 살고 싶습니다.”


뒷목을 잡고 펄쩍 뛰는 지수 아버지 앞에서 재수는 단호하게 얘기했다.

“그래도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지수 아버지는 아예 드러누울 태세였다.


“아버님이 주례를 서 주십시오. 그리고 주례사에서 이 모든 걸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사위 될 놈 고집 때문에 간소하게 하는 걸 이해하실 겁니다.”


재수와 지수 부모님의 갈등은 며칠 동안 이어졌지만 재수는 1주일 정도 후 지수 부모님께 승낙을 받아냈다. 아마도 지수가 설득을 했을 것이다. 재수 부모님은 어차피 재수 맘대로 거사를 치를 것임을 알고 토씨하나 달지 않았다. 지수 역시 재수의 고집을 알기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재수는 부모님이 살던 집이라 지수가 불편해할까 싶어 퇴근 후 직접 도배를 하고 페인트를 사서 직접 칠하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때문에 머리카락에 페인트를 묻힌 채 출근하기 일쑤였지만 다들 고생한다며 격려를 했지, 핀잔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혼자만 바쁘게 결혼준비를 하던 중 뜬금없는 전화가 왔다.

“여~ 재수, 재수 노재수.”


덕환이었다. 제대할 때 마지막으로 봤으니 벌써 4년 만이었다. 녀석은 이벤트 기획사를 운영한다고 했다. 녀석의 기질과 맞는 길을 선택했구나 싶었다. 다신 안 볼 줄 알았는데, 녀석이 먼저 연락을 한 게 뭔가 찜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곤란한 부탁을 했다. 자기 회사에서 패션쇼를 여는데 촬영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시상식을 봤다나? 재수를 촬영팀으로 불러 홍보수단으로 쓸 계획이었다. 그러면 관객이 훨씬 많아질 거라는, 녀석 다운 꼼수를 자랑이랍시고 늘어놨다. 하지만 패션쇼 같은 행사촬영은 중계 방식이라 재수네 회사가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덕환아. 우린 그런 거 안 해. 중계 장비도 없어.”

“노재수, 너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너 때문에 3년을..”

“알았다, 알았어. 해 줄게. 장비 빌리지 뭐.”


재수는 군대 3년을 떠올리기도 싫고 자신 때문에 덕환이 그지 같은 부대로 같이 재 차출 된 건 더욱 떠올리기 싫었다. 지우고 싶은 과거였다. 하는 수 없이 덕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이것으로 녀석에게 진 빚은 다 갚는 걸로 약속했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번쩍이고 모델들이 근사한 스텝을 밟는 화려한 무대가 펼쳐졌다. 젠장. 패션쇼라더니, 모델들이 입은 건 빤스와 브라자 뿐이었다. 속옷도 패션이란 말인가? 패션엔 꽝인 재수는 속옷을 입고 쇼를 한다는 자체가 이해가 안 됐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같이 톡 하면 부러질 듯 나무젓가락처럼 말랐다. 대체 저 다리로 제대로 걷는 게 희한할 정도였다.

카메라는 총 5대가 동원 됐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재수는 이번 기회로 덕환에게 진 빚을 다 갚은 걸로 약속했기 때문에 기왕 해주는 거 제대로 해주기로 했다. 동원된 카메라맨들은 회사 직원 둘, 프리랜서 셋으로 채웠다. 연출 부스 중계석에 앉은 재수는 각각의 카메라를 조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번, 무대 전체 잡고, 2번은 모델 전신 쫓아가. 3번은 모델 하반신부터 상체까지 틸트 업하고.. 4번, 새로 나오는 모델 전신 잡아. 5번은 새로 나오는 모델 하반신부터 틸트 업하고..”


그저 TV에서 본 패션쇼대로 앵글을 잡기로 했지만 카메라들이 재수 맘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다들 경력이 있는데 자꾸만 엉뚱하게 모델 하반신에 머물러 움직일 줄 몰랐다.


“야. 정신 안 차릴래? 내가 피사체에 감정 담으랬지 여자한테 감정 담으랬어?”


이유는 뻔했다. 재수 눈에는 하나 같이 젓가락 같구만, 카메라맨들은 모델들 몸매에 홀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델들 모두 실오라기 같은 천 쪼가리로 중요 부위만 가렸을 뿐 나체에 가까웠다.


어쨌건 두 시간여의 쇼가 끝나고 디자이너와 모델들이 함께 관객에게 인사를 하는 피날레 시간이 됐다. 먼저 모델들이 나와 인사를 하고 마지막에 들이 디자이너를 모시고 나오는 식이었다.

‘웃기고들 있네. 그냥 같이 나와 인사하면 될걸..’


재수는 탐탁지 않은 촬영에 진땀을 뺀지라 어서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자, 자. 마지막이니까 끝까지 정신 차리고.. 2번. 디자이너 나오면 전신 잡고 3번은 디자이너 얼굴 클로즈업해. 4번은 무대 인원 떼샷 잡고, 5번은 관객들 반응 잡아.”


이걸로 덕환에게 진 빚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재수는 긴장이 풀려 허리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드디어 모델들 인사가 끝나고 그들이 박수를 치자 디자이너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 꼴이 가식적이라 재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3번 클로즈 업. 오케이! ...응??!!! 저거!!!!”

순간, 재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이 휘둥그레져 벌떡 일어나 카메라와 통신용으로 쓰는 헤드셋을 벗어던졌다. 옆 조명 팀과 음향 팀이 재수의 행동에 무슨 일이 터진 줄 알고 무대와 재수를 번갈아 봤다. 모니터에 나온 디자이너는 다름 아닌 정음이었다. 대체 이게 웬일인가. 하필 여기서 왜 또 정음이 나타난단 말인가. 그녀와 자신은 정녕 끊지 못할 인연이란 말인가?


“지금부터 4번 카메라만 무대 고정으로 가고 나머진 카메라 접으세요.”

재수는 다시 헤드셋을 끼고 다급히 말한 후 다시 헤드셋을 벗어던지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촬영 감독님!! 무슨 일이에요?"


조명 팀과 음향 팀 감독들이 달리는 재수를 보고 외쳤으나 재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무작정 뛰었다.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서와 똑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왜 뛰지? 봐서 뭐 하려고?'


미련이 남았을까? 그건 아니었다. 그럼 따지고 싶었을까?

이유를 모르고 뛰어 들어간 무대 뒤 탈의실엔 모델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꺅!!!!”


재수가 ‘아차’ 함과 동시에 비명이 터졌다. 재수는 반사적으로 돌아서 나가려다 열린 문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대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은 재수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탈의실을 나왔다.

‘여자 목욕탕에 남자가 들어가면 저런 반응이 나오겠지? 아니구나. 경찰에 질질 끌려가겠구나. 근데, 관객들 앞에서는 실오라기 같은 것만 입고 잘도 활보하더니.. 젠장..'


재수는 이마가 아픈 건 문제가 아니었다. 군대에서 얼마나 단련됐겠는가? 문제는 코에서 나오는 피였다. 재수가 코를 막고 겨우 일어섰을 때를 한 아름 꽃다발이 무진동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충격에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재수가 눈을 부릅뜨고 다시 보니 그건 정음이 들고 있는 꽃다발이었다. 그리고 이내 바닥으로 꽃다발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꽃다발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장관이겠군.’

“재수 씨....”


정음이 놀라 떨어뜨린 꽃다발들을 밟으며 재수에로 다가왔다.

“정음아. 안에 들어가서 휴지 좀 가져다주라.”

“.................”


화려한 무대 뒤, 탈의실 앞에 쌍코피 터진 재수와 놀랍고 황당해서 아무 말 못 하는 정음이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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