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통유리벽 너머로 저녁노을이 짙게 깔려 있었다. 재수는 정음과 첫 재회를 한 날 정음의 뒤를 졸졸 따라가다 본 청파동 너머로 짙게 펼쳐진 노을이 떠올랐다. 그러다 일순간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젠 잊은 정음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정음과의 추억이 떠오르는 걸까?
정음은 언제나 그랬듯 유리벽 밖으로 노을에 젖어가는 시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수가 34층에 위치한 호텔 바에 서 본 시내는 어릴 적 아파트 굴뚝 계단에 앉아 동네를 보던 떠올리게 했다.
‘이제 잘 나간다고 이런 데만 다니는군.’
재수는 괜한 시기심이 들었다.
노을에 젖은 시내는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마냥 정음과 함께 호텔 바에 앉아 노을을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이유는 알아. 돈, 출세. 원망하지 않아.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날 수가 있어? 그냥 나 가지고 논 거야?”
정음이 죄책감을 느끼길 바랐을까? 재수가 예상한 정음의 반응은 창밖에 시선을 박고 아무 말 못 하는 거였다. 그런데 홱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음은 기가 차서 할 말을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재수는 그 표정에서 뭔가 잘못 됐음을 직감했다. 그래서인지 재수는 정음을 더욱 몰아붙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너를 그렇게 사랑한 사람 내팽개치고 출세하는 길이 기껏 돈줄 만나는 거였어? 그깟 출세 좀 하자고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떠난 거였냐고?”
“짝!!”
따귀 소리가 실내 공기를 갈랐다. 그리고 재수의 코에 박혀있던 휴지가 핑 날아가 노을 진 하늘에 부딪치고는 툭 떨어졌다.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한 터라 그런지 재수는 정음에게 뺨을 맞고 나자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오래전 조 중사에게 맞을 때 느꼈던 시원함은 아니었다. 정음의 과거 선택을 이해한다고 믿었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울분이 터져 자기도 모르게 비난의 말이 튀어나오고,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기어이 뺨을 맞고 오히려 안도감이 드는 이유는 모르겠어서 재수는 이제 정음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니라고, 딴 이유가 있다는 말이 나오길 기대했다.
“뭐? 돈줄? 출세? 그래, 나 출세하고 싶었어. 맞아. 그 남자가 돈 대줘서 유학도 했어. 하지만 나, 재수 씨처럼 아무나하고 막 잠자리하는 그런 여자 아니고, 그 남자도 돈으로 나 유혹한 거 아니야. 그 남자, 진심으로 날 사랑해.”
‘’그럼, 그렇지. 출세... 근데.. 응?‘
재수는 잠깐 귀를 의심했다.
“잠깐. 지금 뭐라 그랬어? 아무나하고 막 잠자리한다니. 누가? 내가?”
정음은 이제 창밖으로 시선을 박고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잘못된 게 확실했다.
“정음아. 다시 얘기해 봐.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누구하고 무슨 잠자리를 했다는 거야?”
뭔가 오해가 있음을 확신하자 재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버릇인 듯 정음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재수는 그 모습에 부아가 났다. 지수처럼 당당히 제 생각을 밝히지 못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무언가 숨기는 듯 한 정음의 태도가 답답했다. 이제 진정으로 지수를 사랑하는 걸까? 재수는 지수와 정음을 비교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야! 말을 해 보라고! 대체 무슨 소리냐고?!!”
답답함을 참지 못한 재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또 한 번 술집 공기를 갈랐다. 주위를 의식했는지 정음이 얼른 시선을 마주했다.
“재수 씨, 지수가 면회 갔을 때 같이 잤잖아. 아니야?”
“지금 뭐라는 거야? 내가 그때 지수랑 잤다고? 누가? 지수가 그래?”
천지가 진동할 충격적인 정음의 대답은 재수를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몸을 의자 깊숙이 널브러지게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지수가 처음 면회 온 날, 자신이 외박을 마다하고 돌려보낼 때, 그 얼굴에 스쳤던 서운함도 기억하고 있는데, 잠자리를 같이 했다니. 지수가 정음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건데,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지금의 상황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음을 설명해야 하는데 재수는 하도 황당해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정음의 얼굴에서도 자기가 조금 전에 느꼈던 어떤 안도감 같은 게 스치는 걸 보았다.
“재수 씨. 그럼 아니란 거야?”
재수의 억울함을 읽었을까? 한참을 노려보던 정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음아. 지수가 그랬단 말이지?”
“........”
정음의 허탈한 눈빛은 확실한 대답이었다. 재수는 이제 지난 세월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기분이 됐다. 애타게 기다렸던 시간, 탈영계획을 세웠던 시간, 자살 충동을 느꼈던 시간, 특히 지수에게 마음이 기울어 서로 사랑하기까지 흐른 시간들이 모두 거짓인 것만 같았다. 어느 한순간으로 인해 이후 모든 삶이 거짓이 되는 지금 이 시간이 믿기지 않았다.
“넌 그 얘기를 듣고도 어떻게 나한테 연락할 생각을 안 했냐? 적어도 확인은 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니, 내가 그냥 그런 놈이라 생각했다 이거잖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진짜 내가 그런 놈으로 보였어?”
재수는 하도 억울하고 황당해서 문제의 핵심을 비켜난 엉뚱한 비난을 했다. 억울하면 엉뚱한 반응이 나오는 버릇이 또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나 정음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멍한 표정이었고, 비난을 했지만 멍한 건 재수도 마찬가지였다. 재수는 갑자기 헛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얼른 독한 위스키를 시켰다. 정음은 술이 나오고 재수가 연거푸 4잔을 마실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재수를 지켜봤다.
“나도 처음엔 믿기지 않아서 면회 가려고 했어. 사실인지 아닌지. 그런데 그러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더라. 우리가 다시 만난 날부터 지수가 재수 씨를 많이 좋아하는 걸 난 알고 있었었어. 그래서...”
한참을 바라만 보던 정음은 체념한 듯 차분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음이 말끝을 흐리자 재수는 또다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뭐? 말해.”
독한 위스키가 위장을 따갑게 태우며 재수의 속을 더 타들어가게 했다. 한참 후 입을 연 정음의 말은 재수를 또 한 번 충격에 빠트렸다.
“나보다는 지수가 당신에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
“짝!!”
또 한 번 따귀 소리가 실내 공기를 갈랐다. 이제 바의 모든 시선이 둘에게 쏠렸다. 그러나 재수는 그딴 건 안중에도 없었다. 어울린다니. 재수는 갑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간 애타게 사랑했던 마음마저 시답잖게 취급당한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손이 날아갔다.
“뭐? 어울린다고? 내가 니들 액세서리야? 사랑이 장난이냐고? 야, 그냥 그 남자가 더 좋았다고 말해. 사람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지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흐트러진 머리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새 눈물을 흘렸는지 손으로 뺨을 홈치고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야. 지수가 나한테 더 어울린다는 말, 그게 헤어진 이유가 되냐? 아니, 니가 무슨 희생의 화신이냐? 예수야? 지수가 날 더 사랑한다고 그냥 물러선다는 게 말이 되냐고? 가식도 좀 적당히 떨고 변명도 좀 그럴듯하게 해.”
어울린다니. 그 때문에 지수에게 양보하다시피 자신을 놓아버렸다니. 재수는 지수가 한 거짓말보다 지수가 더 어울린다는 정음의 말에 화가 치밀었다. 무엇보다 정음의 이유랍시고 한 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황당해서 더욱 그랬다.
“재수 씨. 난 재수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잘 살지 못한 여자야. 나 혼자 어머니와 동생을 돌보고 생계를 꾸려야 했고 그래서 대학도 포기했어. 살기 위해 기술이라도 배우려고 학원 다닌 거고. 그렇게 겨우 취직은 했지만, 내 경력과 학력으로 갈 수 있는 회사는 뻔하더라. 쥐꼬리만 한 월급에 하루 열 시간 이상 일하고 겨우 집에 가도 집안일해야 하고.. 그런 내 삶이 지긋지긋할 때 재수 씨가 큰 위로가 됐어. 나를 웃게 하고 숨 쉬게 해 줬거든. 근데, 거기까지인 거야. 사랑은 사랑이고, 재수 씨에게 내 삶을 의지할 순 없었어. 보이지 않는 미래와 불안한 나를 맡길 순 없었다고. 그때 내 미래를 열어주고 당장의 삶을 책임져준 사람이 지금 결혼을 앞둔 그 사람이야.”
‘씨팔. 그럼, 그렇지.’
재수는 정음의 뜬금없는 신세 한탄에 가슴이 철렁했다. 맞는 말이었고 뻔히 짐작됐던 말이었다. 그랬으니 지수 말만 듣고 딴 남자에게 간 것 아닌가? 그때만 해도 자신은 군바리였다. 배운 것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 헬기 조종사라도 돼서 정음에게 든든한 남자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틀어져 버린 미래가 불투명한 군바리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재수의 울분은 갑자기 자책으로 이어졌다. 입대 전에 백수 생활을 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결혼을 앞뒀다는 정음의 말을 실감하기 전에 정음의 처지가 자신과 같았음이, 아니 자신보다 더 큰 책임을 어깨에 지고 살았다는 사실이 재수의 가슴을 후벼 팠다. 자신이 정음을 보기 위해 군대에서 이를 악물고 훈련을 이겨내던 시간에 정음은 이를 악물고 가족을 책임지고 꾸리며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었단 얘기였다. 정음이 현실을 살았던 그 시간에 비해 그저 첫눈에 반했다고, 사랑이라고, 죽어라 버텼다고, 혹독한 군 생활을 이겨냈다고 자부했던 자신은 꿈꾸듯 허상의 시간을 산 것 같았다. 자신이 애태운 시간이 정음에겐 자신만큼의 의미가 있을 리 없단 사실이 지독하게 쓰라렸다. 무엇 때문에 그리 사랑했을까? 왜 그토록 애가 탔을까? 재수는 지난 세월이 허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재수가 위스키 반 병을 마실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빈속에 독한 술을 쏟아부었으나 오히려 욕지기가 멈추고 분한 마음도 가라앉았다.
학력 때문에 우회로를 택했지만, 결국 헬기 조종사조차 못 된 한낱 군바리주제에 힘들게 세상의 파도를 헤쳐 나가고 있는 여자를 어떻게 책임졌겠나 싶고, 사랑은 사랑일 뿐 현실을 이길 힘은 따로 있었음도 인정해야 해서 재수는 때 지난 무력감에 휩싸였다. 정음이 결혼한다는 말이 뒤늦게 생각나고, 잘 살지 못했다는 말이 꼬리 물 듯 의문으로 이어졌지만, 치열한 삶을 살던 여자 앞에서 순진한 꿈만 꾼 초라한 자신을 깨닫자 입을 열리지 않았다. 애꿎은 술만 초라한 재수의 가슴을 적셨다.
“재수 씨. 지수에게 잘해줘. 걔, 재수 씨 많이 사랑해. 나와 편지 주고받을 때, 지수가 나한테 왜 면회는 안 가냐고 물을 때 같이 갔으면 하는 눈치였어. 아마 그때, 어느 하나 부족한 거 없이 나보다 잘난 지수가 당신에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 거 같애. 그래서 나 대신 가라고 했어.”
“야! 지랄하지 마. 위선 좀 그만 떨고 그냥 솔직히 말해. 지수와 내 문제보다 네 유학이 더 중요했다고. 그래서 지수가 안 밉고, 나와 지수가 그렇게 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고.”
사실, 재수는 정음을 비난할 처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지수의 도움으로 사회적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신분상승하는 기분을 즐겼다. 어젠가부터는 도취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수가 자기보다 잘나서 양보하듯 놓았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했다.
“그래. 지수의 말 듣기 전에 난 이미 마음이 지금 남자한테 기울었어. 유학 보내준다는 말에 이미 흔들렸다고. 됐어?”
그렇지. 그래야 말이 되는 거지. 뻔한 이유를 두고 삼류 신파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읊다니. 그런데 왜 속이 시원하지 않은지 재수는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정음의 지금 대답도 믿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미 마음이 흔들렸으면 사실대로 말하고 헤어지면 될 것이지, 굳이 아무 말 없이 떠나야 했나 싶은 것이다. 결국 지수의 거짓말이 결정적 계기가 됐단 것인데, 정음은 어찌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자신도 지금 지수를 원망하지 않고 있다. 이게 무슨 심정이지?
문득, 지난 세월이 꿈을 꾼 것처럼 아득했다. 지수를 만나 사랑했기 때문에 정음을 잊을 수 있었던 건지, 잊었기 때문에 지수를 사랑하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사랑하기로 써니 천인공노할 거짓말로 이별의 결정적 계기를 만든 지수에게 화가 나지 않는 자신이 가장 이해가 안 됐다. 지수가 정음의 유학사실을 전했던 날 보인 눈물은 무슨 뜻이었을까? 거짓말한 자책의 눈물이었을까? 순간, 원통할 거짓말을 한 지수를 이해하려고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음아. 나, 왜 지수가 안 밉지? 걔 때문에 모든 게 이 지경이 됐는데 왜 원망이 안 되지? 이해가 안 돼. 내 인생이 확확 바뀔 때마다 이유를 보면 늘 황당해.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고, 결국 거짓말 하나로 너와 내가 이렇게 됐다는 게, 이게 말이 되냐?”
지수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금세 체념한 표정이 된 정음이 이유 모르게 아쉬웠던 재수는 원망조차 들지 않는 자신을 보며 뜻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해서 허공에 대고 따지듯 물었지만 정음은 대답대신 눈물을 글썽였다.
“재수 씨.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중요할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중요할까?”
얼른 눈물을 훔친 정음은 뜬금없는 질문을 했고, 재수는 당황했다. 마치 지수와 자신의 관계를 들여다보고 질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겠지.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편안은 하겠지.”
그래도 독한 술 때문인지, 재수는 문득 군대 시절 시커멓게 속이 타들어 간 시간이 떠올랐고, 이후 자신을 끔찍이 사랑한 지수가 떠올라 마치 딴 사람 얘기하듯 대답했지만, 마치 과거를 실토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겠지? 그래서 나도 지금 이 남자와 결혼을 하려는 거겠지?”
이건 또 무슨 뜻일까? 그럼,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혹시 자신에게 마음이 남아있지 않을까? 이런!!! 그걸 기대하다니. 깨끗이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정음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있음에 재수는 이제 자신이 환멸스러웠다.
“누가 그러더라. 난 그늘이 많다고. 학창 시절엔 그 말뜻을 몰랐어.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 보니 그 말뜻을 알겠더라. 난 어려서부터 주눅 들어 살았어. 가난했기 때문에. 대학 다니는 친구들 보면 부러웠어, 남들이 캠퍼스에서 낭만을 즐길 때, 난 이름 모를 학원이나 다니고, 집에 가선 또 집안일을 해야 하고.. 취직 후에도 남들은 버젓이 디자이너라고 힘주고 다닐 때, 이름 모를 회사에서 시장판 옷이나 만들고 있는 내가 너무 싫었어. 나도 패션 디자이너라고 당당히 명함 내밀고 싶었어. 재수 씨는 내가 부잣집에서 곱게 큰 여자 같다고 했지? 고급지다고도 했지? 그거 환상이야. 나 그런 편지 읽을 때마다 무척 부담됐어. 그런 나를 감추기 위해 애를 쓰고 살았지만 결국은 드러나더라. 특히 지수와 있으면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져서 재수 씨를 향한 지수의 마음을 이길 자신이 없었어. 그래서 지수가 당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 난 나대로 내 욕망을 채우려고 이 남자를 선택한 거니까 지수 원망하지 마.”
정음을 사랑했지만, 어쩌면 혼자 열렬했을 뿐, 실제 정음과 지극히 오래도록 서로 사랑한 것도 아니었으니 정음이 쉽게 자신을 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잠깐의 사랑이지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정음의 열등감을 재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엔 재수가 말없이 창밖을 봤다. 그새 노을은 사라지고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째서 이 여자는 나와 똑같이 아플까? 난 어째서 똑같은 사람을 만났을까?’
열등감에 사로잡혀 산 것도,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해 준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도 똑같았다. 자신이 철없는 사랑을 갈구할 때, 정음은 어쩌면 구원을 바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음아. 만약 지수가 거짓말을 안 했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
정음은 대답을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또렷이 힘 준 눈에서 눈물을 주르륵 흐르는 지수의 모습에 어떤 억울함이 스며있는 걸 재수는 봤다. 순간, 재수는 어쩌면 정음이 지금까지 한 말들이 다 거짓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적어도 의지할 남자를 만나 이별을 결심했다는 정음의 말은 거짓일 수 있는 것이었다. 재수가 살면서 저절로 발달된 유난한 직감이 지수의 거짓말이 파국의 시작이었지만, 그건 핑계일 뿐이고 정음의 열등감이 이별을 결심하게 한 것임을 짐작케 한 것이다. 혹시 지금의 남자를 만나기 전에 이미 자신과 이별을 결심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적어도 다른 남자가 생겨서 이별한 게 아니라면 정음이 떠난 건 재수를 배신하고 헌신짝 던지듯 한 행동은 아닌 것이다. 재수는 그러길 바랐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가 갑자기 딴 남자를 만나고 자신을 버린 것은 재수로서는 치욕이고 정음은 그 정도로 속물은 아닌 것이니 제 사랑이 헛됐던 것만은 아니므로 재수는 진심으로 그랬길 바랐다. 사실 관계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음의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오기는 만무했다.
잘살라는 말, 많이 사랑해 주라는 말. 정음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자신과 지수를 응원하려 하는 위선일 수 있다고 생각됐지만, 그러나 그렇다 한들 이제 와 뭐 어쩌겠나. 이제 시간을 돌릴 수도 없고, 돌린다 한들 정음을 책임질 힘도 없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바뀌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더구나 날이 밝으면 자신은 결혼식장에 서 있어야 하는데.
“그래. 지수가 거짓말하지 않았어도 우린 뭐가 달라졌겠니. 과연 사랑만으로 살 수 있었을까? 이제 알겠어. 세상 참 좆같다.”
재수는 이제 정음이 떠난 이유가 지수의 거짓말 때문인지, 유학 때문인지, 어떤 게 먼저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다 더러운 세상 탓이고 억울하게 끌려간 군대 때문이었다.
“맞아. 그때가 아니었어도 결국 그렇게 됐겠지. 재수 씨, 그러니까 이렇게 된 게 잘 된 거라고 생각하자.”
정음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재수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지수의 지극정성에 마음이 움직였지만 재수도 지수를 사귀면서 신분상승한 듯 기분을 만끽했다. 그리고 가방끈 짧은 재수에게 감독 호칭을 듣도록 기회를 만들어준 것도 지수였다. 덕분에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았고, 속한 조직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어딘가 찝찝했지만 세상이란 그렇게 돌아간다는 걸, 혼자 독도다이로 개겨 봤자 자기만족만 있을 뿐, 퍽퍽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재수는 지수를 만나고 깨달았다. 재수는 자신이 지수 덕에 신분 상승한 기분도 들었고 그걸 즐겼다는 걸, 그리고 항상 밝고 구김살 없는 지수의 태도에 매력을 느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자신의 힘으로 자존감을 키우고 위신을 만들어 존중받은 게 아니라 지수의 덕으로, 그 옆에 있어서 존중받았음을 재수는 알고 있었다. 설마 정음은 이 모든 걸 예측하진 못했겠지만, 정음의 말대로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정음이 처음으로 스스로 제 잔을 채우고 한숨에 마셨다. 그 모습이 왠지 재수의 마음을 짓눌렀다. 어쩌면 정음도 자신과 같은 심정이지 않을까 싶었다. 쓰린 속을 달래려 창밖을 보던 재수는 문득 살아온 삶이 하나같이 거짓말 같았다. 뜬금없이 호떡을 팔게 됐고, 그러다 우연히 정음을 보고 사랑에 빠져 몸살을 앓았으며, 입대 후 꿀 군번으로 수방사에 가기 직전 지독한 부대로 재 차출 됐고, 덕분에 휴가를 받기 위해 죽어라 고생하며 속이 새카맣게 타도록 그리워했고, 또 우연히 재회를 하고 애타게 기다리며 미래를 꿈꿨으나 시험 한 달 전 제도가 폐지됐고,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의 허황된 거짓말이 계기가 되어 첫사랑과 생이별을 했다니. 뭐 이런 거지 같은 인생이 있냐 말이다. 재수는 그간의 자신의 삶이 다 거짓말인 것 같았다. 참, 개 같은 인생이었다.
“재수 씨. 지수 원망하지 마. 얼마나 사랑하면 그랬겠어?”
“정음아. 이제 그만해도 돼. 나 원망 않고 잘 살 테니까 걱정 마.”
정음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스쳤다. 그건 지수가 첫 면회를 왔다가 돌아갈 때 비쳤던 서운함과 같은 거였다.
“아니, 나 더 축복해 줄래. 재수 씨도 좋은 곳에 들어가서 촬영상도 받고, 잘 나가는 인물 됐잖아. TV에서 보니 재수 씨 멋있더라. 지수도 예쁘게 나오고. 축하해.”
“너 그걸 봤어?”
“나 재수 씨랑 지수 얘기 계속 듣고 있었어. 학원 친구들이 얘기해 주더라구. 주로 욕을 했지만. 하하.”
이제 재수는 정음의 거짓말을 확신했다. 새로운 남자를 만나 떠났지만, 그건 지수가 거짓말하고 난 뒤의 일임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다른 남자가 생겨서 이별을 결심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쯤 되자 재수는 다시 격렬한 감정에 휩싸였다. 처음 본 날 이후 실로 오랜만에 느낀 격동이었지만 곧 결혼을 할 여자고 자신도 몇 시간 후면 그럴 거였다.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마음 깊숙한 곳에 남겨 두는 게 최선이었다.
“재수 씨. 혹시 어떤 감정이 남아있다면 요 밑에 깊이 묻어두자. ”
정음은 제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지? 여자들은 남자 마음을 다 꿰뚫는 재주가 있나? 지수도 그랬고 지금 정음도 그러했다.
“넌 꼭 세상사 다 통달한 거 같다. 이제 신의 경지에 오른 거야?”
“내 안에 사리 몇 개는 이미 있을 걸?”
정음도 술이 몇 잔 들어갔는지 농담을 했다. 재수도 슬쩍 웃었지만 씁쓸했다. 하지만 왜 이렇게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됐는지 생각하면 속과 머리가 뒤집어질 것 같아 독한 술만 들이킨 재수는 어느새 눈물을 흘렸다. 첫사랑이 앞에 앉아 곧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고 하고, 자신도 몇 시간 후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이 허무한 상황 때문일까? 세월이 억울해서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재수를 정음은 말없이 바라봤다. 잠시지만 눈물을 쏟고 긴 한숨을 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니 군대만 생각하면 참 개 같은 인생이었지만, 이후엔 행운도 많았다. 지수를 만나고 업계에서 알아주는 촬영감독이 됐으니 개 같으면서도 꼭 개 같지만도 아닌 것 같았다. 앞으로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까. 두렵지만, 군대에서부터 극기에 다져졌고 정음 때문이긴 했지만 일단 부딪쳐 보는 무대뽀 정신도 군대에서 길러졌다. 그러니 이겨 내면 될 일이다. 가만, 군대가 내게 남긴 게 있었네?
“사실 나, 내일 결혼식이야.”
"알아."
"...안다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아까 얘기했잖아. 학원친구들이 소식 전해줘."
역시나였다. 정음은 아직 재수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와 뭐 어쩌겠나? 속을 알면 뭘 어쩔 건가 말이다. 돌이킬 수 없는 주어진 일들과 책임만 남았는데. 재수는 문득 영화 '졸업'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여주인공의 결혼식장에 들이닥쳐 드레스 입은 신부를 데리고 도망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건 영화일 뿐이었다.
정음은 두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술잔만 기울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더 무슨 말을 할 수 없어 이번엔 재수가 말없이 창밖을 봤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산 것도,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해 준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도 어째서 이리 똑같을까. 구원을 바란 정음과 철없이 사랑만 쫓은 자신은 어차피 안 될 사이였을 텐데 왜 자꾸 마주치게 된 걸까.
“재수 씨. 지수 행복하게 해 줘.”
재수는 이 조차 빈 말일까 싶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음이 재수의 빈 잔에 술을 따르고 제 잔도 채웠다.
“축하해.”
건배를 제의하는 정음은 진심일 것인데, 그런데 왜 서운한 걸까. 축하해 주고 행복을 빌어주는 정음에게 왜 서운한 걸까? 각자 결혼을 앞두고 있고 이제 각자의 삶을 꾸려가야 할 텐데. 재수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건배를 했다.
둘은 밤이 다 가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의 꿈과 희망에 대해. 그리고 서로의 미래에 대해 축복의 말을 늘어놨다. 그러나 얘기는 자꾸 중간중간 끊기고 그 사이를 어색한 침묵이 채웠다. 때문에 빈 술병만 늘어났다.
창밖은 푸른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새벽을 한참을 바라보던 둘은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적 없는 거리로 나왔다. 5월 새벽바람에 거리는 신문지만 뒹굴고 있어 더욱 휑하고 쓸쓸했다. 술 때문인지, 쓸쓸하고 황량한 마음 때문이진 재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런 재수를 정음이 부축했다. 재수는 정음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자 충동적으로 정음의 입술을 덮쳤다. 정음은 거부하지 않고 재수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재수는 이제 다시 못 볼 정음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영원히 기억할 것처럼 오래도록 정음의 입술을 머금었다. 재수가 먼저 입술을 뗀 뒤, 둘은 마주 서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봤다.
“재수 씨. 택시 잡아 줄게.”
“아니야. 나 좀 걸으면서 술 깨야 해.”
정음의 마지막 애틋한 눈빛에 재수는 예의 그 느낌이 또 들었다. 놀랍거나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 전 드는 그 느낌. 재수는 순간적으로 앞으로 어떤 삶이 자신들을 기다릴지 알 수 없단 생각과 어쩌면 또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재수는 머리가 복잡해지고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몇 시간 후 결혼식을 올릴 판에 엉뚱한 상상을 자신이 어이없어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떨치려 정음에게 부러 씩 웃어 보이고 얼른 돌아섰다. 미련을 가지고 뒤돌아 보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얼마 못 가 재수는 아직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헤어진 그곳에 정음 역시 아직 그대로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후 재수의 신혼집 벽에 걸린 결혼사진엔 환하게 웃는 지수와 그 옆에서 뻘건 토끼 눈으로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바라보는 재수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