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좁은 주차박스 안에서 석구가 짜장면을 앞에 두고 젓가락을 뜯는다. 이내 땀에 범벅이 된 우석이 들어와 앉는다.
“흐미~ 이제 쫌 정리됐네.”
“시간도 없는데 대충 먹자.”
이때 재용이 흐느적거리며 들어온다.
“왔나?”
우석이 재용을 반기며 말하는데, 하필 이때 무전이 날아든다.
“5907 손님 나갑니다. 차 대주세요! 5907..”
“어차피 앉을 때도 없으니까 좀 있다가 먹어.”
석구가 화이트보드에서 차키를 빼 재용에게 던지며 무심히 말한다.
“꼬추 이 개새끼들.. 오늘따라 왜 지랄들이야?”
재용이 쓰러지듯 돌아서며 중얼거린다. 그때, 뭔가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재용
“어?... 어어!!”
휘둥그레진 재용의 눈앞에서 1200번 도요타가 견인차에 끌려 유유히 사라진다. 삑~ 삑~ 울어대며..
#11
화정이 팔짱을 끼고 잔뜩 화난 눈으로 석구를 노려본다.
“아니, 주차장에 주차한 차가 왜 견인이 되냐구. 왜 말을 못 해?”
“그게.. 오늘 차가 워낙 많아서 다른 차 빼느라 잠깐 옮겨 놨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아직 상황을 모르는 석구는 머리를 조아리며 일단 가능성 있는 이유를 둘러댄다.
“마사지나 하는 년이 속을 뒤집어 놓질 않나... 나, 참...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젠 빼박이들까지 다 속을 썩이네.”
마사지하는 년? 귀순을 말하는 걸 재용은 안다. 게다가 자기들끼리 빼박이란 말을 쓰긴 하지만 건물주 홍 회장의 정부란 이유로 맨날 공짜로 주차하는 화정이 빼박이라니.. 빨끈한 재용의 눈매가 치켜떠진다.
“죄송합니다. 차는 바로 찾아다 드리겠습니다.”
“아니, 주차관리를 그 따위로 해서 밥 벌어먹겠어?”
석구는 어떻게든 화정을 달래 보려 하지만 화정의 분을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다.
“이런 씨발!! 뭐? 빼박이?”
드디어 다혈질인 재용이 참지 못하고 대든다.
“뭐...뭐! 씨발? 어머, 어머. 지금 나보고 씨발이라고 한 거야? 어머, 어머...”
화정이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아줌마! 맨날 공짜로 주차하면서 남의 밥벌이는 왜 걱정해?”
“너...너.. 내가 누군 줄 알고.. 뭐? 아줌마?..”
화정은 꼭지가 돌았지만 그렇다고 뭘 어찌할 수도 없다. 그때. 석구가 재용의 뺨을 냅다 후려치는데, 어찌나 세게 쳤는지 재용이 휘청거리다 벌렁 나자빠진다. 그 모습에 화정의 독기 품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너 죽을래?”
“형...”
아무리 냉정하고 무심한 석구지만 늘 자신을 챙겨주었던 친형 같은 석구였다. 그런 석구에게 자빠질 만큼 세게 얻어맞은 재용은 원망 섞인 눈빛이 된다.
“너, 한 번만 더 입 열면 죽여 버린다.”
“크흠... 여하튼... 어떡할 거야?”
석구의 서슬에 다시 한번 놀란 화정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오늘은 택시 잡아드릴 테니 그냥 가시고 차는 내일 아침에 댁으로 갖다 놓겠습니다.”
“우리 집을 알아?”
“일전에 취하셨을 때 회장님이 모셔다 드리라고 해서..”
“아... 그랬었나?”
민망한 얼굴이 된 화정을 뒤로하고 석구가 택시를 불러 세운다.
“가시죠.”
“차는 그렇다 치고... 여하튼 여기 관리 좀 잘 부탁해요. 애들 교육도 좀 잘 시키고..”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사모님.”
허리 굽혀 인사하는 석구를 한 번 흘깃 본 화정은 갖은 우아를 떨며 택시에 올라탄다. 택시가 사라지고 석구가 매서운 눈으로 돌아서니 재용이 주차장 구석에서 호스로 온몸에 물을 뿌려대고 있다. 그런 재용에게 뭐라 할 수도 없어 주차 박스로 들어서자 우석이 얼른 자리를 내준다.
#12
술에 취한 임 형사가 2십대 초반의 여자와 함께 구형 그랜저 뒷좌석에 앉아있다.
“그러고 보니 니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
“지영이라고 했잖아요. 아까..”
임 형사에게 대꾸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냉랭하다.
“니네는 맨날 공짜로 술 먹는다며? 니들이 있어야 남자들이 꼬인다구 말이야. 니들은 공짜 술 먹어 좋고 고추는 손님 늘어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참 좋겠다.”
임 형사가 뭐라든 여자는 외면하고 창밖만 본다.
“너 말이야. 나 잘 사귀어 놓으면 앞으로 너한테 손해 날 거 없어. 알어?”
“...아저씨, 진짜 경찰이에요?”
그제야 차에 오른 후 처음으로 여자가 얼굴을 마주한다.
“왜, 가짜로 보이냐?”
룸미러로 힐끗 뒤를 보는 석구.
“아저씨. 오늘은 그냥 술이나 더 먹고.. 담에 가자. 응?”
여자의가 갑자기 애교 섞인 목소리가 된다.
“까불지 마.”
여자, 다시 창밖을 본다. 석구가 다시 한번 룸미러로 임 형사를 훑는다.
이윽고 고급 호텔 정문에 멈춰서는 구형 그랜저. 호텔 발레맨이 문을 열어주자 임 형사와 여자는 그대로 내려 호텔로 들어가려 한다. 그러자 운전석에서 급히 내리는 석구.
“저, 손님. 대리비 주셔야죠.”
“뭐? 대리비? 박사장이 안 줬어?”
“고추 사장님이요? 안 주셨는데요.”
“아~ 걔가 깜빡했나부다. 나 박 사장 선배야. 걔한테 받어.”
“손님. 그거는 안 되는데요. 미리 얘기도 없으셨고..”
그깟 대리비 갖고 둘이 실랑이를 벌이자 여자가 지갑을 꺼낸다.
“오빠. 얼마예요?”
여자는 임 형사 말대로 손님을 위해 고추를 드나드는 삐끼 처지라 어쩌면 석구 같은 빼박이들 사정을 더 잘 아는 것 같다.
“아이, 그 새끼 말 많네. 임마, 나 거기 관할 경찰서 형사야. 내가 너한테 뻥치겠니? 가서 물어보면 될 거 아냐?”
임 형사가 지갑은 여는 여자의 팔을 잡아끌자 여자는 얼른 5만 원 권 한 장을 뿌리듯 던진다. 호텔 발레맨이 얼른 차에 올라차 사라지고 땅바닥에 떨어진 돈을 줍는 석구가 임 형사를 노려본다.
#13
새벽 4시. 곧 날이 밝을 늦은 새벽인데도 로데오 거리는 아직 활기차다.
거리를 향해 있는 벽이 통째로 열린 커피숍엔 부티 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메우고 있고 인라인을 타고 인파 사이를 누비는 사람, 삼삼오오 무리 지어 술 취해 휘청거리는 일행들, 이 시간에 무슨 이유인지 개를 끌고 나온 여자들로 거리는 늦은 저녁 같다. 그런 인파들 속에 우스꽝스러운 복장으로 지친 걸음을 하고 있는 피에로도 섞여 있다.
한적해진 ‘고추’ 홀에 철규가 들어선다. 단골인지 박 사장 친구인지 모를 몇몇이 철규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지만 무시하고 2층으로 사라진다.
홀 구석에서 재용과 우석이 술을 마시고 있다. 이 시간부터 발레은 없다. 남은 차키를 박 사장에게 넘기면 손님들은 알아서 주차장에 모아 놓은 제 차를 찾아간다.
우석이 재용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한마디 한다.
“어이구, 미친놈아. 맞아도 싸다. 그 여자가 누군 줄 알고..”
“홍 회장이고 나발이고 죄다 공짜로 주차할라고 덤비면 그 많은 차들을 접어서 주차하냐고, 씨발. 하여간 있는 것들이 더하다니까.”
재용이 단숨에 술잔을 비운 뒤 투덜댄다.
“여태껏 공짜로 주차해 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도난당한 것도 아닌데 똥차 가지고 호들갑은.. 미친년.”
재용이 제 술잔에 술을 따른 뒤 또 단숨에 비운다.
“난 그렇게까지 오버하는 석구 형이 좆도 재수 없다 이 말이야.
“지랄 쫌 그만해라, 새끼야. 친동생처럼 챙겨주니까네 아주 호강에 초친 소리한데이.”
이때 유리벽 너머로 고추 내부를 살펴보는 피에로가 보인다. 그러나 이내 발길을 돌려 되돌아가는 피에로.
“어? 피에로 누나네?”
우석이 피에로를 보고 달려 나가 데리고 들어온다. 그리고 힘없이 재용의 옆에 앉는 피에로.
“누나. 오늘은 별로 못 벌었는 갑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기..”
그러나 피에로는 대답 없이 희미하게 웃어 보일 뿐이다.
“술 한 잔 할랍니까?”
역시 힘없이 고개만 젓는 피에로, 연거푸 술만 푸고 있는 재용을 의아하게 본다.
“일마 이거, 오늘 사고 쳤다 아입니꺼. 미친놈아. 석구 형이 그 자리 잡으을라꼬 얼마만큼 애썼는지 아나. 쥐뿔도 모르믄서 그 홍 회장 이거한테 대들었으이 맞아도 싸다 임마.”
우석이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재용을 탓한다. 이때 석구가 고추 안으로 들어오자 긴장하는 우석과 피에로. 그러나 재용은 못 본 척 자신의 술잔을 채운다. 우석과 피에로는 석구를 기다리듯 바라보지만 석구는 그들을 본체만체 2층으로 올라간다. 테이블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아이 씨발, 몰라! 홍 회장이고 콩 회장이고... 술이나 마셔.”
재용과 우석이 술잔을 비우는 동안 피에로는 석구의 뒷모습을 좇다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피에로. 입 꼬리를 올리며 웃어 본다. 다시 시무룩해지는 피에로, 잠시 후 분장을 지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