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급스러운 호텔 방바닥에 옷가지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고 테이블 위의 술병과 주사기들이 널브러져 있다. 침대 위에는 서너 명의 벌거벗은 여자 몸뚱이들이 뒤엉켜 있다.
베란다 창가에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철규,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생수를 병 채로 마신다. 그때 한 여자가 일어나 부스스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입에 물고 벗은 몸으로 철규에게 다가와 물병을 채간다.
“언제 일어났어?”
“...”
여자,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다 문득 시계를 보더니 놀란 표정이 된다.
“아, 씨. 오빠. 나 좀 태워다 줘.”
“미친년.”
“...?”
눈이 동그래진 여자를 외면하고 욕실로 가는 철규. 샤워기를 켠 채 벽을 짚고 비를 맞듯 서있다.
#7
한눈에도 고급스러운 마사지실에 화정이 등을 내보이고 누워있다. 잘 가꿔진 피부이나 늘어진 허리 살과 눈가의 나잇살 때문에 족히 5십은 넘어 보인다. 그런 화정의 등을 귀순이 부드러운 손길로 마사지를 하고 있다.
“얘. 이 밑에 지하 바 말이야. 전엔 거기가 장사가 그렇게 잘됐다며?”
“글쎄요. 그전엔 잘됐다던데.. 요즘은 여사장이 손님하구 눈이 맞아서 장사에 신경을 안 쓴다나?”
“얼굴 파는 여자가 남자랑 붙으면 장사 끝이지. 여자 연예인이 결혼하면 주가 떨어지는 거랑 똑같은 거야.”
“언니도 그래서 은퇴하신 거예요?”
“은퇴? 그래, 은퇴라면 은퇴지..”
화정이 자조적 목소리로 말하며 한숨을 쉰다.
“근데 지하 바는 왜요?”
“글쎄 내가 한번 운영해 볼까 해서..”
“언니 체면에 무슨 술집을.. 영감님이 하라고 하시겠어요? 영감님 체면도 있는데..”
“영감체면 같은 소리 하네.. 여자는 젊을 때 여자지 나이 들어봐라.”
화정의 눈매가 갑자기 사나워진다
“참, 나. 어쩌다 영감탱이한테까지 퇴물취급을 다 당하고... 팽 당하기 전에 먹고살 궁리나 해놔야지. 사내놈들은 늙어서도 똑같애. 너 밑에 가게에 대해서 좀 알아봐라. 단골들이 얼마나 되는지..
“차라리 밑에 빼박이들한테 물어보세요. 걔들이 동네 이장이래요. 이 골목 돌아가는 사정 훤히 다 안다고..”
“빼박이?”
“밑에 발레파킹하는 애들 말이에요. 맨날 차 가지고 뺏다 박았다 한다구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요.”
화정이 갑자기 킥킥 댄다.
“얘. 그럼 그 짓도 그렇게 잘하니?”
“그 짓이요?... 아~”
귀순이 말귀를 알아듣고 같이 킥킥댄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화가 난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언니! 지금 날 쟤들하고 같은 부류로 보는 거예요?”
“부류? 넌 어떤 부륜데?”
“전 쟤들하고 달라요... 전 연예인이 될 거예요.”
화정이 갑자기 깔깔 웃어젖히자 민망해지는 귀순. 뾰로통한 얼굴이 된다.
“... 왜요? 저라고 연예인 되지 말란 법 있나요? 요즘엔 널린 게 오디션이라는데..”
“너 되게 웃긴다. 니가 연예인이 되겠다구?”
화정이 다시 깔깔 웃어댄다.
“가만 보니 순진한 게 아니라 멍청하구나, 너?”
귀순은 이제 부아가 치민다.
“누군 처음부터 연예인이었나요? 언니도 영감님 덕에 탤런트 된 거 다 알아요.”
귀순의 말에 일순간 화정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신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얘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한없이 기어오르네.”
화정이 벌떡 일어나 아예 젖가슴을 드러내고 뒤돌아 앉는다.
“야! 마사지나 하는 주제에 어디서 함부로 주둥일 놀려?”
화정이 제 성질을 못 이겨 흥분은 점점 더 커진다.
“아니, 언제부터 이 동네 물이 이따위가 된 거야? 동네 찜질방도 아니고 말이야. 야! 연예인은 아무나 되는 건 줄 알어? 나 참 기가 막혀서... 요즘은 진짜 개나 소나... 마사지나 하는 주제에.. 너 말이야. 니 꼬라지에 이 동네에서 기웃거리면 누가 덥석 안아다 연예인 시켜줄 줄 알고 있는 거니, 지금? 차라리 하늘에 별을 따라. 그걸로 스타라 그래. 그게 낫겠다.”
귀순의 마사지 손길은 멈춘 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분풀이에 가까운 화정의 독설은 계속되고 수치심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귀순, 참다못해 눈물을 글썽이며 뛰쳐나간다.
“얘! 주제파악부터 하셔. 연줄은 아무나 만드는 줄 아니? 정신 차리고 마사지나 잘해. 먹고살려면..”
뛰쳐나가는 귀순의 등 뒤에 악이 받친 화정의 독설이 화살처럼 꽂힌다.
#8
저녁이 되자마자 ‘고추’ 테이블은 손님들로 붐빈다. 피에로 분장을 한 여자가 테이블 사이를 다니며 형형색색의 풍선인형을 흔들고 있다. 술집에서, 그것도 놀이공원도 아닌 포장마차에서 누가 풍선인형 `을 살까 싶지만 귀찮아서인지 의외로 선뜻 돈을 내는 이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피에로는 웃음으로 인사한다. 그 표정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보기에 따라 섬뜩해 보일 수도 있는, 중국의 경극 분장과 피에로 분장의 혼합 같다.
이윽고 피에로가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 남녀일행 테이블 앞에 선다. 여자들은 대체로 세련돼 보이지만 남자들은 티 나게 차려입었건만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어머~~. 저 인형 넘 귀엽다. 오빠, 어떡해..”
한 여자가 고양이 소리를 내며 애교를 떨자 옆에 앉아있던 남자, 호기롭게 지갑을 꺼낸다.
“저기요! 일루 와봐.”
“야, 임마! 저거 하나가 2만 원짜리야.”
“...!!”
맞은편 남자의 기겁하는 소리에 지갑을 꺼내던 남자, 놀라 주춤한다.
“싼 것도 있어요. 이거 5천 원이에요.”
그러자 피에로가 얼른 칼 모양의 다른 풍선을 내밀며 말하는데 발음과 억양이 조선족 같다.
“뭐야? 쪼잔하게..”
“거봐. 내가 뭐랬어. 오빠들, 강 건너왔지? 그치?”
여자들이 입술을 내밀며 핀잔을 주자 지갑을 꺼낸 남자, 무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 씨바. 사람 뭘로 보고.. 진짜..”
“야, 그런 거 말고 큰 걸루다가 하나 만들어 줘. 큰 걸루..”
지갑에서 5만 원 권 한 장을 꺼내 기세 좋게 테이블에 탁 놓는다. 건너편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들 서로 눈짓을 해가며 킥킥댄다. 그러나 피에로가 새로운 풍선을 꺼내 불기 시작하면 남자들 다시 작업에 열중한다. 그때 투명 비닐 벽 너머로 3대의 외제 승용차가 동시에 멈춰 선다. 차에서 내려 각자의 차문을 열어둔 채 홀 안으로 들어서는 남녀 일행들, 목에 있는 대로 힘이 들어갔다. 이내 문 열린 차 앞으로 뛰어 온 재용, 차에 올라타다 말고 피에로에게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러자 과장되게 그려진 피에로의 입술이 더욱 커진다. 재용이 쌩하고 후진으로 사라졌지만 피에로는 풍선을 입에 문채 사라진 재용의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 곧이어 나타난 석구, 피에로 쪽은 쳐다도 안 보고 다음 차에 올라탄다.
피에로의 손에서 펑하고 터지는 풍선.
“아이, 깜짝이야.”
돈을 준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피에로를 노려보지만 피에로는 사라지는 석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습관처럼 다른 풍선을 입에 댄다.
#9
자정이 가까운 시간.
차문이 열린 채 ‘고추’ 앞 좁은 골목을 메우고 있는 10여 대의 차량들. 그 차들 사이로 재용과 석구가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석구가 얼른 차에 올라타 후진을 하려고 하면 이미 다른 차들이 밀고 들어온다.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 맨 뒤차로 뛰어간다. 석구와 재용이 맨 뒤차부터 후진으로 빼려 하지만 차량은 쉴 새 없이 밀고 들어온다. 불금이지만 오늘은 뭔 날인가 보다. 결국 차에서 내리는 석구, 무전기를 꺼내든다.
“우석! 지원 나와라. 우석아!!”
“지금 갑니더.”
석구가 맨 뒤차에 올라타고 쏜살같이 사라지자 근처 다른 주차장을 관리하던 우석, 곧바로 나타나 골목에 들어찬 차들을 보며 혀를 찬다.
“흐미.. 종류별로 다 모였네.”
우석이 맨 뒤차에 올라타고 사라지면 그새 재용이 나타나고 이어 석구가 나타나고..
석구네 주차장에 꽉 들어찬 차들 사이에서 리모컨을 누르며 뛰어나오는 재용. 문득 자신의 손을 보면 손가락마다 차키가 주렁주렁 걸려 있다. 어떤 키가 어떤 차키인지, 망연자실해하는 재용 앞을 에쿠스 한대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리곤 한대가 겨우 들어갈 듯 말 듯한 공간에 귀신같이 빨려 들어간다. 차에서 내리는 석구, 재용에게 차키를 던지고는 다시 뛰어가며 말한다.
“한남동 대리. 아우디 최신이니까 5만 원 불러.”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재용.
한편, 고급 세단을 몰며 조수석에 있는 여자의 볼을 쓰다듬으며 로데오 골목으로 들어선 40대 남자. 그때 남자의 눈앞을 번쩍하고 가로지르고는 사라지는 SUV차량. 놀라 차가 사라진 방향을 보던 남자, 쿵 하고 앞차를 들이받는다.
“저런 개새끼가...”
남자는 사라진 SUV를 보고 욕을 내지른다.
남자의 차를 가로지른 SUV차량, 골목에 무단 주차된 차들 사이로 지체 없이 빨려 들어가고 차에서 내리는 우석, 흡족한 표정으로 손을 턴다. 이때 우석의 옷깃을 스치는 같은 차종의 SUV.180도 회전을 하며 차와 차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내 차에서 내려 뛰어가는 석구를 얼빠진 얼굴로 보던 우석 혀를 찬다.
“진짜 신이 내린 빼박이다 아이가.”
그새 주차장으로 달려온 석구가 주차박스에서 양손에 차키를 주렁주렁 달고 나와 차키를 일일이 눌러 반응하는 차 넘버를 확인한다. 그리고는 다시 골목으로 뛰어가 남은 차들까지 다 확인한다. 이내 주차박스로 돌아온 석구는 그 많은 차량 넘버를 다 외웠는지 화이트보드에 일일이 다 적고는 차 키를 걸어 놓는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주차박스 앞에서 재용이 지친 얼굴로 택시에서 내리는데, 석구가 ‘고추’ 골목으로 뒤어가며 재용에게 차키를 던진다.
“1639 BMW!!. 개포동. 구식이니까 3만 원만 불러.”
“으아~ 씨발. 오늘따라 왜 지랄들이야.”
재용이 하늘에 대고 분풀이를 하고는 맥없이 주차장으로 뛰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