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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Mar 08. 2020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들은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이다


두려움에 대해서 쓴다. 


나는 이 배가 계속 나오는 것아 두렵다. 나오다 나오다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어쩌지 싶다. 


나는 내 체력이 계속 떨어질까 두렵다. 나는 배가 나오고 체력도 좆망인 인간이 되면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돼 모든 면에서 우울할 거 같다. 자살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흉측하고 돈도 못 버는 인간이 되는 기분은 어떤 걸까? 사회적인 죽음이다. 생명줄이 끊어지는 것만이 죽음이 아니지. 내가 더 이상 인간 구성원들 사이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깊은 혐오감만 일으키는 사람으로 늙어버리는 것도 죽음이지. 


나는 이 안락하고 따스한 집을 너무너무 사랑한다. 이 집에서 또는 지금 집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곳으로 추락할까 봐 나는 그것이 너무나 두렵다. 하지만 이런 집에서 산다고 한들 만약 관리비도 못 내는 지경이라면 어떻겠는가? 내 안에는 경제적 기능이 퇴화하였을 때 수반하는 모든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끝도 없이 있다. 이따금씩 기분전환 겸 백화점에 가서 아름다운 주얼리나 매끈한 신상 원피스들을 구경할 때도 있는데, 그런 장소에서 천대받는 사람이 되면 어쩌지. 자본주의가 나를 길들여 놓은 방식으로 내 안의 불안이 나를 잠식하고 있다.


피로할 때 택시도 못 타고 휘청거리는 버스에서 노쇠한 몸을 겨우 붙잡고 있게 되면 어쩌나, 내킬 때 쾌적한 호텔에서 호캉스를 즐길 수 있는 것은 꿈도 못 꾸게 되면 어쩌나, 노트북이나 마우스가 낡고 먹통이 되어도 바꿀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어쩌나, 스벅의 신메뉴를 시도하는 것도 아니 스타벅스 메뉴를 사 먹는 것조차 연중행사가 되어버리면 어쩌나, 직장에서 조용히 나에게 사직을 권고하면 어떻게 하나, 큰 병이 나서 수천만 원의 빚을 떠안으면 어쩌나, 우리 고양이에게 싸구려 밥만 먹이다 치료비가 없어 필요한 수술을 못해주면 어쩌나. 


내 안에 수천 가지 수만 가지의 구체적인 두려움이 있다. 소고기를 먹을 때, 에어 팟으로 BTS의 신곡을 들을 때, 카페에서 비싼 딸기 메뉴를 시킬 때, 택시를 타고 퇴근할 때와 같이 모든 즐거운 것들을 누릴 때 마음 한편에선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언젠가는 이것도 못할 거야. 실컷 즐겨둬."


그러한 불안과 걱정이 내가 계속 노오력하도록 만든 부분들도 인정한다. 지금의 17층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엔 반지하와 햇살도 거의 없는 쪽방들을 전전했던 시절이 있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습관이 생기기 전엔 일에만 매몰되어 다른 것에 에너지를 뺏길까 전전긍긍하던 나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한 숨 돌릴 수 있게 되었고, 두려움들이 나를 drive 하던 시절은 종결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새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다시 쓸 수 있게 되었음에 홀가분하다.


그동안은 두려움이 나를 삼킨 채 나는 두려움이 나를 끌고 가는 데로 살아왔지만, 이젠 두려움과 친구가 될 수 있다. 두려움의 말에 지배받지 않고, 두려움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두려움과 직면하게 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하지만 또다시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두려움에 대한 글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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