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내에서 '유연함의 힘'이라는 책에 기반한 유연함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한다. 그 책을 아직 읽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다만 관련 발표(녹화본)를 들은 적이 있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고, 그 결과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 유연함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발표를 듣기 전부터 난 이미 많이 유연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유연함이라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왜냐하면 지금 하는 업무 자체가 유연함을 발휘하지 않으면 힘든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유연해졌다고 생각한다.
난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음식을 먹어도 새로운 도전보다는 안정적인 아는 맛을 선호하는 편이고 길을 가도 알고 있는 길로 가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보면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살아온 모습을 보면 모순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일상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전자제품도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한 회사에서도 다양한 조직에 속해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경험해 보았다. 조직 책임자에게 하나의 프로젝트에 오랜 경험을 쌓아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호소하면서도 새로운 업무 기회가 주어진다면 관심이 있느냐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화답하는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렇게 된 것 같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되면 또 이 프로젝트에 오래 머물고 싶다는 호소를 시작한다.)
아마 어떤 성향이 강하다고 해서 모든 부분에서 그러한 성향인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변화를 싫어한다면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 알 기회도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가 하던 방식으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걱정과 다르게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운이 좋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몇 번 반복이 되고 오히려 더 좋은 성과가 나는 경우도 경험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아,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대표적인 케이스가 강의 준비하기다. 강사라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질문의 질문의 질문까지 예상하고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도 청산유수처럼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나도 모르는 게 있을 수 있지 않나? 그렇게 모든 것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럼 그 과정 자체가 힘들게 되고 결국 그 일 자체가 싫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대충 하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여전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정말 불가피하게 내가 생각한 것보다 강의 준비가 덜 된 적이 있었다. 방송으로 치면 방송사고가 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 강의 피드백이 다른 강의보다 좋았다.
물론 항상 성공적인 경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과 며칠 전 강의에서도 라이브 코딩을 하는 도중 실수가 있었다. 여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상대로 동작하지 않았을 때 많이 당황하는 편이다.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머릿속은 순식간에 하얘진다. 누군가의 말소리는 들리고 대답도 하지만 당황스러움에 온 신경은 다른 곳에 가 있다. 요즘 말로 뇌정지가 온 것이다. 어려운 것이라면 차라리 이해라도 하는데 별 것도 아닌 쉬운 내용인데 왜 그렇게 당황스러운지 원. 역설적이게도 쉬운 것이라 더욱 당황스러운 것 같다. '당연히 되어야 하는데 왜 이러지?, 이렇게 쉬운 것도 하지 못하는 나는 지금 얼마나 바보 같은 모습일까?'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이 든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실제 업무에서도 누가 보고 있어서 삐걱삐걱 고장 난 적이 있었다. 신입 시절 이슈를 수정하는데 선임분들이 뒤에 2~3명 서서 내비게이터 역할을 하고 내가 드라이버 역할을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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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전부 잘해야 된다는 강박에서 온 것 같다. 혼자서 코딩하면 모르는 것을 검색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인데 누가 보고 있는 상황에선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들키기 싫은 것인지 멋져 보이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작성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뭔가 막히면 눈앞이 깜깜해진다.
수업 중에 바보 같은 질문도 언제든지 하라고 말하면서 정작 내가 바보가 되는 것은 두려웠던 것일까? 여전히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생각 자체도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심지어 작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올해 강의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 세운 목표는 완벽한 강의보다는 이전보다는 좀 더 나은 강의를 하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50점짜리 수업이었다고 해도 스스로 지난번보다 나아졌다고 생각되면 만족하기로 했다.
이 전략은 내가 면접을 볼 때 쓰던 것이다. 처음에는 면접에서 많은 대답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고 그로 인해 탈락의 고배는 더욱 쓰디썼다. 오롯이 내가 못난 탓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합불 여부보다는 다른 면접에서 나온 질문과 유사한 질문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답변을 했다면 스스로 만족하기로 했다. 물론 탈락의 고배가 달진 않겠지만 이전보다 쓰진 않았다. 면접을 통한 성장 전략이다. 이것이 그나마 가능했던 이유는 면접 직후 거의 모든 질문을 복기하여 메모장에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내가 잘 모르는 개념과 공통적으로 많이 묻는 개념을 학습 리스트로 정하고 틈틈이 정리했다.
그렇다. 면접에 대한 회고를 하듯이 나는 지금 지난 강의에 대한 회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강의보다는 좀 더 나은 강의를 하자는 목표는 작년에 라이브 코딩 중에 당황한 것보다 더욱 크게 당황하며 와장창 무너졌다.
하지만 괜찮다. 다음에 잘하면 된다. 이전보다 목표가 낮아진 것이니 오히려 좋다. 다음에 같은 순간이 오면 당황하지 않겠다고는 못 하겠다. 다만 지난번보다는 덜 당황하도록 하자. 나는 그 순간을 헤쳐 나갈 정도의 역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를 믿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