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위로는 어떤 것일까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고 든 생각
1
밤마다, 흘러간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한두 편씩 보고 있다. 이 드라마 얘길 하면서 많은 이들이 '인생 드라마' 운운할 때, '그래, 드라마 보는 게 취미인 사람들은 인생 드라마가 한 백 편쯤은 되겠지.' 하고 넘겼다. 어느새 그 긴 대열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 이건 인생 드라마다!
<호랑이 선생님>을 보며 가장 감명을 얻는 이들은,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었을 것이다. <나의 아저씨>는 그 자체로 훌륭한 드라마지만, 내가 아저씨라, 더 진하게 와 닿는 감정이 있을 것이다. 박동훈(이선균) 부장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문득 자문한다. '왜 이해가 되지? 저 표정.. 왜 알겠지?' 하고. (하필, 이 시점에 나는 직장에서 부장님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어깨에 힘이 빠져가는 아저씨에게만 감흥을 주는 드라마는 아닐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누구 하나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 아픈 이가 다른 아픈 이를 위로하고 챙기는 모습을 볼 때 우린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먼저 느끼는 마음은, '비애감'이라고 번역되는 페이소스다. 그 바탕 위에서 묘한 온기도 발생한다. 슬프지만, 따뜻하다.
이 드라마에선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계속 피워낸다. 캐릭터들도 저마다의 복합성을 내세우며, 세상에 자신을 내놓고 씨름한다. 되바라졌지만 안쓰럽고, 거칠지만 세심하고, 억세지만 눈물 많고, 낙담했지만 갈구하는, 인물들이 서로 조응하면서 서로의 위로가 되기도, 칼날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아프지 않아서 다른 이를 위로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핍과 시련을 안은 채 다른 이를 포용하는 존재들이다. 난 이 드라마가 이 같은 사실을 절절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건 판타지 같지만, 어쩌면 가장 현실에 가까운 얘기다. 그래서 마음이 움직이고, 위로를 얻는 게 아닐까.
2
우리가 가장 위로를 느끼는 때는 언제일까. 누군가 위로의 말을 건넬 때일까. 내게 잘해줄 때일까. 나조차도 나 자신에 대해서 누군지 모르겠을 때, 내가 누군지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가 아닐까.
정희네 포차에서 동훈은 동생 기훈(송새벽)과 이런 취중 대화를 나눈다.
동훈: 누가, 나를 알아. 나도 걔를 좀 알 것 같고.
기훈: 좋아?
동훈: 슬퍼.
기훈: 왜?
동훈: 나를 아는 게 슬퍼.
동훈이, 누가 나를 안다고 느꼈을 때, 난 그가 더없는 위로를 받았을 거라 생각한다. 근데 왜, '나를 아는 게 슬'프다고 했을까. 누군가에게 현재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상황이 형편없어서 서글프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자신을 아는 상대인 지안(이지은)이 자신을 알게 되기까지 걸어왔을 생의 고단한 과정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를 알아줘서 좋지만, 나를 알게 되는 감각을 얻기까지 치렀어야 할 고통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동훈은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가 불쌍하고, 상대가 잘 되길 바랄 수 있는 것이다.
문득, 내가 알던 나 자신이 희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 난 그런 사람이었는데, 이제 나를 아는 사람은 주변에 없는 것 같이 느낄 때가 있다. 껍데기뿐인 것 같고, 드라마 속 이지안의 대사처럼, '성실한 무기수처럼 꾸역꾸역' 삶을 살아간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 필요한 사람은, 나를 알아줄 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사람은 원래 이래요."라든가, "이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같이 진짜 나에 관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나의 특별함과 비범함을 증언해줄 한 사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찾아온 기적 같은 어떤 만남에 대한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래서 난 아이를 재우고, 방에 작은 등 하나를 켜고 이 드라마를 재생할 때, 마음이 시리고 또 설렌다. 난 누군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만남은 '현실 같은 판타지'로 부를 수도, '판타지 같은 현실'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쿨하게 쓰고 싶었지만, 다 쓰고 보니 그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중년의 삶이란 게 그런 걸까. 결코 쿨하게 말할 수 없는, 내뱉는 순간 질척 질척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