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이제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느낄 때가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아이가 태어난 후 펼쳐진 세계다.
책임질 존재들이 생겼고, 나의 시간과 자유를 헐어 가족들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가정을 꾸리고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건, 사랑하는 것이 책임과 의무가 된다는 뜻이다. 그런 사랑이라면, 내 자유를 제한당할 가치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책임과 의무 이전의 시간들을 추억하며 지금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 그것이 가정을 이룬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점점 나이를 먹어 마흔이 넘었고 이제 ‘아저씨’로 불려도 어색하지 않다. 난 완숙 토마토처럼 점점 숙성된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다.
모임에서 한 선생님이 자기가 이제 다른 위치에 있다고 느꼈던 경험을 말해줬다. 언젠가 학교 전체 회식이 끝나고 선생님들이 식당 밖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귀가를 하고, 젊은 선생님들은 2차를 가는 분위기였다. 젊은 선생님 중 하나가 그에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단다. “부장 선생님, 집에 조심히 들어가시고 내일 뵈어요.”라고. 마무리 인사였다.
그는 으레 자신도 2차에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엔 늘 그래 왔고 이번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때 깨달았다. 이제 젊은 선생님들은 자신에게 동류의식을 품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계 하나를 넘어왔다. 어쩌다 그도, 아저씨가 되었다. 젊은 동료의 마무리 인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괜찮은 아저씨가 되기 위한 답은 이것이다. 외롭고 높고 쓸쓸하기로 작정하는 것. 그건 어쩌면 아저씨가 지표로 삼아야 할 삶의 원리 같은 것이다. 외롭다고 징징대고, 자꾸 아래로 손 내밀며 질척대고, 쓸쓸함을 벗어나기 위해 허튼짓을 하는 어른은 기피 대상이 된다.
시인 백석은 30세의 나이에 먼 만주 땅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시를 썼다. 그 시엔 내가 사랑하기도 하고,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준 구절이 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그 시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신의 처지를 수용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난 이 시의 시적 화자가 이제 중년이 된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저씨가 된 어른들은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과 비슷한 처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의 해>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대충 이런 말을 씁쓸하게 되뇌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엔 커서 갈 곳이 있었고, 다른 지방에서 대학을 다닐 때는 돌아올 고향이 있었지만, 이제는 돌아갈 데가 없다. 현실에 정착한 지금, 내 삶에 흐르던 변화의 에너지는 소멸하고 앞으로도 오랜 기간, 아니 어쩌면 영원히 이곳에서 뿌리박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갈 곳 없는 내겐, 여기뿐이다,라고.
고향은 영원한 그리움의 공간이다. 다시 구현될 수 없는 그리움 말이다. 그 ‘고향’은, 나를 잘 알고 나의 미숙함도 받아준다. 내가 설익었던 그때부터 나를 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근엄하게 보일 필요도 없고, 긴장할 필요도 없다. 어떤가. 이런 고향이 있는가. 언제라도 돌아갈 고향을 가졌는가. 아저씨는 다시 구현될 수 없는 고향에서의 과거를 곱씹는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자키 쓰쿠루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상태를 자각하는 일이고, 백석 시인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 답답해서 어디론가 가고 싶은데, 돌아갈 거처가 있으면 좋을 텐데, 막상 나서려고 하면 갈 곳이 없어 당혹스럽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일은 자주 겪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상태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원리를 따르는 것이 좋다. 그러면 아이러니하게도 조금은 덜 외로운 어른의 길로 갈 수 있다.
삶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난 온전한 아저씨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저씨의 나이쯤 되면 주변에 끼치는 영향력이 이전보다 확대된다. 누군가는 영향력을 휘두르면서 존재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고 애쓴다. 온전한 아저씨가 되는 일엔, 남에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노력보다, '무해한 인간'이 되기 위한 애씀이 더 필요하다. 그러려면 사람들이 모여있는 그곳으로 걸어가서 그들에게 둘러싸이길 즐기기보다, 밤에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독서등 하나에 의지한 채 스스로에게 존재감을 부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더 필요하다.
이 책은, 어쩌다 아저씨가 되었지만, 무해하고 괜찮은 아저씨가 되기 위한 작은 여정이 담겨있다. 아저씨에겐 공감을, 아저씨가 아닌 모든 이들에겐 재미와 이해를 건넬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