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소설가가 진행하는 합평 강의를 들었다. 강의는 줌을 통해 이루어졌다. 코로나19는, 사람들의 거리를 떼어놓기도 했지만, 예전이라면 지방 사는 사람이 만나지 못했을 작가들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앞당겼다. 설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수강생은 돌아가며 소설을 써서 내놓고, 수강생들과 작가님이 합평을 해준다. 참여하면서 놀라웠던 것은,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평론가처럼 날카로운 평을 내놓는다는 점이었다. 나 역시도 다른 이의 소설에서 덜거덕 거리 거나 삐그덕거리는 부분이 잘 보였다. 문제는 '읽어내는 역량'과 '쓰는 역량' 사이의 간극이었다. (뭐, 그것이 결국 합평의 존재이유겠지만.)
읽어내는 만큼 쓸 수만 있었다면, 그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왜 내가 쓴 글에선, 다른 이들의 글에서 찾아냈던 무수한 의문들이 떠오르지 않았던 거지? 왜 매번 이번에야말로 한 건 제대로 했다는 느낌으로 글을 내놓는 거지? 그래서 또 매번, 주력 구질이 난타당하여 허공을 바라보며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투수 같은 심정으로 합평에서 내려오곤 했던 거지?
결국 그런 결론을 내렸다. 다른 이의 글을 보며 찾아냈던 빈약한 연결 고리와 이해되지 않는 캐릭터들, 그밖에 물고 씹고 맛보았던 그 모든 걸, 내 글에서 보고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소설가가 되는 거구나, 하고.
친애하는 페친 중에서도 소설가, 동화 작가가 즐비하지만, 존경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뭘 고쳐야 할지를 비로소 볼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이 난타당하는 경험을 했을지. 난 그런 눈을 얻기 위해서, 의문들을 수리하고 바른 길을 찾아내는 손을 갖기 위해서, 하는 데까지 애를 써 볼 생각이다. 뭐, 쓰는 거 말고는 딱히 즐겁게 할 것도 없다. 욕하고 멈출 수도 있고, 그냥 취미로 남게 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좋다. 가상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에세이를 쓰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희열이 있으니까. 그 순간, 현실의 시간이 멈추고, 다른 시간 속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즐거운 감각이 있으니까.
그렇게 산다. 통타 당하고, 수많은 볼을 던지면서도 계속 그라운드를 찾는 사람처럼, 그저 조금 나아진 모습으로 즐길 수 있길 바라면서.
*작년에 쓴 글인데,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