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봉인 해제되지 않은 퀘스트

by 송광용

학기 초, 열 명의 아이들이 독서토론동아리에 모였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일은 그리 벅차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동화 쓰기 활동에 들어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몇몇 아이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일을 숙제처럼 받아들였다. 운동 동아리에 들어가서 이제 시간이 없다는 아이도 있었다. 초반에 몇이 나가고 결국 다섯 명이 남았다. ‘충성 고객’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다섯 아이들은 진득하게 글을 썼다.

아이들은 격주로 모여 서로의 원고를 내놓고 대화했다.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나는 아이들의 이야기 구성에 조언을 보탰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2학기가 시작된 지금, 원고는 아직 거칠지만 초고는 어쨌든 완성 단계에 다다랐다. 분량만 따져도 A4 용지 열 장 정도. 초등학생이 처음 써본 동화치고는 꽤 많은 분량이다.

지난한 퇴고의 과정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값진 경험 하나를 얻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점심시간 급식소에서 마주친 아이들이 “선생님, 이야기가 잘 안 풀려요.” “고칠 게 너무 많아요.” 하며 불평을 늘어놓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났다. 그건 아이들이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쓴다는 건 결국 자신을 비추는 일이다. 등장인물을 바꿔가며, 부자연스러운 대사를 지우고, 다시 고치는 동안 아이들은 자신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 비교 대상은 결국 내 안의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공감 능력이 조금씩 벼려진다.

빠른 결과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창작은 늘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타인의 내면을 향한 통로를 발견하는 일은 쇼츠처럼 빨리 이루어질 수가 없다.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나는 소설을 장거리 달리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루에 일정한 거리를 뛰듯, 하루에 일정한 분량을 쓴다.”라고 말했다. 요즘 아이들에게 긴 동화 쓰기는 더 느리고 답답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건 단순하다. 아이들이 자신의 첫 동화 원고를 손에 쥐었을 때, 그 종이에 깃든 시간과 고민과 희열을 알아차리기를. 나는 그 기분을 잘 안다. 무언가를 길게 붙잡고 씨름한 끝에 겨우 얻어낸 기쁨 말이다. 아이들 앞에 봉인되어 있었던 퀘스트 하나가 곧 열릴 것이다.

난 열두 살 때 뭘 썼나를 돌아본다. 동화는 언감생심이고, 허술한 일기라도 몇 줄이나 썼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 다섯 아이들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그들 앞에 있을 무수한 퀘스트를,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씩 해제하며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아이들 덕에 내 앞에 놓인 퀘스트를 바라볼 용기가 좀 생긴다. 난 앞으로 어떤 퀘스트를 새로 열어볼 수 있을까. 성장하고 전진하는 아이들처럼, 나도 무거워진 다리를 끌어보기로 한다. 용기를 내야지,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지, 되뇌어본다.



keyword
이전 25화치유는 어떻게 이루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