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더 무비>를 보고
장인이 만든 아는 맛. 어떤 맛인지 이미 알지만, 그래도 감탄하며 먹게 되는 음식. 바로, 내가 <F1 더 무비>를 보며 든 생각이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자동차 레이싱을 하는 주인공 헤이스는, F1 유망주 시절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루벤으로부터 복귀 제안을 받는다. 루벤은 최하위 팀을 이끌고 있는데, 팀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그 팀에는 젊고 뛰어난 드라이버 피어스가 있다. 위기의 팀에 합류한 중년의 헤이스는 MZ세대 피어스와 충돌하며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결국 두 드라이버는 한 팀이 되어 우승을 향해 달려간다.
이야기의 구조 자체는 익숙하다. 전개가 어떻게 흘러갈지 눈에 그려졌다. 영화 초반 나는 이렇게 예상했다. 헤이스는 오래전 사고로 우승을 놓친 숙원을 품고 있으며, 결국 그 숙원을 풀게 될 것이다. 피어스는 처음엔 헤이스를 싫어하지만 그의 영향을 받고 성장할 것이다. 이야기는 예상한 그대로 흘러간다.
그럼에도 세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F1 레이싱의 역동성을 제대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F1에 별 관심 없는 나조차 레이싱 장면과 경기 속에서 벌어지는 서사에 푹 빠져들었다. 전체적인 구조는 익숙했지만, 이 영화에는 하나의 서사가 더 있었다. 바로, 레이싱의 서사였다.
헤이스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전략과 변칙적인 작전으로 팀의 순위를 조금씩 끌어올린다. 어떤 스포츠든 시즌을 치르다 보면 서사가 생겨난다. 어느 선수가 한 경기에서 스타가 되었다거나, 어떤 선수와 격렬하게 맞붙었다거나, 기막힌 작전으로 화제를 모은다거나. F1 마니아가 한 시즌을 보내며 얻을 법한 그 서사를 영화는 단 세 시간 안에 압축해 보여준다. 스포츠 영화가 성공하려면, 그 종목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전략과 전술, 짜릿한 역전의 드라마를 제대로 담아내야 한다. 이 영화는 그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화 속 헤이스는 변칙적인 작전으로 팬을 만들어내는데, 관객들 역시 모두 그의 팬이 되어버린다.
그 순간부터는 서사 구조가 익숙하든, 다소 식상하든 상관없다. 어차피 레이스란 경기장을 수십 바퀴 돌며 반복하는 경기다. 결국 중요한 건 그 차에 누가 타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브래드 피트. 꽃미남 아재이자 잔뼈가 굵은 언더독, 팀에 새 바람을 불어넣는 자유분방한 선수. 그를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관객들은 이미 결말을 알고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의 레이싱카에 몸을 싣게 된다.
올해 지금까지 본 영화 중 가장 재미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는 감독의 전작 <탑건: 매버릭>과의 유사성을 말한다. 실제로 인물 배치, 캐릭터 설정, 서사 구조가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나는 <F1 더 무비>가 훨씬 재미있었다. 스포츠가 만들어내는 아기자기한 서사와 F1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낸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갈등의 중심축은 전성기를 지난 중년 헤이스와 부상하는 신예 피어스 사이의 간극이다. 헤이스는 드라이빙 외적인 요소와 자기 부각에 신경 쓰는 피어스가 못마땅하다. 피어스를 ‘관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대로 피어스는 다른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헤이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헤이스가 자신이 받아야 할 주목을 빼앗아간다고 느낀다.
같은 아재 입장에서, 피어스처럼 능력 있지만 다소 오만해 보이는 젊은 동료를 만났을 때의 기분이 떠오른다. 꼰대가 될 것인지, 점잖은 선배로 남을 것인지 늘 내적 갈등을 했다. 그런데 영화 속 헤이스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우승을 바라는 동등한 레이서로서,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부딪힌다. 소리치고 충고하며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이는 어쩌면 동서양의 문화 차이일 수도 있다.
나도 30대 때는 꼰대가 될 용기를 내어, 아니다 싶은 일에는 직언을 했다. 다행히 받아들여져 뒤에서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많았다. 하지만 40대 중후반이 된 지금은 오히려 내적 갈등이 줄었다.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어도 그냥 두는 경우가 많다. 힘이 빠진 건지, 참을성이 생긴 건지, 아니면 “나나 잘하자”는 자기비판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존경받고 싶은 욕구,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꼰대가 될 용기를 낼 때 근거가 되어야 하는 건 알량한 권위 의식이 아니다. 헤이스처럼 열망이 있는 동료를 인정하고, 자기 실력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할 때 꼰대질은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헤이스가 결국 피어스의 존경을 얻은 이유는, 그가 피어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며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소리치는 것만으로는 권위나 존경이 생기지 않는다. 희생과 이타심이 바탕이 된 꼰대질만이 설득력을 가진다.
아재들은 기억해야 한다. 꼰대가 될 용기를 냈다면, 희생할 각오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아재 판타지를 보여주는 영화, <F1 더 무비>.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동시에 주는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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