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책 쓰기 연수를 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강조한 건 기술적인 것이 아니었다. “취향을 가지세요. 취향이 있는 사람이 책도 쓸 수 있습니다.”
글쓰기는 거창한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가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여행이든, 운동이든, 몰입하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좋다. 거기서 삶을 풍성하게 할 무언가가 나오고, 글의 씨앗도 나온다.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있었다. 꽤 오래 캠핑을 좋아했던 친구는, 몇 달 전에 만났을 때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 후에 보홀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즐겼다는 얘길 들었다. 이번에 만나서는 골프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취향화’ 하는 태도가 좋아 보였다.
돌아보면, 내 또래의 아버지 세대가 40대였던 시절, 중년 남자에게 취향이라는 말은 썩 어울리지 않았다. 취향은 왠지 여성이나 섬세한 느낌을 풍기는 남성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외로운 어선처럼, 일과 술 사이를 오가며 몸과 마음을 소진시키고, 결국 가족들에게도 외면받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나름의 사정도 있었다. “내 시대엔 다른 걸 배우거나 즐길 여유가 없었어. 일에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길 요구받았거든. 배우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건 술뿐이었지.” 그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워라밸의 시대가 되었지만, 취향을 갖는다는 게 더 쉬워지진 않은 것 같다. 요즘 우리의 취향은 자주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끊임없이 손가락을 움직여 스크롤을 하고 나면, 남는 것은 허무한 피로뿐이다. ‘시간 괴물’이 우리의 하루를 갉아먹는다. 유튜브의 짧은 영상, 끝없는 알고리즘 속에서 취향은 쉽게 소모되고 만다.
예전에 정년을 앞둔 교장 선생님이 내게 해주신 말씀이 있다. “꼭 평생 할 취미를 만들어 놓게. 정년을 앞두고 보니, 이제 집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말은 단순한 충고를 넘어선, 은퇴 후 삶을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지에 관한 절박한 고백이었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사이드 웨이>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두 중년 남자가 와인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주인공 마일즈는 소심하고 실패한 인생 같지만, 와인을 향한 취향만큼은 확고하다. 그가 와인 품종인 피노누아를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이 포도는 다루기 힘들고 쉽게 병들지만, 그렇기에 정성을 들여야만 진짜 맛을 내지." 이 대사는 그의 인생을 말하는 것 같다. 와인에 대한 그의 사랑은 오래 숙성된 와인처럼 진짜 맛을 내기 시작했다. 다루기 힘든 취향을 세워낸 주인공의 삶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직함도 내려놓고, 일의 무게도 덜어낼 것이다. 그때 남는 것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스마트폰을 덮고, 작은 취향이라는 배에 올라타는 일. 그것이야말로 나를 먼바다로 데려갈 유일한 항해 수단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