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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Aug 15. 2023

나와 바리공주의 혐관

연구를 연애로 비유하자면

사람마다 인연이 있고, 인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난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지요?

한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한 남성이 소개팅에 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고대하던 소개팅이라 매우 안타까워했는데. '될놈될'이라고, 그 남성은 사고 처리를 하던 과정 중에 접촉사고를 낸 사람과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요. 진짜인지는 모르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인연은 있고, 인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난다는 말의 예시로 이 일화를 꺼내오곤  합니다. 당신은 인연론을 믿나요?


학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학위논문 주제도 인연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학문을 한다는 건 덕질과 유사하다고들 말합니다. 논문으로 '우리 애 예쁜 것 좀 보세요!'라고 외칠 때면 그 말에 공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학문은 즐거움은 찰나고 괴로움이 태반이라는 것이 덕질과의 차이가 아닐까요. (안 괴로우시다고요? 그렇다면 부럽네요.)

학위논문 주제는 짧게는 1년 길게는 4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마주해야 합니다. 날 수렁에 빠뜨리는 대상을 몇 년간 요리조리 관찰한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면 안 되겠지요.


오늘은 인연의 시점으로 저의 학위논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박사논문 주제와 저는 수업에서 만났어요. 처음부터 눈길이 갔어요. 그리고 쟤라면 잘해볼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주는 매력이 분명 있었어요. 사람들은 너에게 좋은 인연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곤 하지만 저는 후회 없어요. 궁금했거든요. 무슨 생각을 할까? 왜 그런 생각을 할까? 물론 저를 오래, 많이 괴롭게 했어요. 그래도 다 이 정도는 다투면서 만나잖아요. 여전히 궁금한 게 있는 걸 보면 꽤 괜찮은 인연인 것 같아요.


석사논문 주제는 조금 달랐어요. 얘랑도 수업에서 처음 만났어요. 교수님이 얘랑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시는 거예요. 얘가 좀 신비주의였거든요.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신비주의가 아니라 완전 모순덩어리인 거예요. 교수님께 말했어요. "얘 완전 모순덩어리예요!" 그랬더니 "석사논문 주제로 걔 이야기를 하면 되겠구나."라고 하시는 거 아니겠어요? 석사논문은 써야 했고 딱히 마음에 드는 애가 없어서 그러기로 했죠.

걔는 자존감이 낮고, 자기 과시랑 과장이 심했어요. 그 정도는 아닌데 하고 시큰둥하게 봤죠. 근데 얘가 그렇게 된 건 주변 사람들 때문이더라고요. 멸시하고 비난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런 거였어요. 자기를 잔뜩 부풀려서 자기를 보호하고 있었던 거죠.

석사논문에서는 그 이야기를 했어요. 걔가 갖고 있는 모순과 과장,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가시 돋친 시선.


실은 석사논문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땐 누군가를 탐구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거든요. 여러분들도 어릴 적, 미숙했던 시절 실패했던 연애가 있지 않나요? (모두 다 아름다웠다고요? 정말요?) 언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뚝딱이고, 다툼을 해결할 줄 몰라 노력하는데 갈등만 깊어지고. 제 석사논문은 그래요. 미숙함의 덩어리예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모두 불태워버리고만 싶어요!


석사논문에서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게 바로 바리공주였거든요. 전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싫어요. 근데 바리 걔가 딱 그랬어요. 사람들은 걔가 너무 좋다는데 전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석사논문이 끝나면 영영 들여다보지 않을 거라고 맨날 말했어요.


그런데요. 석사 졸업식 날 저녁 술자리에서 잔뜩 취한 제가 뱉은 말은 지금도 믿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바리공주의 아름다움을 몰라주는 게 저는 너무 속상해요."

저 말을 하면서 제가 엉엉 울었대요.


술에서 깬 저는 그럴 리 없다고 말하면서도 늘 찜찜했어요. 혹 내가 내 진심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마음먹었죠. 내가 조금 더 성숙하고, 너른 마음으로 인연을 맺을 수 있을 때 바리공주를 다시 들여다보리라.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인 민주킴에서 '바리공주 컬랙션'이 나온 게 아니겠어요? 노란색에 흰색으로 그려진 바리공주 모티프의 문양, 풍성한 실루엣. 옷에 홀딱 반한 저는 결심했죠.

"지금이다. 바리공주로 쓴 논문이 게재되면 나에게 바리공주 컬렉션 옷을 나에게 선물해 주리라."

옷이 갖고 싶어서 바리를 다시 만나보기로 결심했어요.


그간 1n개의 논문을 쓰면서 성장한 건지 바리과 차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요. 제가 기억한 것보다 좋은 애더라고요. 그 아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세운 모순 같은 손쉽게 넘길 수 있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논문을 써 게재했고, 저에게 바리공주 컬렉션의 원피스를 선물했죠.



'그때의 걔를 지금 만났다면'이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합니다.

저도 늘 생각해 왔어요. 바리를 지금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럼 더 잘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오랜 시간 그렇게 생각만 했어요. 그러다 옷이 갖고 싶어 다시 찾아갔어요. 참 웃기죠.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인연이면 좋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상처 내며 성장할 인연이었나 봐요. 석사논문에 우리의 미숙함을 기리기리 남겼다는 것은 창피하지만 바리 덕에 많이 배웠으니 되었어요. 교통사고로 누군갈 만나듯, 아름다운 옷 덕에 다시 만날 인연인 거죠.


저와 바리의 재회는 아래의 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답니다. ;)

https://brunch.co.kr/@mythmyt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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