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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Jan 09. 2024

[한국의 신화] 뇌물은 저승에서도 통한다네

지난 글에서 죽을 운명이라면 어디에 숨어 있듯 유능한 저승사자가 쫓아온다는 이야기를 했었죠. 지난 글이 궁금하다면 아래의 글을! 그러나 읽지 않아도 오늘의 글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장수의 비법에 대해 이야기할 거니까요.

https://brunch.co.kr/@mythmyth/31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죠. 역사에서 죽음을 피하려고 발버둥 친 권력자의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락사의 합법화를 논하고 있는 지금, 죽음을 피하려던 몸부림은 잘 이해가 가진 않습니다. 한편 내가 부유하고 권력이 있다면 그것을 영원히 누리고 싶다면, 맨몸으로 왔다가 맨몸으로 간다는 사실을 피하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도 종종 죽음을 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만약 오늘 내 생이 끝난다 하면 아쉬운 것이 한두 개 정도 쉽게 떠오를 테지요. 할 수 없음 앞에서는 많은 것이 강렬히 간절해지고 아쉬워지잖아요. 죽음까지 가지 않더라도 연인과의 이별 앞에서, 더 이상 할 수 없음을 마주했을 때 찾아오는 염원의 강렬함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한국의 신화에는 죽음 앞에서 다시 삶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물론 『신곡』과 같이 "내가 저승 세계에 가보니"와 같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저승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면 바리공주처럼 또 강림처럼 신이 되었겠지요. 신화에 전해지는 장수 비법은 나의 목숨을 거두러 온 저승사자를 어떻게 돌려보냈나 하는 작은 이야기랍니다.



제주도에서 전하는 신화 <사만이 본풀이>에 바로 그 비법이 전해집니다. 이 신화 속 주인공은 신이 아니라 보통 사람입니다. '사만이'는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이고요. 그럼 사만이가 전해주는 장수의 비결을 한 번 들어볼까요?


사만이는 똘똘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엉뚱하고 어떻게 보면 답답한, 요즘 말로 치자면 부인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만이의 집은 매우 가난했다. 부인이 자신의 머리를 잘라 사만이에게 주며, 장에 가 머리를 내다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 오라 한다. 그런데 사만이는 그 돈으로 조총을 산다. 부인이 그를 원망하자 자신이 총으로 먹을 것을 구해오겠다며 들판에 나갔지만 새 한 마리 쏘지 못하고 배회하였다.
그러다 해골 하나를 주웠다. 사만이는 그 해골을 가져와 집안의 곳간(고팡)에 모시고 소중히 대했다. 그 후로 사냥이 잘 되어 사만이는 부자가 되었다.


부인이 어떤 마음으로 머리를 잘랐을까를 생각하면, 사만이의 기행에 한숨이 나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만이는 그 조총의 쓰임을 어떻게든 찾아보겠다고 들판으로 나섰고. 그 덕에 만난 해골 덕분에 부자가 되었지요.

쌀을 샀으면 한 번 먹고 없어질 돈이었는데, 사만이의 기행과 해골을 모신 정성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니. 그러나 이 신화는 '조총'을 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백골을 모신 사만이의 정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백골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쉽게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죽으면 그 자손들이 무덤을 만들고, 그 무덤을 관리합니다. 비가 많이 와 봉분이 무너져 내리면 그것을 보수하기도 하고 또 때가 되면 벌초를 하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저 백골은 왜 들판에 나뒹굴고 있었을까요?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자손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망자였겠지요. 자손도 돌봐주지 않는데, 일면식도 없는 사만이가 해골을 고이 모셔 제사까지 지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그러니 고마움에 사만이를 도와준 것이겠지요. 그 해골이 특히나 사냥을 잘하게 해 줬다는 점에 주목해서 해골이 수렵채집을 하던 조상이었다고 보는 논문들도 있지만,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고마움"으로 해골의 선물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골이 사만이의 꿈에 나타나 알려줍니다.


"곧 저승사자가 너를 데리러 올 것이다. 집 앞 삼거리에 음식 한 상을 차리고 옷과 신발 세 벌을 준비해 옆에 두어라."


사만이를 잡으러 지상에 온 저승사자들을 시장했는지 음식을 발견하자마자 맛있게 밥을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알았죠. 그것이 사만이가 차려둔 밥상이라는 것을.

저승사자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던 것이지요. 망자로부터 뇌물을 받으면 그를 잡아갈 수 없다는 걸요. 해골은 그걸 알고 집에서 떨어진 곳에 밥상을 차려두게 했고, 저승사자들은 누가 차려둔 밥인지도 모르고 먹었다가 사만이가 차려둔 것임을 알고 이마를 치는 것이지요.

"잡아가야 할 사람으로부터 뇌물을 받아버렸구나!"

저승사자들은 사만이를 잡아가지 않았고, 사만이는 오래오래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장자풀이>의 사마장자도 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모면했던 것 보면 암암리에 전해지는 장수 비법이었나 봅니다.


장수의 비법은 바로 '저승사자에게 뇌물을 줘라' 였던 것입니다. 동방삭처럼 뛰어난 재주가 있어 저승사자를 속여 어딘가에 숨어 살지 않아도, 마침 많이 허기진 저승사자가 오고 그에게 밥을 먹이면 나의 운명보다 더 오래 살 수 있어요. 밥으로 생명을 연장한다니, 밥 먹었는지를 안부인사로 삼는 한국인 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저승사자를 만나면 물어볼까 봐요. "식사는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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