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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메이트신화라 Jul 31. 2021

엄마의 피아노

엄마가 시작해서 엄마가 끝을 낸

"저 피아노를 치아야 할 텐데..."


엄마는 거실 한 켠에 있는 피아노가 거슬리시나 보다.

깔끔하게 정리하기 좋아하는 엄마는 거실에 있는 피아노를 치우고 다른 걸 놓고 싶어 하시는 눈치였다.


근처 사는 남동생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남동생은 '사다리차도 불러야 하고 사람도 불러야 치울 수 있을 것'이라며 귀찮아하는 눈치였다며 엄마는 내게 이야기하신다. 그 말인즉슨, '니가 어떻게 좀 해봐라'는 뜻인걸 나는 안다.


우리 집에 있는 피아노는 내가 초등학교 5~6학년쯤 '벼룩시장'이라는, 요즘으로 치면 '당근 마켓'과 비슷한 중고거래 신문을 보고 중고로 산 피아노이다.

엄마의 쌈짓돈으로 마련한 피아노는 10평의 작은 아파트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나와 동생들의 피아노 연습용으로 많이 쓰였다.

그 시절 우리집 피아노와 지금 내 나이대인 엄마

사실 나는 초등학교 1~2학년까지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당시 피아노 교습용 교재 제일 마지막 장에 붙어있는 종이 건반으로 매일 연습을 했다. 허밍으로 음을 흥얼거리며 엎드려서 종이 피아노를 치고 있는 딸을 보면서 엄마는 조금씩 돈을 모으셨다. 나는 그게 마냥 재미있는 놀이였지만 엄마 눈에는 '피아노가 없어서 제대로 연습도 못하는 안쓰러운' 모습으로 보이셨나 보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갑자기 엄마는 '다시 피아노 학원을 다니라'라고 하셨다. '6학년이 다되어 갑자기?'

반 강제적으로 나는 피아노 학원을 다녀야 했다. 이유는 '엄마가 피아노를 샀기 때문'이다.


여동생과 나는 피아노 덕분에 피아노 학원을 매일 가야 했다. 연주회도 나가고 피아노 콩쿠르도 나갔다. 그런 딸들의 모습을 보며 엄마는 많이 흐뭇해하셨던 것 같다. 소중한 쌈짓돈으로 마련한 피아노는 그만큼 엄마에게는 특별한 것이었다.


엄마는 가끔 우리에게 피아노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한 손으로 치기 쉬운 '아리랑'을  알려드리면 엄마는 그걸 몇 번이고 연습했다. 엄마는 서툴게라도 아리랑을 연주하면서 해맑게 웃으셨다.


내게서 첫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자라면서 피아노는 장난감이 되어주었다. 딸이 유아였을 때, 두 손으로 막 누르고 올라가서 발로 밟기도 할 때 웅장하고 큰 소리를 내는 피아노는 그저 딸에게 장난감일 뿐이었다. 딸이 자라 피아노를 배우면서 그 피아노는 음다운 음을 내기도 했다.  엄마는 피아노 연주를 하는 손녀를 보면서 좋아하셨다.


이제 딸도 자라 할머니 댁에서 피아노를 더 이상 치지 않는다. 그런 피아노의 쓸모를 보면서 엄마는 결단을 하신 것 같았다. 어느 날부턴가 친정에 가거나 엄마와 통화를 하면 항상 '그 피아노를 치아야 할낀데'라는 말이 꼭 나왔다.


친정에 가서 저녁을 먹던 어느 날, 엄마는 그간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풀어놓으셨다.

"저 피아노를 고마 땅땅 내리쳐서 부셔서 버리면 안 되나?"

저렇게 큰 피아노를 어떻게 분리시킨단 말인가...

그런데 사위는 장모님 말에 또 바로 반응한다.

"장비를 구해서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고된 '피아노 분리 작업'은 막을 올렸다.

남편이 큰 드라이버와 전동드릴 등을 구해와 친정으로 함께 갔다.

70이 다 된 엄마와 남편과 나는 셋이서 장갑을 끼고 야심 차게 피아노 뚜껑부터 분리했다. 겁도 없이.


30년이 넘은 피아노는 조율을 한 지도 오래되었다.

그만큼 피아노를 열어본지가 오래되어 고정된 나사들이 다 녹이 슬거나 아주 깊이 박혀있었다.

또 피아노 분리 전용 드릴이 아니었기 때문에 준비해 간 장비들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피아노 안에 있던 무거운 동판이었다.

피아노 줄을 끊어내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거운 몸체인 동판은 세 명이 붙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단 후퇴.

겁 없이 피아노 분리시작
문제의 동판

며칠 후, 오후에 시간이 나던 남편은 혼자서 장비를 들고 친정으로 갔다.

결론은 잘 분리해서 버리고 돌아왔다고.

그런데, 남편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자기 혹시 허리 다친 거 아냐?"


남편은 그날 이후로 병원 치료와 진통제를 먹고 며칠을 보내야 했다. 절대 장모님께 이야기하지 말라는 남편과 사위가 고맙고 혹여나 다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그렇게 일을 추진한 당신이 어리석었다는 엄마의 말 사이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렇게 피아노를 분리시켜 버린 후, 엄마는 남동생에게 엄청 잔소리를 들었다고. 사람 다치면 어쩌려고 그랬냐, 차라리 돈을 주고 사람을 부르지 그랬냐 등등. 그런 이야기를 하는 엄마에게 '그러려면 지가(남동생) 그렇게 처리를 빨리 해주던지, '라고만 했다.


엄마는 이후에 어린이날, 내 생일, 사위 생일마다 용돈을 부쳐주셨다. 내가 그러지 마라고 이야기를 드리면

'피아노 일도 있고...'라며 그 빚을 갚고 싶어 하시는 느낌이었다.

그 마음을 아니까 '잘 받을게요'라고 말을 건네기만 했다.


엄마 근처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 집에 가는 남동생이 어느 날 우리 남매 단톡방에 사진을 하나 올렸다. '엄마 거실에 이거 샀더라.'

엄마가 사고 싶어 했던 돌 소파다. 피아노가 없어야만 놓을 수 있던 돌 소파.

친정에 가서 돌 소파에 일부러 누워보며 '이거 참 좋네'라고 했다. 엄마는 신나게 돌 소파에 대한 장점과 특징을 이야기해주신다. 엄마가 좋으면 됐다.

엄마집 돌 쇼파

비록 엄마 모르게 남편의 허리가 뜨끔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엄마의 오랜 숙원이었던 '피아노 버리기'는 성공이었다. 엄마가 오래 살아도 30년.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드리고 싶다.  


엄마로 시작해서 엄마의 결정으로 끝낸 우리 집 피아노.

추억의 피아노는 이제 정말 추억으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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