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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재 Mar 17. 2023

동백꽃

동백꽃과 이름

며칠 전 시골집에서 나무 가지치기를 했다. 추위도 추위지만 유난히 눈이 많았던 이 겨울이 가고 있다. 봄이야 오건 말건 겨울이 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푸근해진다. 돌아오는 길에 누나가 준 동백꽃 화분을 하나 가져와서 거실 한쪽에 두었다.     


사흘 째 되던 날, 그 화분에서 빨간 동백꽃 3송이가 피어났다. 여수 오동도에서 봤던 동백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지없이 놀라웠고 반가웠다. 언젠가는 뚝뚝 떨어지겠지만, 이 겨울에 탐스럽게 핀 빨간 꽃을 보니 무척 기뻤다. 이틀 후 한 송이 동백꽃이 송이채 뚝 떨어졌다. 그 꽃을 흙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더니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동백꽃은 4.3 항쟁을 상징하고 있듯, 슬픈 의미를 안고 있기도 하다. 빨간 동백꽃의 색과 그 꽃송이의 일생이 외세에 의해 아무런 죄 없이 스러져간 영혼들과 비슷해서 그들을 추모하고 기억하자는 의미인 듯하다.           

동백꽃에 얽힌 노래와 드라마와 소설 등 이야기는 참 많다. 아마도 꽃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합니다.”라는.     


‘이선희의 동백꽃’,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동백섬)’와 같은 노래와 ‘공효진과 강하늘이 나오는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도 유명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필자에게는 ‘오페라 춘희(La Traviata)’의 바탕이 되기도 했던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Alexandre Dumas, fils)의 동백꽃 아가씨(La Dame Aux Camelias)’라는 소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소설은 동백꽃을 무척 좋아하는 화류계의 여성 마르그리트 고티에와 부유한 귀족 집안의 아르망 뒤발의 슬픈 사랑을 그린 이야기다. 이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소설이 필자의 직장 생활과 평생 함께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입사를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외국회사에서 온 사람들과 미팅이 있던 날이었다. 필자는 당시 막내여서 그냥 앉아 있기만 할 자리였는데, 우리 팀장님은 그 자리에서 나를 아르망(Armand)이라고 소개했다. 처음엔 그게 내 이름인지 긴가민가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하고 나서도 계속 나를 아르망이라고 부를 때, 그때 비로소 내 이름이 아르망으로 확정되었다는 걸 알았다. 마주 앉아 있던 사람은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 소설의 내용과 주인공들에 대해서도 서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불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프랑스통인 그 팀장님은 벌써 나를 그렇게 소개해 버렸고, 이미 모든 대화는 불어로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묻는 말에만 답을 하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내 명함의 영문(불문) 이름은 Armand LEE로 바뀌었고, 외국으로 나가는 팩스와 텔렉스에도 그렇게 쓰였고 불려졌다. 그렇게 소설 “동백꽃 아가씨와 아르망 뒤발”은 나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내 영문 이름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말한 건 처음인 것 같다. 그것도 퇴직하고 나서야.  

   

벌써 목련과 매화나무와 산수유나무와 벚꽃 나무엔 꽃봉오리가 많이 달렸다. 꽃이 곧 터져 나올 것만 같다.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동백꽃은 또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천천히 오랫동안 봤으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pia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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