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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재 Apr 05. 2023

냄새, 시간이 주는 선물

봄비

냄새만큼 우리의 감정을 흔들고 추억을 떠 올리게 하는 게 있을까?

누구에나 기억에 담겨있는 추억의 냄새들이 있다.


도시에 살면서 잘 느끼지 못하는 것들 중 하나가 "흙에 내리는 비 냄새"가 아닐까? 우연히 도시를 벗어나 잊고 있었던 그 냄새를 맡으며 ‘아, 이런 게 있었지!’ 하는 생각과 함께 옛 기억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그 기억의 감상에 잠시 모든 감각이 마비되기도 한다.      


『연중 습도가 가장 높은 계절, 비가 와서 축축한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보급품을 받으러 들어간 훈련소의 운영 창고에서 나는 퀴퀴한 공기가 만나서 만들어 내는 설명이 불가능한, 그 희한한 냄새를 느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언제부턴가 그 냄새는 잘 정돈된 잔디밭 같은 푹신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줬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비슷한 그 냄새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러면 동시에 그때의 보급 창고 구조와 조교들의 고함 소리, 그리고 줄을 맞춰 서 있던 꾀죄죄한 훈련병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렇게 무덥던 여름의 훈련소. 소금기가 말라 붙여 허옇게 된 국방색 훈련복 하며, 내무반 침상과 화장실 그리고 야외 훈련 때 까맣게 태운 화장지에 침을 묻혀 얼굴에 발라 위장을 하고, 밥 먹은 식기를 화장지로 쓱 닦고는 그냥 포개 놓았던 것들까지 순차적으로 이어진다. 가장 낯설었고 익숙하지 않은 시간들이었기에 기억들이 오히려 더 생생하게 자리를 잡았는지 모른다.』     


이런 냄새를 좋아할 이는 없다. 대부분은 피하거나, 소독약을 뿌리고 청소를 해야 되는 곳이라고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냄새다. 그런데도 잘 깎인 잔디밭처럼 편하고 푹신하게 느껴지는 건, 긴 시간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인 것 같다. 냄새만으로는 그리 유쾌하다 할 수 없는 오래 묵은 김치도 찜으로 해 먹거나 삼겹살과 같이 구워 먹으면 그 깊은 맛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시간을 거슬러 가다 보면, 또 다른 추억의 냄새가 있다. 한 겨울 습기 하나 없이 쨍하게 추운 날, 부엌 아궁이에 마른 솔잎과 솔가지를 태울 때 나는 냄새. 익어가는 밥 냄새와 같이 어우러지는 그 냄새는 청정 자연의 냄새다. 도시 생활을 동경하는 이들에겐 떠나야 할 이유들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이 냄새가 언젠가는 선물이 된다. 나뭇잎을 태울 땐 구수함이 섞인 매캐한 냄새가 나고, 외양간의 소들에게서는 축축한 정을 느끼게 하는 냄새가 있다. 또 오랫동안 정리를 하지 않은 골방에 겹겹이 쌓인 책에서 나는 냄새도 그렇다.     


가끔씩 외가나 친구 집에서 느꼈던 그 냄새들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냄새가 기억으로 있어서 다행이다.      




요즘은 생풀을 깎을 때 맡는 냄새가 참 좋다. 작은 풀은 아예 뿌리째 뽑아버리기도 하지만, 대문 밖에 있는 길가의 풀들은 매번 그렇게 하질 못한다. 그래서 클 만큼 자란 다음 예초기로 깎는데, 이렇게 잘려 날아가는 그 풀들에게서 느껴지는 냄새는 무척 싱싱하다, 이 냄새는 풀을 깎는 귀찮음과 피곤함을 충분히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시간이 주는 선물이라고는 하나 그 시간의 가치가 저절로 생겼을 리는 없다. 힘들었고 어려웠던 시간들, 나만 특별히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느껴졌던 그런 시간들이 지난 다음, 생풀에서 싱싱한 냄새를 맡듯 불현듯 찾아온 선물이다. 그렇다고 그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모두 사라졌거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뀐 건 아니다. 다만 그 아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냥 곁에 둬도 괜찮아질 만큼 내 마음이 모두를 받아들인 것이다.     

예쁘고 좋은 느낌의 <향기>라는 단어보다 <냄새>라는 말이 좀 더 인간적이다. 이 냄새라는 말에는 희로애락이 담겨있는, 우리 삶처럼 좋은 것도 또 나쁜 것이나 싫은 것도 모두 담고 있어서, 그래서 때로는 역하기도 하지만 같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말이기 때문이다.     


소리도 비슷하긴 하다. 음악을 들으면서 옛 기억을 떠 올리거나 또는 잔소리를 들으며 그때를 추억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그 기억들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가 곧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 깊이 숨어있는 추억들을 끄집어내기에는 부족하다. 이에 비하면 냄새는 몇십 년 묵은 장처럼 묵직하게 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데, 집요함 마저 있다. 이렇듯, 긴 시간을 살아온 보상으로 받은 선물이 미처 있을 것을 알지 못한 채 만나게 되니 더 반갑고 고맙다. 모두가 또 누구에게나 이런 시간의 선물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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