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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진 Feb 01. 2017

남쪽의 길 Ruta del Sur _#5

끝나지 않은 여정


기대했던 일정은 무산되었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고 보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한국 문화원과 산티아고의 대학에서 보여준 한국에 대한 관심. 아직 대단한 인기를 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겠지만 그곳 사람들의 애정 어린 시선과 환대는 힘든 일정에 큰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현지 사람들과 접촉하고 관심을 갖도록 해 준 분들은 그곳에 살고 있는 교민들이었다. 행사를 준비하고 장소를 정하는 것부터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 준 분들이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 


멘도사에서 경찰에게 차를 빼앗기고 안데스를 넘어 산티아고로 가는 시간은 끝없이 구불거리는 길만큼이나 마음도 복잡했다. 차를 찾을 수 있을지, 제 날짜에 상파울루까지 돌아갈 수 있을지, 멤버들이 계속 따로 다녀야 하는지, 많은 것들이 불분명했다. 운전은 조금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시야에 들어온 풍경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8월이면 남미는 겨울. 대륙에서 가장 높다는 아콩카과(6,962m)를 볼 수 있는 전망대를 지나고 잉카의 다리(Puente del Inca)를 지난다. 멘도사에서 칠레의 국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잉카의 다리. 수만 년 전 석회와 유황성분을 머금은 지층에 만년설 녹은 물이 파고들어 만든 자연의 작품. 약 100년 전에는 휴양지로 쓰였으나 지층의 변화로 지금은 접근이 금지된 곳이다.  



해발 3,200m의 산길을 지나 깐깐한 검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약 7시간 만에 산티아고에 닿았다. 미리 연락해둔 대학 두 곳을 둘러보고 행사를 준비했다. 지금까지 치른 홍보행사 중에 가장 반응도 좋았고, 대학 측에서 준비해 준 프로그램까지 함께하여 특히 풍성한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기쁨의 시간도 잠시, 산티아고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이번에는 푸드트럭이 말썽이다. 수동기어를 변속해주는 클러치 디스크가 마모되어 버렸다. 먼 길을 쉼 없이 달리고, 험한 산을 넘어오느라 무리가 됐는지 너무 빨리 마모되어 기어 변속이 잘 되지 않았다. 나라가 달라지니 차에 맞는 부품을 구하는 것도 어려워서 직접 구해다 정비소에 맡겼다. 한국에서라면 차를 올려서 금세 하겠지만 여기는 두 명의 정비사가 차 아래에 들어가 하루 종일 작업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부족해 초조한데 또 하루 반나절을 잡아먹었다. 그마저도 정비 중간에 부품 하나가 부서져 임시방편으로 다른 차의 부품을 가져다 꽂았다. 이튿날 그 자리에서 오일이 새는 바람에 또 정비소를 가야 했지만, 일단은 다시 출발이다. 

산티아고에서 상파울루까지는 약 3,700km. 남은 6일 동안 600km 이상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중간에 하루라도 더 지체하면 예비해둔 하루를 넘기기 때문에 차량과 홍보에 쓰인 물품을 반납하고 공항까지 갈 시간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 잔과 크루아상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운전을 시작해 중간 길가에 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까지 쉬지 않고 둘이서 번갈아 운전을 한다. 

아. 우리 차의 운전석에 대한 설명을 빼먹었다. 트럭은 이탈리아 IVECO 사의 daily 트럭이다. 3.5톤에 약 3.2미터 길이의 이 트럭은 2013년 형으로 상당히 새 차다. 그런데 알맹이가 없다. 오로지 차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본만 갖춘 차다. 라디오도, 오디오도 없다. 의자는 앞, 뒤로만 움직인다. 조수석은 그냥 고정. 창문은 당연히 수동. 그리고 결정적으로. 에어컨이 없다. 처음 그 사실을 알고는 정말 놀랐다. 이 더운 동네에 에어컨이 없는 차가 있다니. 겨울이어도 남미의 북부는 늘 덥다. 낮에는 거의 옷을 벗다시피 한 채로 운전을 했다.


어렵사리 6일간의 이동을 마치고 상파울루에 도착하는 당일. 유리창을 깨부술 듯 쏟아지는 우박 세례는 이제 그저 축하의 세리머니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안도의 마음으로 차를 반납하고 남은 일을 무사히 마쳤다. 

응. 그런 줄 알았다.

우리가 리우 올림픽 기간 동안 머물던 숙소는 코파카바나 해변 근처의 아파트였다. 그리고 주변에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 위원회 및 관계사 들의 숙소가 있었다. 그중 몇 팀과 가까이 지냈는데, 홍보사의 통역하는 친구와 우리 멤버 중의 한 명이 마음이 맞게 된 것. 역시나 새로운 곳에서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그런 마음이 싹트게 되나 보다. 일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이 잘 만나는 건 좋은 일이니 놀리는 한 편 응원도 해 주었다. 그러다 우리가 차를 찾을 수 없고 푸드 트럭에 다 같이 탈 수 없게 되어 한 명을 상파울루로 먼저 보냈다. 그리고 둘은 아름다운 시간을 가졌겠지. 그러다 비행기를 한 주 미루고 늦게 가겠다는 연락을 해 왔고 그러라 했다. 얼마나 좋을까. 한 달 만에 다시 만나 둘 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헤어져 우리는 공항에 갔다. 이제 집에 가는 일만 남았다. 교민분들의 배웅으로 탑승시간에 늦지 않고 여유롭게 공항에 왔다. 작별을 나누고 체크인을 했다. 순조로웠다.

공항 직원이 내 여권을 보고 왜 벌써 왔냐는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말이다. 지금껏 살면서 비행기를 몇 번이나 타 봤을까? 적게 잡아도 이백 번은 넘을 텐데 살다 살다 처음 겪는 일을 또 겪는다. 달콤한 시간을 갖고 있는 그 친구가 자기 것이 아닌 내 티켓을 한 주 미뤄 둔 것이다. 알고 보니 항공사 직원의 실수였지만, 바로잡으려면 시내의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알아봐야 하는데, 퇴근을 해서 안된단다. 나는 오늘 못 가고 다른 친구가 빨리 와서 비행기를 타라는 황당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심지어 처음에는 수수료를 내고라도 바꾸겠다고 했더니 그마저도 안된단다. 출항 20분을 남겨놓고서야 여러 직원을 거친 끝에 미뤄진 티켓을 취소하고, 새로 티켓을 구매해 탈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성향이 바뀌는 건지 모르겠지만 전에는 뜻밖의 상황이 재미있었다. 또 그걸 해결하는 기쁨을 즐겼다면 이제는 '오늘도 무사히' 하는 생각으로 여행을 한다. 경험에는 끝이 없다지만, 그것을 통해 또 성장하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여행은 부디 무사하면 좋겠다. 인천공항이 그토록 반가운 경험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한 달 간 우리가 횡단한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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