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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진 Aug 26. 2015

빛을 보는 새로운 시선_모로코 pt.1

 Red

많은 곳을 다니다 보니 묘한 인연을 맺는 도시나 나라가 있다. 방콕이나 바르셀로나가 그렇고, 이탈리아, 네팔이 그렇다. 남미나 아프리카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모로코가 참 많은 기억을 남기게 해 주었다. 예전 세계여행 때에 강도를 만나기도 한 곳이지만 좋은 친구들을 만나 위안을 얻기도 한 나라 모로코. EBS 세계테마기행 출연을 계기로 7년 만에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방송국에서는 사진가라는 이유로 색을 테마로 한 여행을 제안했다. 묘한 인연으로 애정이 생긴 모로코를 나름의 방식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모로코를 여행하는 것은 빛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구받는 일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존재하지만 지중해를 사이에 둔 채 유럽과 마주하고, 뜨거운 사막과 눈 덮인 산이 공존하는 곳. 이주해 온 아랍인과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이 어우러져 사는 나라. 다양한 빛으로 섬세하게 직조된 모로코는 그야말로 빛의 왕국이다. 환경과 종교 그리고 문화로부터 발원한 빛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들여다보았다.


Red

모로코의 국기는 붉은 바탕에 녹색의 별이 그려져 있다. 붉은색은 고대의 조상인 알라위트가(家)의 깃발 색에서 유래됐으며, 순교자의 피와 왕실을 의미한다. 또한 모로코의 붉은 토양에서 만들어낸 건축재료는 결국 '아프리카의 붉은 보석'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특히나 마라케시(Marrakech)는 붉은색으로만 건물을 지어야 할 만큼 색채의 특성이 강한 도시다. 모로코의 고도(古都)인 페스(Fez)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마라케시에는 이곳의 심장, 쿠투비아 모스크(Koutoubia Mosque)가 도시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12세기 말에 건립된 이 모스크의 첨탑은 높이가 77미터나 되어 도시 어디에서나 여행자들이 방향을 가늠케 하는 지표가 되어준다. 하루 다섯 번, 이슬람교 특유의 기도소리 '아잔'이 흘러나오면 신도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성지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 특히나 해질 무렵 들려오는 아잔 소리는 도시의 정취를 더욱 진하게 한다.



“내부에서 느끼던 생의 밀도와 온기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 섰을 때 나 자신이 광장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 광장이었던 것만 같았다.” 198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엘리야스 카네티는 모로코 여행 에세이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에서 마라케시의 제마 엘 프나(Djemaa el Fna) 광장을 두고 이러한 심상을 읊었다. '축제의 광장'으로 불리는 이곳은 하루 세 번 옷을 갈아입는다. 아침에는 온갖 만물을 파는 시장에서, 낮에는 거리의 공연장으로, 밤에는 활기찬 야시장으로 변신한다. 특히나 한낮의 광장에는 연극을 펼치는 사람, 뱀을 부리거나 불을 삼키는 묘기를 부리는 사람과 재담꾼들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 비해 자연자원이 풍부한 모로코의 야시장에는 삶은 달팽이부터 낙타고기로 만든 버거, 모로코 고유의 음식 타진 등 각종 음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포장마차가 즐비해 있다. 고유의 향이 느껴지면서도 우리 입맛에 잘 맞아 즐거운 체험을 할 수 있다. 물론 이슬람의 율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와 술은 없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꼭 술을 마실 수 없는 것을 아니다. 카우치서핑으로 여행할 때에는 친구들이 준비해준 덕에 어렵지 않게 맥주를 마실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으니 구하기가 어려웠다. 중독의 수준은 아니지만 하루 종일 후덥지근한 나라를 돌아다니며 촬영하고 난 뒤 저녁식사와 함께하는 맥주 한 잔이 그 날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은 사실이니까. 분명 카사블랑카라는 이름의 맥주가 있던 기억을 갖고 있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또한 신도가 아닌 사람에게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에이. 유난 떨지 말자. 없다고 3 못 버티겠나.’ 하던 생각은 채 5일을 못 넘기고 저녁을 먹는 식당마다 구걸하듯 묻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집에서 맥주가 있다며 종업원이 다녀가더니, 커피 잔을 두 개 내왔다. 그 안에 정말 감질나는 양의 맥주가 들어있었다. 사람들의 눈이 있어 그리 한단다. 큰 호텔에는 바가 있지만 방송팀의 형편으로는 그런 곳에 묵을 리가 없지. 모로코식 민트 차로 달래며 참아보기로 했다.


요즈음은 많이 알려진 숙박의 한 형태인데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카우치서핑’을 했다. 말 그대로 카우치 Couch, 즉 소파를 서핑 Surfing 하는 것을 의미하는 카우치 서핑은 전 세계 여행자들이 자유롭게 생각을 교류하고 숙박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인터넷 커뮤니티다. 당시 모로코에서 머물 때에 나를 재워준 친구를 다시 만났다.

삶의 길이란 정말이지 신기하다. 그때에 혼자 여행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정 주지 않기’였다. 길 위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자꾸만 정을 나누다 보니 헤어짐이 정해진 만남에 지칠 수밖에 없었고,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것이 정을 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자연의 흐름과도 같이 만남을 소중히 하되 헤어짐 또한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지만 한동안은 쉽지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헤어지고 나면 평생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게 모로코와 같은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놀랍게도 당시 나를 형제처럼 맞아준 마루안은 전도유망한 청년 정치가가 되어있었다. 알고 보니 그의 아버지 또한 모로코의 장관이셨던 것. 길지 않은 시간을 두고 서로의 삶이 이토록 달라진 것에 큰 기쁨을 얻었다. 비단 서로의 변화에만 기뻤던 것은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내가 이전에 함께 했던 카사블랑카 맥주는 대체 어디에서 구하느냐고 물었다. 대형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갈 일이 없어 몰랐던 것. 대신 이렇게 만났으니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단다. 역시.

마라케시 시내를 한참 들어가니 평범한 주거지역이 나온다. 호텔이나 번화가에 가야 있을 줄 알았던 맥주는 조용한 2층 주택에서 팔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욱한 담배냄새와 요란한 음악이 뭔가 있으리란 암시를 주었다. 점차 주점의 관리가 엄격해져서 프랑스인 주인이 궁여지책으로 만든 바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테이블마다 가득 쌓인 맥주병. 일반적으로 우리가 바에서 한 두 병의 맥주를 마신다 하면, 그들은 엄청난 양의 맥주를 소비하고 있었다. 평소 흔하게 접하기 어려우니 한 번 마실 때 많이 마실 수밖에 없다. 덕분에 그간 쌓인 여독과 회포를 일소시킬 수 있었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으로 헤어진 친구와의 재회는 그렇듯 여러모로 달콤했다.

가장 오래된 도시 ‘페스’에서는 성내 구역 메디나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9천여 개의 작은 골목에 오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페스에는 바로 500년을 이어온 가죽 염색 공장이 있다. 옛 시가지인 메디나에 있는 가죽 공장(Tannery of Medina)으로 중세 시대 방식으로 가죽을 생산해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되고 있다. 이미 근처에만 가도 지독한 냄새로 공장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세척제 역할을 하는 비둘기의 분뇨 때문이다. 그러나 그 품질만큼은 최고를 자부한다. 세계 테마 기행에는 보통 교수님이나 현지의 전문가들이 나오기 때문에 젊은 사람이 잘 출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쩌다 젊은 출연자가 오면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 준다. 그 냄새 구덩이에서의 시간은, 그 어떤 경험과도 견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붉은 사막 사하라에 가기 전에 거쳐야 할 곳이 하나 있다. 5시간 영화 아라비아의 유산, 글래디에이터의 배경지로 잘 알려진 아이트 벤 하두(Ait Ben Haddou)는 11세기에 지어진 카스바(성채, 주거공간)이자 요새 역할도 겸했던 건축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모로코 남부의 황량한 지역에 우뚝 솟은 이 요새 마을 유적은 모로코 전통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에 걸쳐있는 2,000m 길이의 아틀라스 산맥 중턱에 위치한 이곳에선 마을 전체가 방어벽으로 둘러 쌓여 특유의 위풍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방어벽 안쪽에는 카스바라 불리는 성채이면서 거주가 가능한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대저택과 일반주택, 학교 회당을 비롯 시장과 외양간 등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그리 크지는 않아도 곳곳에 숨은 다양한 공간을 찾아보며 천천히 마을 꼭대기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풍경은 모로코의 자연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과거 상인들의 거점에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흔히 '사하라 사막'이라 부르는 사하라는 아랍어로 '사막'이라는 뜻이다. 결국 '사하라 사막'이라 쓰는 것은 동어반복이겠으나 사막 중의 사막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면 꼭 틀린 말은 아니리라. 약 860만 ㎢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광대하고 가장 건조도가 높은 사막이기 때문이다. 이 사하라가 바로 대서양 연안의 모로코에서 시작해 동쪽의 나일강에서 끝난다. 여정은 사하라의 관문, 에르푸드에서 시작된다. 그 길에 낙타와 함께 했다. 마치 모래로 뒤덮인 붉은 바다와도 같은 사하라는 약 1억 년 전 두 번의 빙하기를 거치고 풍화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낙타를 타는 일이 편안하지는 않으나, 사람의 보폭과 비슷한 낙타의 걷는 속도에 점차 적응이 되면서 사막 깊은 곳의 드넓은 모래언덕을 둘러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임을 알게 됐다. 찬란한 달빛 아래 천막을 세우고 모닥불에 둘러앉아 사막의 밤하늘을 바라본 것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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