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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Lizzy Oct 01. 2017

D-28. 한국살이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1.

한국인으로 한국에 태어나 한국에 살고 있다.

타국에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은 약 5개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교환학생으로 4개월, 영국 런던에서 어학연수생으로 1개월을 지냈다.

그 외에 해외 여행을 한 시간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합치면 5개월쯤 될 것 같다.


만으로 27년 6개월의 시간을 사는 동안, 10개월을 제외하고는 오롯이 한국에 있었다.


2.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나는, 일종의 회색분자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그다지 한국에 살기 싫다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해외에 1년에서 3년 정도, 일하면서 체류하고 싶다는 생각을 버킷 리스트에 넣어놓은 적도 있지만, 베이스캠프 자체는 언제나 한국이었다.


왜 그랬을까.


"한국에서는 딱히 비전이 없으니까.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
- 44페이지


이 문장을 나한테 대입해보면 다음과 같다.

-> 명문대는 나왔고, 집도 어느 정도 살만하고, 김태희처럼 생긴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외모 자존감은 높다.

이대로 살아도 나중에 폐지 주울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새삼 내가 굉장히 기득권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된다.

하긴,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이 내 우울증을 그렇게 이해를 못하지.


3.

<한국이 싫어서>는 소설이다.

몇 년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그때는 거들떠도 안보다가 최근에 장강명 작가의 에세이를 재미있게 읽으면서 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제목만 알고는 한국의 정치 및 사회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회서적인 줄 알았는데, 왠열.

'계나'라는 주인공 여자가 옆에 앉아서 재잘대는 듯한 문체로 자신이 호주로 건너가 시민권을 따게 되기까지의 우여곡절과 고민이 담겨 있는 소설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호주는 워킹홀리데이하기 좋은 곳 정도였는데, 아래 문장을 보고 왜 호주로 이민까지 가는 사람들이 많은지 이해하게 되었다.


호주 국민이 되면 놀고 있어도 실업 연금 따박따박 나오고 큰 병 걸리면 병원비 다 지원되거든. 집 처음 살 때는 2만 달러쯤 돈이 나오고, 대학생 자녀 학비도 몇만 달러가 지원되고, 하여튼 좋아. 호주 영주권 가치가 한국 돈으로 10억 원쯤 된대.
- 142페이지


와우. 오늘부터 남자친구랑 진지하게 얘기해봐야 하나.


4.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만 벌어도 돼.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대신에 술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에는 돈 걱정 안하고 먹고 싶어. 어차피 비싼 건 먹을 줄도 몰라. 치킨이나 떡볶이나 족발이나 그런 것들 얘기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남편이랑 데이트는 해야 돼. 연극을 본다거나, 자전거를 탄다거나, 바다를 본다거나 하는 거. 그러면서 병원비랑 노후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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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 찾으라고 한다. 변호사가 되거나, 의사가 되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계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는 아는 여자다. 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고, 맛있는 거 먹을 때는 돈 걱정 안하고 먹고 싶다는 걸 안다.

나는 나의 '어떻게'에 대해 이렇게 디테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나 생각해본다.

-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는 최소 월 50만원씩은 쓰면서 살고 싶다. 내 기분을 어느 정도 제어하면서, 심각한 우울함은 느끼지 않으면서 살고 싶다. 어떤 일을 하든 하루 10시간 이상은 일하고 싶지 않다. 점심과 저녁을 시간이 없어서 못 먹는 불상사는 피하고 싶다.


이 정도밖에 못쓰겠다. 앞으로 내 생활을 좀 더 관찰하면서 더 채워봐야겠다.


5.

"똑같이 하와이에 왔다고 해도 그 과정이 중요한 거야. 어떤 펭귄이 자기 힘으로 바다를 건넜다면, 자기가 도착한 섬에 겨울이 와도 걱정하지 않아. 또 바다를 건너면 되니까. 하지만 누가 헬리콥터를 태워 줘서 하와이에 왔다면? 언제 또 누가 자기를 헬리콥터에 태워서 다시 남극으로 데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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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를 싫어한 펭귄'이라는 동화책의 주인공 파블로는 추위를 싫어하는 펭귄이다. 그래서 자신의 고향인 남극을 떠나려고 발악을 하고, 여러 난관을 거쳐 결국 하와이에 자기 힘으로 도착하게 된다. 그런 파블로가 만약 누군가의 우연한 도움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우연히 하와이에 오게 됐다면, 하와이에 왔다는 결과는 똑같지만 과정은 달라진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이런 식으로 과정의 중요성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우연한 힘에 기대어 결과를 이루어냈을 때는, 그 결과가 무너졌을 때 다시 일어날 힘이 없을 수 있다는 논리. 어쩌다 치트키를 쓸 기회가 생기면 꼭 한 번 떠올려봐야겠다.


*이 글의 모든 인용구는 <한국이 싫어서>(장강명, 민음사)에서 인용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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