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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Lizzy Oct 04. 2017

D-26.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3>

1.

글이 한 편 밀렸다.

그동안에도 밀린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대체로 다음날 오후까지는 작성했다.

그리고 밤에 또 글을 썼다.


그런데 어제도

그저께도

밤에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2.

잠을 잤다.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잤고,

오후에 삼촌댁에 다녀와서 또 잤다.


밤에 제대로 잘 수 있을까.

제대로 자도 이상하고,

제대로 못자도 이상하다.


3.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은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3>*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한강, 문학과지성사)에서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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