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지 Lizzy Oct 07. 2017

D-23. 카우치서핑

추억을 걷는 시간 2

1.

카우치서핑은 Couch+surfing의 신조어다.

직역하면, 소파를 서핑한다는 뜻이다.

의역하면, 남의 집의 남는 공간(소파든, 베란다든...)에서 공짜로 잔다는 뜻이다.

요즘 성행하는 에어비앤비의 무료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2.

2011년 11월 피렌체에서 처음으로 카우치서핑을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이탈리아 볼로냐, 헝가리 부다페스트, 프랑스 파리, 벨기에 브뤼셀, 체코 프라하, 독일 뮌헨, 덴마크 코펜하겐, 중국 난징에서 카우치서핑을 했다.


3.

카우치서핑에 대해서 언제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해보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 소렌토에 있을 때 카프리 섬에서 우연히 호주인 댄과 리나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둘은 카우치서핑을 하면서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고, "너도 해보지 그래? 내가 레퍼런스 써줄게"라고 했다.

카우치서핑은 신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레퍼런스가 중요하다.

댄이 써준 레퍼런스를 시작으로, 용기를 내서 다음 여행지였던 피렌체의 호스트들에게 리퀘스트를 보냈고, 첫 호스트였던 Slim이 쿨하게 수락하면서 내 카우치서핑 역사는 시작된다.


4.

첫 호스트였던 Slim은 그 당시 30대 후반의 혼혈 이탈리아인이었다. 방과 주방이 구분된 곳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나에게 주방 옆의 조그만 침대를 내주었다.

그는 나에게 스페어키를 내주는 대담함을 보여주었고, 저녁을 해주고 같이 피렌체 밤투어를 하는 친절함을 베풀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에게 꽤 치근덕 댔는데, 내가 뭣도 모르면서 단호하게 거절한 덕분에 불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던 것 같다.

와, 카우치서핑 짱이잖아?

새로운 사람도 만날 수 있고, 숙박비도 굳다니!


5.

돈은 못 벌면서도, 여행은 가고 싶고, 동시에 부모님께 손은 크게 벌리고 싶지 않은 대학생으로서 카우치서핑은 정말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1) 리퀘스트를 열심히 써야 수락된다는 점(호스트의 프로필을 열심히 읽고 왜 내가 널 만나고 싶은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꼼꼼히 영어로 적으려면 거의 1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2) 호스트의 기분을 맞춰주다 보면 내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는 점(저녁 정도는 호스트랑 먹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찍 일정을 마쳐야 하기도 했다)
3) 호스트의 집은 대체로 관광지와 먼 주거지이기 때문에 이동 시간이 길어진다는 점

정도가 있을 듯하다.


카우치서핑의 매력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숙박비를 아낄 수 있다(난 예의상 선물을 주었기 때문에 완전 무료는 아니었지만)
2) 식비도 아낄 수 있다(대부분 음식을 만들어주거나 사주었다)
3)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호스트 뿐 아니라 호스트의 친구 또는 같이 머무는 카우치서퍼)
4) 현지인과 깊은 교류를 하며, 현지인만이 아는 정보를 알 수 있다

매력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3번! 사람이다.


6.

카우치서핑말고도 (여행지에서 어쩌다 만난 사이까지 포함한)친구네 집에서도 꽤 많이 잤다.

냉정하게 말해서, 참 많은 사람들에게 국제적으로 신세를 지고 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카우치서핑도, 친구네 집에서 자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아진다.

예전만큼 돈이 아쉽지 않아서이기도,

예전처럼 1시간씩 리퀘스트 편지를 쓸 열정이 없어져서이기도,

신세를 질 때의 미안함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무미건조한 어른이 되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7.

한창 카우치서핑을 찬양했던 시기에 아는 한국인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면, 10% 정도가 "우와, 나도 해볼래"의 반응을 보였고, 나머지 90%는 "그걸 어떻게 해?"같은 반응이었다.

일면식 없는 타인이 자신의 공간과 시간을 내어주는 심리 자체를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도 많았다.

사실 호스트하는 사람들이 대단하긴 하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공간과 시간을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걸까?

이 역시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여행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자신도 여행을 많이 하거나/했던 사람들이 많다)
2) 어차피 여행자가 자기 집에서 훔쳐갈 게 없다고 생각한다(파리의 호스트는 자신의 노트북을 가리키면서, 이 집에서 가져갈만한 건 이거 뿐이라고. 근데 이거 도둑맞는게 무서워서 이렇게 재밌는 일을 안하냐고 물었다)
3)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한다(집안에 머물면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무엇보다도, 이러한 "호의"가 세상에 번졌으면 좋겠다는 선의를 가진 사람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8.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이제는 내가 그동안 받았던 호의를 돌려줄 때가 된 것 같다.

수원은 서울에 비하면 여행자가 많이 찾는 곳이 아니지만, 그래도 찾는 사람이 있긴 하다.

한창 수원의 문화유산을 사랑하던 때에는 여기를 방문한 독일인 2명을 끌고 화성투어를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결혼하고 나면 내 집(정확히는 남친 집이지만)이 생기니!

남친을 설득해 호스팅을 시작해 봐야겠다.


기대된다.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