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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Apr 26. 2016

손편지에 대하여

너와 나의 역사의 조각

1.

사용한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나의 책상에는 서랍이 세 칸 있는데, 1년에 한 번 정도 크게 '버려줘야' 한다. 정리하면서 보다 보면 황당할 정도로 쓸데없는 것들이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으니.

가장 많이 정리를 하는 곳이 첫 번째 서랍이고, 그다음이 세 번째 서랍이다.

두 번째 서랍은 항상 가득 차 있긴 하지만 버릴 건 별로 없다. 잘 열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쩌다 열게 되면 오랫동안 열려있다.


두 번째 서랍에는 내가 평생 받아온 손편지들이 모아져 있다.


2.

누군가는 힘들 때 그동안 받은 손편지들을 보며 힘을 얻는다고 한다.

대체로 편지에는 나에 대한 좋은 말들이 담겨 있으니까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손편지는 때로 두려운 물건이다.

그 속에서 묘사되고 있는 나는 대체로 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대단하고 좋은 사람인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소위 말하는 '오글거리는'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뭔가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해서 쉽게 보지는 않게 된다.


3.

첫 만남은 9살,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한 건 17살인 친구의 생일을 기념해 편지를 쓰려다가 문득, 그동안 이 친구한테 받은 편지를 한 번 다 모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이 친구한테 받은 11통의 손편지를 발견했다.

이메일도 업무가 아니면 거의 쓰지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 친구는 얼마 전 내 생일에 '이번에는 편지를 못 써서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다.

내 생일과 그녀의 생일은 약 한 달 차이로 내가 더 빠른데, 항상 그녀가 편지를 써주니 나도 그녀의 생일에 편지를 썼던 것 같다. 그렇게, 그녀 덕분에 나는 1년에 적어도 한 통의 편지를 쓰고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4.

정갈한 글씨에 담긴 그 11통의 편지 속에는 그 친구의 눈에 비친 그 시절의 내가 오롯이 담겨 있다.

고등학교 때 호기롭게 나갔던 학년장 선거에 떨어진 일이나,

원하던 대학교에 합격해서 한참 자부심에 가득했던 때나,

교환학기를 앞두고 설레던 나의 모습이 있다.


또한 그 편지 속에는 그 시절 친구의 모습도 담겨 있다.

힘들게 재수를 결심할 때의 마음,

개강한 후 과제에 치이는 모습,

언젠가 만나게 될 짝에 대한 기대와 설렘까지.


5.

기억은 언젠가 변하고 잊혀지지만,

기록은 언제나 그대로 남아있다.


타인의 관점에서 쓰인 나와 너에 대한 기록은 한동안 잊고 지내던, 때로는 있는지조차 몰랐던 그 시절 속 한 장면으로 나를 순간 이동시킨다.

그래서 어떤 편지는 차마 열어보기가 두렵다.


6.

이제는 멀어진 관계의 사람에게 받은 편지를 보면

한 때 우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너무나 객관적으로 확인시켜주어서 마음이 아프다.

환경의 변화로, 귀찮다는 핑계로 어느 순간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던 사람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분명 나에게 기록의 조각물을 남겨줄 만큼 가까웠던 사람들.

가끔씩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싶어 지는 사람들.


7.

그리하여, 나의 두 번째 서랍 속 물건들은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어떤 편지는 앞으로 다시 읽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차마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타인에게 주었던 기억의 조각들은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을지 새삼 궁금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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